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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787 추천 수 0 2015.04.29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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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4-2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장 14절-20절


14절-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셨느냐, 갈릴리로 먼저 가셨느냐?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 왜 갈릴리로 먼저 가셨느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에 세례요한의 전도를 예루살렘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더 잘 들었는지,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더 잘 들었는지? 어떤 곳에 예수님이 더 잘 가실까?


역사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이 헤롯왕의 잔칫날에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그러니까 당신 앞으로 길을 닦게 하는 종을 보냈는데 이 종을 죽였으니 예수님은 죽인 그곳에 안 가신다. 진리이치를 죽이는 자기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하늘의 좋은 소식이 안 가신다는 것이다. 그 이치를 생각을 하라. 세례요한의 전도소리를 듣고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발걸음이 가신다는 것이다. 그 원칙을 알아야 한다. 이치가 들어있는 신앙을 여기서 깨달아라. 그래야 자기의 신앙이 은혜를 받는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들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듣기 좋은 세상복음이 많으냐, 아니면 천국복음이 많으냐? 세상 사람들이 어느 쪽의 소식을 듣기를 좋아하느냐? 세상복음. 그곳에는 예수님이 가지 않으신다. 잡아 죽이는 데는 안 가신다. 자기의 신앙이치를 죽이는 곳에, 영인성장을 죽이는 그곳에 왜 가시겠느냐?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때가 찼고’ -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요한을 죽였다는 점에서, 주님의 신실한 종을 죽였다는 점에서 악한 때가 찼다. 비진리가, 자기의 세상 육적인 생각이 천국복음 천국소식을 자꾸 죽이고 있다면 그 사람의 때가 찬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앞서 보내신 신실한 종을 죽였다는 점에서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판단을 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때가 찼다.


그 다음에 회개의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가 찼다는 것.


때가 찼다는 여기에서 긍정적인 면에서 때가 찬 게 있고, 부정적인 면에서 때가 찬 게 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영에 속한 신앙과 육에 속한 신앙이, 생명적인 신앙과 사망적 신앙이, 그리고 의와 불의가, 흑과 백이 완전히 드러나게 해야 될 때라는 점에서 때가 찼다.


그 다음에 마지막 때에 진리의 종들이 수난을 받으면 구원의 예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금 말세이니 때가 찾다.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선악간의 구별을 지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때가 찼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의 정신 상태를 보고 ‘예수님이 어디만큼 왔겠구나’ 하는 그걸 걸 느껴봐라.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선지자도 지나가고 세례요한도 지나가고 성육신 예수님도 지나간다. 선지자도 역사적으로 지나갔고 세례요한도 성육신 예수님도 지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도 우리도 지금 모두가 지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소식의 들을 때 무엇이 찼고 무엇이 가까이 왔는지, 또는 무엇이 가까이 오고 있는지 개인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이 탈 때 누가 오는 건지? 그리고 진리이치를 자기 속에서 죽이고 세상을 주장하고 소원하고 목적을 할 때 무엇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고 있는지? 신앙의 정신 사상을 보고 그 면을 점을 쳐라. 구약에 누가 잘 알아맞혔느냐? 요셉. 다니엘.


안 믿는 사람이 살면서 미래적으로 되어질 것을 꿈꾸는 그것도 꿈, 예수 믿는 자기가 미래에 실현될 그것을 바라보는 그것도 꿈. 그렇다면 어느 꿈이 참 꿈이고, 어느 꿈이 개꿈이냐?


안 믿는 사람도 지금 눈을 뜨고 있으면서 일을 하면서 꿈을 꾸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같은 이치로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밤이다. 이 세상은 어둡다.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꿈을 꾸는데 그러면 눈을 언제 뜨느냐? 이 세상 사람은 모두 꿈을 꾸고 있다. 이 꿈은 실현이 되기고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꾸는 꿈은 실현이 되는 꿈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꿈을 꾸고 있다. 우리도 참 꿈을 꾸어야 한다. 그러면 믿는 우리는 언제 눈을 뜨느냐? 눈은 천국에 가서 뜬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려고 자기에게 사건을 통해서 부르고 계신다. 이걸 뿌리친다고 하면 누가 영원히 후회가 되겠느냐? 우리의 신앙은 실질적인 면에서 영원히 실현될 실질적인 면을 다루는 거다. 종교적인 사역목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안 믿는 사람인데, 이 느브갓네살 왕이 참 꿈을 꾼 거냐, 개꿈을 꾼 거냐?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꾼 그것이 세상에서 보여졌느냐, 천국에서 보여졌느냐? 세상에서. 세상에서 보여진다는 걸 하나님의 신을 받은 다니엘이 해석을 했다. 그러니까 느브갓네살에게 그 꿈이 이뤄졌으니 그 꿈이 참 꿈이냐, 이뤄졌어도 그건 불에 타기 때문에 거짓된 꿈을 꾼 것이냐? 거짓된 꿈이다.


