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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165 추천 수 0 2019.11.19 16: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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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8:9-3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창세기 槪觀)

18장 9절-33절.

 

9절-15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 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역 밖의 일을 말씀하시니까. 늙은 사라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다.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하갈은 애굽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니까 하갈은 애굽을 상징하고,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애굽성 세상성을 가진 목회자가 누구라?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이 인본주의를 써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이것을 갈4:24에서는 시내산으로부터 낳았다고 했다. 즉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낳는 것이지만 이스마엘은 약속이 아닌 율법을 따라 낳았다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 율법은 ‘하라. 마라’ 하는 것으로, 율법을 따라 하는 것에는 약속이 없다는 거다. 이삭은 이스마엘이 생겨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이 인본주의를 써서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은 것을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과 짝을 지어서 종교적인 어떤 큰일을 이뤄놓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으로 된 것이 아닌 율법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령한 후사는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신령한 영적인 일을 하시겠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사람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거다. 이런 영적인 일은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그리고 모르는 자에게는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모른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절대로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후계자를 염두에 두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건데, 신앙 믿음의 후계자는 질적 본질적으로 생명적 신앙노선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그러니까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통해 자식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생명적 믿음의 후계자를 말씀하신 거다. 신앙 믿음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후계자는 생명적 노선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회에서 후계자를 세울 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원하시는 노선을 걷는 자를 세워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것과는 상관이 없이 아버지가 그 교회 목사이면 자식을 그 교회 후임으로 세우는 일이 많다. 이건 성경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거다.

 

이스마엘은 세상적으로 잘 먹고 민족적으로 커지겠지만 이것만 있지 영원한 언약은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목사님들이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자식을 낳고 키운다면 그 자식은 이스마엘의 성질로 자라게 된다. 인본주의를 쓰면 외형적으로는 불어나지만 이것은 율법에 매인 신앙으로서 생명적 후손은 없다. 언약의 후손인 이삭의 복은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의 본질의 운동을 하는 자식은 없다.

 

당시에 아브라함은 생명적 노선에서 신앙 믿음의 구원의 후계가 나온다고 하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이삭이 나야 그 때는 안다. 그런데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을 보면 아브라함의 경험을 성경을 통해 수없이 보면서도 생명적 노선을 모르고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명적 노선이 어떤 것인지 교회들에게 다 보여줬는데도 오늘날 교회의 인도자들이 말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생명적 신앙노선을 모른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아는데 역사 속에 들어있는 생명적 구원의 노선을 모른다.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었는데도 오늘날 교회들은 생명계대적 신앙의 이치를 모르고 있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말세의 교회들이 생명적 계대로 가지를 않는구나’ 이 말이다.

 

교회의 인도자들이 육적 제도적으로 후임자를 세우는 것은 생명계대의 신앙을 모르는 거고, 이건 인본주의 신앙이다. 무슨 말이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종교적 제도를 가져다 쓴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해타산이나 사고방식이나 모든 믿음성이 하나님 앞에 생명적 새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건 없고 기독교 종교적 제도를 갖다가, 이렇게 되면 세상방식이 되는 거다. 그러면 이게 무엇과 같으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들어가는 것과 같은 거다. 이게 인본주의 사고방식인데 인도자들이 이걸 모른 채 공공연하게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신앙은 생명적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데, 이런 자들이 진리신앙 계대로 나가는 교인들이나 종들과 싸움이 붙는 거다. 총칼을 드는 싸움이 아니라 메시지 싸움이다. 오늘날 각 교회마다 ‘나는 왕이다. 나는 이 면에 전문이다. 나는 저 면에 전문이다’ 라고 하며 제각기 외치고 있지만 이런 것은 생명계대적 하나님의 의사단일과는 질이 전혀 다르다. 이것은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키우자. 키우자’ 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진리신앙 계대로 나가는 사람과는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브라함은 언약의 후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거다. 무조건 준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신앙하는 질이 언약의 후손을 받을 수 있는 질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생명적 언약의 자손은 인간들이 종교적으로 쓰는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라는 말씀에 순종을 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라고 하시는 것 자체가 벌써 생명적 후대를 약속으로 안겨주시겠다는 거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순종을 하면 생명적 후사는 당연히 받게 되는 거다. ‘생명적 후대를 주시오. 주시오’ 한다거나 충성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주는 게 아니라 순전히 아브라함의 신앙의 심성을 보시고 주신다 그 말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인본주의 믿음으로 충성봉사를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죽을 때까지 충성봉사를 하고 목숨까지 바쳐도 의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닮는 것은 없다. 오늘날 인본주의 교회 안에 이런 교인들이 판을 치고 있고, 또 목사님들은 이런 교인을 믿음이 좋다고 올려주고 있다. 다른 교회에 다닐 때 열심히 충성봉사 하면서 그게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자기 스스로를 말씀에 의해 판단해 보면 말씀에 의해 자기가 드러나는 거다. 생명계대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신앙 노선에서 되는 거지 충성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그 사람들이 거기에서 소돔으로 떠났는데, 19장에 보면 두 사람만 롯에게로 갔다. 아브라함의 집을 출발하려고 할 때는 세 사람이었는데 롯의 집에 갔을 때는 두 사람이다. 이들이 아브라함을 떠나기 전에 아브라함이 한 사람을 붙들고 기도를 해서 두 사람만 롯에게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1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의 신행(信行)이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감동을 줬다. 사자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실 비밀을 아브라함에게 말해주겠다고 한다. 하나님과 친할수록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말해주는구나.

