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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으로서의 환난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1862 추천 수 0 2009.06.26 22: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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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4:20-2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79 / 1989.10.15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밥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사도행전 14:20-28


19절과 20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쳤던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고 제자들이 둘러섰는데 바울이 일어나서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거기서 또 복음을 전하고 원래 자신들을 보냈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데 21절에서 보이듯이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갔다고 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죽을 뻔했고 이고니온과 안디옥은 먼 이방 도시까지 바울을 쳐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한 못된 유대인 무리들이 온 지역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 길을 되짚어 갑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 바울의 배짱이 뭔가? ’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서 딴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금방 돌 맞아 죽을 뻔했던 자리를 되짚어 간 것입니다. 딴 길로 돌아갔다고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님이 어디서 나셨는가?  물어물어 오다가 헤롯한테까지 갔으나 돌아갈 때는 천사들의 지시를 따라서 딴 길로 갔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돌 맞고 혼난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됩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러한 이유를 알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주어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루스드라나 이고니온이나 안디옥에 있는 도시에서는 바울만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모든 신자들도 동시에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바울이 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선 이 문제, 곧 환난에 대한 바울의 배짱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도대체 성경적으로는 이 환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특별히 이단과 사교의 집단들이 바로 이 문제에서 기독교와 맥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단들의 주장은 환난을 면케 한다는 것이 그 초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환난이라는 건 꼭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이것만 하면 여러분 자녀가 이번에 시험을 잘 본다든가, 들었던 병이 낫는다는가 하는 식의 것도 그 범부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환난이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했을 뿐 당했던 환난이 면해진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기독교를 뭐라고 공격을 하느냐 하면 너희가 잘못 믿고 있고 모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다 되는데’ 라고 하면서 어떤 방법, 아주 간단힌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신앙은 참 간단한 것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틀립니다. 실제로 신앙은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왜 복잡하냐 하면 인간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복잡하다는 뜻은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 깊고 오묘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단추 하나 누르고 건전지 하나 바꿔 끼는 기계가 아닙니다.


 로마서5장으로 가시면 환난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1-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 이 부분은 우리말 번역이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3절을 잘뭇 생각하면 “환난이 와도 그 속에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이 나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마약 주사 맞은 사람이 뜨거운 걸 만져도 뜨거운 줄 모르는 것같이, 괴로워도 괴로운 줄 모르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걸 신앙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기쁘다’ 그런 뜻이 아니라 ‘환난 자체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하는 정당한 시각이고 오해의 소지를 분명하게 구별해내야 되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1장 식으로 설명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겁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이 말이 ‘시험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입니까?  아니면 그 시험을 기뻐하라는 겁니까?  그 시험을 기뻐하는 겁니다. 시험 자체가 기쁨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3,4)


 ‘시험에도 불구하고’가 아닙니다. 시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환난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같은 환난이나 시험이라는 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의도된 간섭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기 쉽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목적지를 향하여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가는 데 이 세상이 나를 얽어 매고 방해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 세상에 대한 초월 의식입니다. ‘나를 공격하려면 공격해라. 난 그런 것 아무래도 괜찮아’ 이런 시각으로 세상과 우리 삶을 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과 내가 부딪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무신경해지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꾸 현실에서 도피하여 기도원으로 수도원으로 숨어버리고 자신을 자꾸 흥분시키며 자기의 열심과 기쁨 속으로 도망가는 식의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건 내가 걸으면서 당하는 모든 길에 대해서 정당하게 감각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것이 왜 내 앞에 있는지 정당한 평가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해서 거슬리는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극복해야 될 것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기뻐하며 시험을 기뻐하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좀더 종합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 히브리서 12장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히 12:6-8)