이 세상의 왕이나 정치인들이 다 꿈을 꾸는데, 각자 일어나서 뭘 실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 하나님의 신을 받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종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그 꿈이 실현됐더라도 이것은 어떻게 된다’ 하는 이걸 안다.


자기가 지금 기발한 꿈을 꾸고 있느냐? 간밤의 꿈은 아무리 잘 꾸었어도 자고 일어나니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또 그 꿈이 실현이 됐다고 해도 죽음 저 넘어 가서 보니 아무 것도 없다. 이걸 알아야 성경의 예언도 방언도 풀 수 있는 거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흔히들 하는 예언 방언이나, ‘저승에 갔다 왔네’ 하는 그건 사단 마귀가 한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사단 마귀는 성경 속에 들어있는 뜻은 못 깨닫게 하고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경의 해석은 없다. 자기가 보고 들은 체험만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나 그 주장을 따라가는 자들은 같은 악령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못 깨닫는다. 이들은 성경은 들고 하지만 이상한 것을 받는다.


16절-20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무엇을 보았느냐? 시몬과 안드레 두 형제가 힘을 합쳐서 그물 던지는 걸 봤다.


창조주 주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이들이 언제부터 어부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자기를 인간으로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나 알고 날마다 바다를 향해서 그물을 던졌을까?


이들의 소원 목적이 ‘그물을 더 크게 더 멀리 던져서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어 잘 살아보자’인지, 이게 아니면 ‘살다가 죽더라도 그냥 하루 하루를 살아보자’ 한 것인지, 아니면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니 메시아를 만날 때까지 열심히 살아보자’ 한 것인지? 세상의 소원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산 건지, 아니면 메시아를 만날 목적으로 합심해서 열심히 산 건지?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들을 불렀을까?


어쨌든 그 형제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뭘 낚는 어부가 좋을까? 돈을 낚는 어부가 좋을 런지? ‘돈’ 하면 세상이다. 그 때로 말하면 이들은 산 고기 잡아다 배따서 소금 처서 파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산 고기를 잡아다 죽이려고 그물을 던지는 거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했으니까 고기를 낚는 쪽이 좋은지, 사람 낚는 쪽이 좋은지? 이걸 잘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님이 나를 보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부르는 건지, 아니면 세상 어떤 부요성 또는 세상에 대한 목적을 두고 부르는 건지?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일평생 사는 것도 나온다. 그러니까 평소에 어떤 업을 가지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 밑으로 투자가 되는 건지, 아니면 물고기를 낚아서 배따서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낚기는 낚는데 죽이려고 낚는 건지? 그걸 잘 알아라. 그런 면이 들어있다. 그걸 잘 알아야 한다. 진리본질이 아닌 곳에 낚여 들어가면 고기 낚을 때 끝에 미끼를 매달듯이 거기에 유혹이 돼서 그만 낚여서 코가 꾀이는 것이다.


이단자들은 자기들의 어떤 지역적인 쪽으로 본문을 얘기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전체적인 영적 이스라엘의 영능의 실력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자칫 잘못해서 잘못된 그룹 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꼼짝달싹을 못한다. 한 번 들어가면 거기서 탈출하기도 힘들고 재산 다 바치고 하게 된다.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는 말씀에 이들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세례요한이 전하는 말을 새겨듣고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 속에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음성으로 듣고 따라간 것이다.


나도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는 그 음성을 들을 때 이들처럼 그렇게 들리느냐? 그러면 그 말씀을 따라라. 그 정신을 따르고 그 삶의 목적을 따라라. 이 말씀을 듣는 자는 따라가지만 못 듣는 따라가지를 못한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볼 때 ‘선택된 자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택이 된 자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상이 되어 들어가는구나’ 이게 있는 것이다. 아무나에게 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목사는 발에 밟힐 정도로 수없이 많다. 그런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닌 종도 많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그냥 따라갔다. ‘당신의 말씀을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하고 묻는 것도 없이 그냥 따라갔다. 자기의 생명적 이해타산이 없이 그냥 따라갔다. 우리도 이런 거 따지면 예수님을 못 따라간다. 그런 거 따지면서 혹 따라간다 해도 그건 따라가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돋볼 게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따를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따를 수 있었을까? 고기 잡는 어부생활이 지긋지긋한 것이냐?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차에 ‘마침 잘 되었다’ 하고 따라간 것이냐?