 

하나님과 먼 사람일수록 자꾸 허물을 만든다. 교회 안에서 허물을 자꾸 말을 하게 되면 사람 보기에도 안 좋고, 하나님 보기에는 더 안 좋다. 하나님과 멀어진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허물을 감춰준다. 허물을 감춰준다는 게 무슨 뜻이냐? 했는데도 안 했다고 말해주는 거냐? 깨닫게 해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게 허물을 덮는 거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게 하는 게 허물을 덮는 거다. 상대를 불쌍하게 생각하며 진리로 권고하는 것이 허물을 덮는 거다.

 

상대의 잘못을 자꾸 긁어서 부스럼을 내고, 더 나아가서 안 한 말도 붙여서 말을 해서 교인들 간에 싸움을 붙이면 싸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느냐? 교회에 잘 나오던 교인이 자기 때문에 안 나온 일은 없느냐? 없는 말을 만들어서 이러쿵저러쿵 해서 교인들 간에 싸움을 붙인 일은 없느냐? 이렇게 해서 교인들끼리 싸운다면 싸운 두 사람이 교회에 계속 나오겠느냐? 이런 일이 있으면 회개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이룰구원에서 큰 실수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적 본질에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자기 마음도 안 보이고, 남의 허물만 크게 보이기 때문에 재앙 받을 비구원적인 일을 하게 된다. 남에게 죄를 짓게 하고, 자기 고통을 자기가 만든다.

 

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뭐가 강대한 거냐? 세상성으로 강대한 거냐? 아니다. 하나님과 단일성으로 되는 게 강대한 거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온 세상이 다 달라붙을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버티고 계신다. 하나님이 배경이다. 하나님과의 의사 단일성이니 하나님과 친한 거고, 하나님과 친해야 만이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거다. 의사단일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면 이건 개죽음에 불과하다.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복의 기준이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성령님도 좋아하시고 주님도 좋아하신다. 예수님께서 유대 율법자들에게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거늘’이라고 하신 것은 이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다.

 

강대한 아브라함을 저주하고 무시하면 이 사람은 멸망이다. 사람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복의 기관이 되어서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이 나가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언약된 약속이 나가고 있는데 이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자기가 저주를 받는 거다. 성경에 선지자를 무시하면 자기가 무시당하고 멸망을 받는다고 했다. 차원 높은 도의 봉우리에 있는 엘리사에게 내려오라고 하다가 불에 타서 죽은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올려놓으신 것을 인간들이 끄집어 내리면 그 자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교회의 종들은 올라가야 하겠는데 뭘로 올라가야 하느냐? 생명적 신앙을 붙잡고 올라가야지 썩고 멸망당할 세상 요소적인 것을 붙잡고 올라가면 멸망이다. 이건 벌써 이치가 달라진 거다. 교회에서 매 주일마다 목사님의 메시지가 뭐라고 흘러나오느냐? 이게 그 목사님의 신앙사상이다. 속에 있는 게 그대로 나오는 거다. 그래서 못 속인다. 그런데 교인들이 생명적 신앙의 본질을 모르니까 비진리적 인본주의 설교를 듣고 있는 거다. 이게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현상이다.