 분명해지시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출생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가 자식을 낳기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르십니다. 완전한 자리에까지 가도록 우리를 기르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채찍질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뽑아내야 할 것, 우리 안에서 더 다듬어야 할 것들 때문에 신자의 인생 길에 주께서 계획하시사 우리로 만나게끔 하는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상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을 얽어매고 방해하는 세상의 세력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와 만나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5장 식으로 얘기하면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과연, 환난이 우리에게 하는 일 중에 대표적인 게 무엇입니까?  환난을 당하면 갑자기 더 주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지 않습니까?  사람은 환난이 없으면 어느 틈에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삽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환난을 당해야, 즉 내가 내 힘으로 넘어설 수 없는 큰 일을 맞이해야 우리는 다시 주를 찾습니다. 좀더 깊이 말하자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미련하며 잘 잊고 사는 완악하고 연약한 그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이 내 힘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만 극복되는 것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환난이 만들어내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않습니다. 환난이 닥쳐야만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불 나면 애 놔두고 보석 들고 나올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평상시에는 애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고 삽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 봐야 우리는 사람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는가보다 하나님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시는가 하는 것이 내 마음에 가장 중요한 위로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환난이 이뤄 주는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원리를 알았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가 로마서를 기록했고 지금 사도행전에서도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된다.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악에서 꺼내 놓으셨을 뿐 이니라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우리를 영광된 자리에 흠 없고 점 없이 만드실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곧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을 볼까요? 로마서 8:28-30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만드시고 태어나게 하시고 구원얻게 하시고 간섭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까지 빚어내시고 만들어 내십니다. 그래서 영광 된 자리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보는 신자의 운명이요 인생입니다. 그가 환난을 두려워 하니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빚어서 완성시키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병장을 10바퀴 뛰라”는 명령은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튼튼하게 되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되짚어 안디옥까지 갈 수 있는 이유가 뭡니까?  고난을 자초하는 듯이 보인 그의 행동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차범근 선수는 어디가 달랐느냐 하면 고등하교 시절에 그 학교를 지키는 수위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벌써 차범근 선수는 운동장에 와서 뛰고 있더라는 겁니다. 비 오는 날은 복도에서 뛰고 있고요. 천재였기 때문에 그가 공을 잘 차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연습했다는 겁니다. 눈 감고도 공이 몸에 붙어 다니도록 말입니다.


 좀 오래 전입니다만 광주에서 열렸던 전국 체전에서 스포츠 기자가 비가 오는 날 옥외 게임이 중단되어 혼자 산보를 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이른 아침에 누가 공원 농구대에다 슈팅을 하고 있더랍니다. 그가 바로 이충희 선수였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면 알수록 공 차는 연습을 하고 슈팅 연습을 하고 운동장을 뛰고 하는 것에 대해 자신에게 벌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광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축구선수요 농구선수인 줄 안다면 그 일은 그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일이요 더 해야 할 일입니다. 아마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대 더 때려 달라고 거꾸로 되짚어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그에게 과외로 남아서 하는 개인 연습이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개념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사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영광된 자리에 세우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개념이 있으십니까?  그러기 위하여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사 무슨 일을 만나게 하여 거기서 우리 안에서 주님만을 위하는 것 이외의 것들 빼내시고, 나를 의지하고 세상을 향하여 가고있는 마음들을 정리하게 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장에는, 그 시험마저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우리게게 감당할 시험밖에 주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유익을 얻고 진전되도록 하려는 것이지 이걸 이기면 합격이고 여기서 지면 낙제라는 기준을 주시기 위해서는 아니란 뜻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그의 손에 잡고 계시고 그의 손 안에서 우리의 인생 길이 복되고 영광 된 길을 향하여 의도되고 있고 간섭되고 있다는 뜻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아닙니까?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할 것이 없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가?


또한,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남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얼마만큼 훈련을 받았다구요?  ‘이젠 죽었다’ 이렇게 생각을 했을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죽는 문제가 아니고 그걸로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는 법을 얻었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산앙 생활에 감사가 없고 그 깊은 뜻에 동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기운이 팔팔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김치를 담그려면 맨 처음 무엇부터 합니까?  소금에 절여야 되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금을 잘못 쳐 가지고 도리어 배추가 시퍼렇게 살아납니다. 그리서 김치를 해놓으면 이빨 다 부러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신앙생활에 재미를 모르고 그 깊고 오묘한 감사가 없는 이유는 덜 절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앞날에 좀더 고달픈 일이 있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두려워 마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분명한 신앙으로 정립이 된다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무섭지요. 그것이 정상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은 누가 무섭습니까?  세상이 무섭지요. 돈보다 더 무서울까요. 거기서 여러분이 넘어오시고 승리하시고 극복해 내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신자다운 삶으로서 그 인생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쓸모없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 다같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이 요구를 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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