역사적 상황적으로는 이미 이들이 세례요한의 전도를 듣지 않았나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이걸 영적 신앙사상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아 내 속이 주의 길이 예비 되었다면 그 신앙사상은 언제고 주님이 오시면 맞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음성이면 이건 주님이 음성이니 이런 가르침을 하는 분이라면 이들로서는 아무 의심 없이 그냥 그 교훈의 정신을 따르게 돼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자에게 구원의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것이다.


갈릴리 어부들은 산 고기 잡아다 죽이는 어부요, 예수님을 따르는 어부들은 사망권 안에서 사는 자들을 생명권 안으로 낚아서 살리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어느 어부가 좋은지 판단이 난다.


또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다. ‘조금 더 가시다가’ 즉, 이들은 부름 받을 수 있는 그 사상의 근접성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멀리 간 게 아니라 주님이 어부 베드로 부를 수 있는, 그리고 다음 제자들을 부를 수 있는 그 근접성에 있었다. 즉, 이들이 이미 세례요한의 전도소리를 들은 것이 그 근접성에 있다는 뜻이다. 만일 주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보니 가까이에 헤롯당원이 있다고 해서 그를 부르겠느냐?


그러니까 ‘조금 더 가시다가’ 하는 거기에는 주님이 부를 수밖에 없는 그 근접성을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부 베드로하고 같이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정신이 전혀 딴판이라면 주님은 그 사람은 부르지 않고 그냥 지나치신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는데 그러면 이들이 무엇을 할 때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느냐?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그물을 깁는 것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물은 그 조직이 그 간격이 잘 배열이 돼 있어서 고기가 그물에 들어오면 도망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져 구멍이 나 있으면 고기가 그물 속에 들어가도 그 구멍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이걸 진리사상적으로 말하면 자기 속의 신앙사상이, 그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허점이 없어야 그물노릇이 잘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에게서 늘 허점이 없는지 찾아야 한다.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부름에 아버지도 내버리고 일꾼도 내버리고 배도 내버리고 그물도 내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내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 부모형제들에게 동의를 얻어서 따라간 것도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따라갔다.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따를 때 믿음이 없는 자들과는 의논의 대상이 안 된다. 가령 베드로가 부모 자식들 형제들 다 모아놓고 ‘어떤 분이 나를 부르는데 내가 따라가야 옳겠습니까, 안 따라가야 옳겠습니까’ 하고 안 믿는 부모형제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이 따라가라는 말이 나올까, 아니면 ‘세상에서 돈 벌고 어쩌고’ 할까? 100% 따라가지 말라고 한다.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 세계에서도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목회를 하고 말고 하고 있다면 아예 집어치워라. 목회를 누구의 말을 듣고 하는 거냐?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온 식구가 따라야 한다.


애굽에서 출발해서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온 식구가 따라가야 한다. 가다가 고생이 되고 엎어지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가야 한다. 따라가는 그 면에 아멘이고 주님 말씀 받고 가는 그 길에 힘을 합쳐야지 왜 잡아 뜯고 왜 못 가게 붙잡고 하느냐?


사람을 낚는 그게 사기꾼은 잡아다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거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사람을 낚아다 사람의 차원을 올리고 존귀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은 일중에 최고의 일이다. 이 일은 이방인은 못하는 일이다. 이 일은 아무나 받아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 일이 받아진다면 가야 하고 온 가정이 따라야 한다. 이 길을 가는데 잡아 뜯고 못 가게 하면 나중에 그 앙화를 어떻게 받을까?


목회자 부모가 진리본질을 놓고 가려니 가족들이 고생을 한다. 자녀들은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한다. 그래도 그 옳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냐? 그 길을 가다가 대학교를 못 가도, 고등학교를 못 가도 그 길은 가야 하는 것이냐? 자기 속에 확실히 정답을 내려라.


학교는 갈 형편이 되면 가는 거고, 못 가는 형편이 되면 못 가는 거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삶인데 그 길을 가다가 대학에 못 간다고 해서 불행해지고 빨리 죽고 그런 법이 있느냐? 그 길이 대학 때문에 못 가고, 자기 일 때문에 못 가고 그런다면 그게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거냐? 예수를 믿고 따르려면 이치가 분명하게 믿어라. 그래야 네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속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보통 보면 집안 일이 우선이고 예수 따르는 건 뒷전이다. 이런 상태로는 교회를 나간다고 해도 이건 복된 신앙이 아니다. 시대적으로 사건이 오면 너는 불속에 들어갈 신앙이다. 바리새교인들이 그랬고, 유대 모든 백성들이 불속에 소실 됐지 않았느냐?