 

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본인과 자식, 그리고 종들까지, 즉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어린애나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까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할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집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의미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을 섬기면서 옳은 도덕성을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과 그 권속들을 택했다는 거다. 이 말에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신앙이 들어있는 거다. 물론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지만 계속 살아오면서 실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게 있었던 거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라고 했는데. 그 때 당시의 사람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 믿음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상상해 봐라. 여러분들이 지금 궁극교회에 왔는데 어떤 마음으로 왔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차원적인 신앙 믿음을 위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 같으냐? 이런 소리가 안 들리느냐? 한 마디로 지금의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해 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듯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어떤 약속이 있는 거다. 지금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듣는 것이 시간을 내서 아무 교회나 가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느껴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다는 게 느껴지느냐?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했으니 누가 이뤄야 하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이뤄야 한다. 당신의 일을 이루려고 택했다. 안 그러면 뭐 하려고 택하느냐?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할 게 뭐가 있느냐?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겠다고 막 설치느냐, 가만히 있느냐?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마음이 달아있다. ‘열심히 충성봉사를 할까요? 예배당을 지을까요?’ 이게 아니다. 오직 말씀순종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당신의 일을 이뤄나가시는구나.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느냐? 뭘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오직 말씀에 순종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 만들어지는 것이 순종이다. 그러면 만들어진다는 게 뭐냐? 진리지식으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소돔 고모라가 불바다가 될 때 그 이웃 고을들인 아드바, 스보임, 소알 등도 같이 불에 타버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 고을들이 소돔 고모라에 왔다 갔다 하더니 소돔 고모라의 정신에 물이 들어버렸다. 소돔 고모라화 돼버렸다. 그래서 소돔 고모라가 불바다가 될 때 같이 불바다가 된 거다.

 

이것을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생각을 하면 예수 믿는 자기가 어떤 신앙 믿음을 좋아해야 하겠으며, 어떤 정신 사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했으니, 반대로 친구가 친구를 먹칠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도 좋은 친구를 사겨야 하지만 신앙적으로도 비진리적인 친구를 사귀면 안 된다. 이러면 자기 얼굴을 더럽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

 

친구를 잘못 사귀면 나쁜 친구와 같은 취급을 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나보다 못났으니 저리 가라. 안 사귀련다’ 이럴 수 있는 거냐? 그건 아니다. 그러자니 인인관계성에 얼마나 조심해야 될 런지? 지혜를 잘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진리의 교인이나 목사들이 와서 함부로 말을 하면 ‘그런 말을 들을 새 없습니다. 가세요’ 라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한 번 들어주고 두 번 들어주고 세 번 들어주다가 이게 버릇이 되면 나중에는 그만큼 떼기가 힘이 든다. 이런 면에도 지혜를 써야 한다.

 

교인들이 소돔 고모라에 대해 몸 파는 창녀들이 많은 곳으로 생각을 하는데,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세상 사상적 신앙을 말하는 거다. 세상에 속한 교회를 말한다 그 말이다. 이게 음녀교회다. 음녀교회는 진리생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좋은 믿음이 뭔지를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시는 눈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생각을 해야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이 들어갈 텐데 그냥 눈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아브라함에 대해 말을 하고 생각을 하니,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행동이나 아브라함이 겪은 사건을 가지고 ‘믿음이 좋네. 나쁘네’ 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사상을 받아가져야 만이 아브라함과는 시대가 다르고 사건이 달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이 나오게 되는 거다.

 

오늘날 우리가 아브라함의 행동을 따라 하면 자기의 신앙이 아브라함처럼 되는 거냐? 아브라함의 신앙사상의 신행을 모르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되느냐? 그러니 말뿐인 거다. 그리고 이런 신앙이라면 소돔 고모라에 온통 창녀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은 것으로만 알지 성도가 영적 음행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를 보면 정신 사상 면에서 소돔 고모라와 같은 교회가 안 보이는 거다.