사건 환경 속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는 신앙은 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방편이다.


지금 다들 ‘대학 대학’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학에 가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대학에 가면 그만큼 사람의 수준이 올라가고 배운 것만큼 뭔가가 달라져야 하는데 대학을 다닌다고 해도 정서적인 면을 보면 독사와 같다. 사람 사는 가운데서 사람 사는 정신은 없다. 돈 벌어서 돈 쓰는 그 쪽으로 사람의 정신이 들어있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게 들어 있지는 않다.


오늘날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 물 먹은, 그리고 외국 유학 물 먹은 세상에서 아주 높은 수준을 가진 사람과, 성경의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의 수준을 비교해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쪽이 질적으로 월등하냐? 자기 신앙을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냐?


대학교 갔다 나왔다고 해서 부자로 살고 천 년 만 년 살라는 법이 있느냐? 결혼해서 살다가 병이 들 수도 있고, 길 가다가 교통사고로 평생을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어떤 건지 아느냐?


하나님의 일을 놓고, 교회의 일을 놓고, 신앙의 일을 놓고 믿음 없는 사람들과는 의논의 대상은 안 된다. 안 믿는 남편이 있는데 월급 타오면 아내가 안 믿는 남편에게 ‘십일조를 낼까요’ 하면 내라고 하겠느냐, 내지 말라고 하겠느냐? 믿음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을 놓고 의논의 대상은 안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방해를 받기 쉬운 요인들을 찾아보면 첫째 방해는 ‘예수님이란 분이 어떤 분일 줄 알고 따라가느냐?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의 지위가 있느냐? 시골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러니 무엇을 보고 따르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 그 분의 인격을 알고 따르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어떤 요건을 보고 따르느냐? 자기에게 어떤 생각이 방해가 될까?


두 번째 방해는 예수님을 따르자니 부모형제와 배와 그물을 다 버려야 되고, 인정정실과 수단을 다 버려야 되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목숨까지 다 버려야 한다. 안 버리고는 따를 수가 없다. 그런 방해가 있다.


세 번째 방해는 ‘우리 두 아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가족부양은 누가 하나’ 등등의 걱정이 되면 따를 수도 없고, 혹 그 상태로 따른다고 해도 따르나 마나다.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형편을 모르실까? 그 사람이 사는 가정적 재정적인 형편을 모르실까? 주님께서는 이런 걸 모르고 부르는 건지, 아시고도 부르시는 건지? 주님께서 부르실 때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그런 것을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할 때 ‘그럼 나는 어떻게 하고요’ 하면 예수님은 ‘너 그 걱정하려면 따라오지 말라’ 그게 들어 있기도, 또 한 편으로는 그 말씀에 따라오는 그 사람에게는 ‘내가 다 책임을 지마’ 하는 것도 들어 있는 것이다. 세상 말로 하면 자식이 군대 나가면 군대 간 그 자식이 자기가 옷 사 입고 구두 사 입고 하느냐? 군대에 나가기만 하면 그 책임은 자기가 아닌 백성이 지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거짓된 신앙인데도 가만 보니 마귀의 백성들이 책임을 지더라. 우리에게 그걸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가면 예수님 당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909.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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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4 신명기 성인(聖人)의 길, 소인(小人)의 길 신11:26-28  김부겸 목사  2015-05-08 401
12083 에배소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 엡6:1-3  한태완 목사  2015-05-08 1383
12082 요한일서 사랑을 전하는 것 [1] 요일4:7-21  강승호 목사  2015-05-06 610
12081 시편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쉬자 시68:19  한태완 목사  2015-05-06 1390
12080 여호수아 마음을 함께 나누자 수22:1-9  최장환 목사  2015-05-06 547
12079 예레미야 마음을 비우기 렘29:1-14  최장환 목사  2015-05-06 691
12078 마가복음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막1:21-28  김경형 목사  2015-05-05 450
12077 마가복음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1:21-28  김경형 목사  2015-05-05 494
12076 마태복음 인정을 넘어야 한다 마10:34-39  강종수 목사  2015-05-03 391
12075 출애굽기 기도의팔을내리지말라 출17:8-16  강승호 목사  2015-05-02 1056
12074 누가복음 죽음 file 눅20:38  강경희 자매  2015-05-01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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