 

소돔 고모라의 주위 동네들도 같이 심판을 받고 망했는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소돔 고모라처럼 불로 심판을 받는지 생각을 못하는 거다. 신앙사상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없으면 못 보는 거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를 처음으로 믿을 때 영적인 면의 음녀에 대해 알았느냐? 전혀 몰랐다. 이런 것과 같은 거다.

 

영적 음행이란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가졌던 정신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룰구원의 신앙사상이 아닌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짝 짓는 것이 소돔 고모라요, 음행이다. 육으로 보는 것은 비유적인 거고, 이 비유 속에 들어있는 영적 사상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거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이걸 모른다. 그러다 보니 지금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노아홍수 때처럼 점점 더 죄악으로 흘러가고 있다.

 

노아 때로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온통 가인의 사상으로 살고 있었는데, 노아는 그 시대상을 따라가지 않고 말씀의 이치를 따라 방주를 짓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나는 온통 죄악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살면서 노아처럼 말씀의 방주를 지을 자신이 있느냐? 이렇게 살려면 얼마나 지혜로워야 모든 유혹과 미혹을 이기고 믿음의 방주를 지을 수 있겠느냐? 이런 지혜가 교회에서 조달이 안 되면 안 된다.

 

오늘날 교인들이 소돔 고모라가 음란한 도시라서 불심판을 받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게 영적인 면에서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고, 또한 그 옆의 도시들이 왜 같이 심판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영적인 계시의 뜻이 들어있는 것인데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말을 하고 있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이 말씀은 사람의 소문만 듣고 판단하지 않고 직접 오셔서 듣고 판단하신다는 거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꼭 눈으로 봐야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변덕 많고 변심이 많은 인간들의 말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거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의 말은 진리 그대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으신다. 사람들의 말은 공의가 아닌 편견이 있다.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소돔성에 두 사람이 들어갔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다고 한다. 그러면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다는 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란 ‘계약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말씀하신 계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신앙(말씀대로 믿는 신앙)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23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가까이 나아가.’ 왜 바짝 붙느냐? 바짝 붙는 마음이 어떤 거냐? 엄청나게 마음이 탄다는 거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에서 예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라고 하신 기도가 생각이 난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이런 마음으로 롯을 위해 기도를 한 거다. 롯이 의인으로 살았다는 말보다는 롯도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의인이라고 한 거다.

 

24절-32절: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의인이 오십이 있을지라도’로 시작해서 ‘45인이 있을지라도, 40인이 있을지라도, 30인이 있을지라도, 20인이 있을지라도, 10인이 있을지라도’까지 내려갔다. 그러니까 의인과 악인을 같이 멸하지 말고 공과 사를 잘 가려서 공의대로 심판을 해 달라는 거다.

 

이것을 보면 롯의 종들은 이미 롯의 집에서 다 나간 거다. 왜 그러냐? 종들이 전도가 됐다면 50에서 60, 70으로 자꾸 늘어날 텐데 자꾸 줄어져서 결국은 십 인까지 내려갔으니 롯의 가정의 종들만 아니라 식구들까지도 소돔 고모라 정신에 물들어 버렸다는 말이 된다. 의인이 십 인도 안 남았다는 말이 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을 보고 죄악의 소굴인 소돔 고모라를 택한 롯이 그곳에 살면서 전도는커녕 자기 하나 바로 서기도 힘이 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숫자가 줄어든 거다.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 쪽을 선택하게 되면 그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가 필히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의인이 열 명이라도 있으면 용서해 주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세상사람들은 예수 믿는 의인들 때문에 산다는 거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까?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다는 걸 알까?

 

3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여호와’란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이 분의 말씀에는 언약과 약속이 있고, 구원의 능력의 실력이 있고, 생명의 능력이 있다. 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고 떠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 예수이름으로 한다. 그런데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원성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다. 아무리 밤새도록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며 간절히 기도를 할지라도 그 내용이 전부가 세상 것이라면 이건 간절성이 아니다. 중언부언일 뿐이다. 하나님의 의도성에 맞추는 게 간절한 기도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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