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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신앙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1666 추천 수 0 2009.06.26 22: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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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4:21-28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76 / 1989.09.24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느니라” 사도행전 14:21-28

사도행전 14:21-28까지의 내용은 사도행전 13장과 14장 전체에 대한 일종의 결론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 선교사역의 전체적인 골격을 이해시켜 줄 수 있는 본문이라 생각됩니다.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구절은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횔로 돌아와서 한 27절의 보고문입니다.

그 보고문은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를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첫 번 선교 여행을 통해서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이 그의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유대인들이 유력자들과 비류들을 선동해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을 방해하며 그에게 물리적인 압박을 가했습니다. 또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14:5을 보시면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러고 달려드니”라 했으며 실제로 루스드라에 이르러서는 19절에 있는 것 같이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고 하는 상황까지도 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있었는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위태로웠는가, 적들의 반응이 얼마나 격렬했는가 하는 쪽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다는 것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말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려고 하는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라고 앞으로 교회가 어떤 성격과 사명을 가질 것이냐 하는 데 있어서도 마음 속에 분명한 기초로 간직되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과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신앙 행위의 적극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 사역을 통털어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복음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됨과 그 부르심에 관한 것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크게 적극성을 띠고 있는가 하는 데에 놀라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날 현대 교인들의 예수를 믿는 모습은 굉장히 소극적입니다. 무엇이 적극적이고 무엇이 소극적이냐 하느 것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마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런 신앙 상태의 차이를 초래하게 되었느냐 하는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이렇게 적극성을 띠고 했는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이렇게 소극적으로 변하게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적극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갖는 내용, 즉 ‘복음의 비밀의 내용이 어떻게 권위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로 말미암은 적극성입니다.

사도행전 4:10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읍이니라 하셨더라. ”(행4:10-12)

여기에 바로 적극성을 띨 수 있는 사도 바울 신앙의 기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방법이 없고 구원을 얻지 못하면 인간은 심각한 형벌의 자리를 면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적극성을 띠게 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타협을 하지 않는 신자로 일생을 걷게 하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뻔한 얘기 같지만 만만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약속들보다 지금 살고 있는 현세에서의 필요성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 예수를 나는 믿는다’는 말이 포함되어있으며 그 예수를 맏는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할 소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의 십자가 사역을 증거하고 다니는 모든 일을 그 인생의 가장 큰 보람과 책임과 사명으로 알고 그의 전 평생을 삽니다. 나와 내 인생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십자가의 비밀이 더 많이 증거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갖는 최고의 소망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 신자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맞지 않습니다. 사도행전13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시면 성경적 인생관과 세상적인 인생관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될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13:2을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즉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적극성과 비타협성을 가지게 되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가 자기 인생을 살지 않고 그에게 어떤일을 맡기신 분의 분부를 지키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4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래서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가 알고 있는 13장과 14장에 기록된 선교 사역을 떠나는 것입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하러 간 것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는 아주 인생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정한 것이냐, 하나님이 정한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나름대로의 결정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인생과 자기 욕심을 채우는 부수적 수단으로 동원되지 않도록 여러분 스스로를 분명하게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시고 하나님을 속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타협할수 없는 문제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1:6말씀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6-8)

신자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항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불러시키는 일, 그분이 보낸일 이외의 것으로 우리의 인생 항로가 변경되고 목표와 방법과 원리가 변형되어 있다면 그건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누가 그렇게 했다 해도 이것만은 교회가 꼭 지켜야 되는 가장 중요한 근거들입니다. 이걸 놓치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도 아닙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고 많은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가 아닙니다. 교회의 임무란 흑암한 세상 속에 빛을 던지러 가는 것이요,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들 앞에 “너희가 버린 이 예수가 사실은 우리 구원의 유일한 문이다” 라고 외치러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세상살이를 골치 아프게 하고 많은 오해와 곤란한 일을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로 그 일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20:17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저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느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가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17-24)

이것이 신자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는 보냄을 받고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 우리는 계획 짜고 일을 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와 신자가 그의 인생 속에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이런 적극성을 상실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우리가 증거해야 되는 것들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는 언제나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이세상을 살고 주를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으로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이익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드 등불을 켜서 됫박 속에 감춰 버렸숩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고 횃불을 높이 쳐든 것이 아니라 전부 자루 속에 감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기껏 세상으로부터의 고통과 오해와 좌절들을 면하게 하는 나쁜 주문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건 교회도 신앙도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복을 구하러 와있지도 않고 형통을 구하러 와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야망과 우리의 계획은 십자가 밑에 다 파묻어 버린 지오래여야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획을 갖고 계시며,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 앞에 진리와 생명과 영원한 약속과 그리고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구원의 문을 증거하여 선포하라고 우리에게 하루의 삶을 주시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놓고 있다면 그건 교회도 아니고 신자도 이니고 사기꾼일 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헌당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기쁜 일입니다. 한 개인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등불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 크고 환한 횃불이 되기를 바립니다. 다만 이것이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더 많은 치장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서 서로를 속이는 집단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과 존재 이유와 방법과 원리들에 대해 묻고 그 말씀에 따라 나를 쳐 복종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좋은 옷 입고 와서 좋은 찬송 듣고 헌금하고 웃으면서 돌아가는 것이 신앙 행위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이 세상과 살벌하게 싸우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빛을 감추지 마시고 여러분의 신자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정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신앙을 동원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타협하여 여러분이 신앙인인 것과 여러분이 영원하고 옳고 바르고 두려운 약속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것을 감추지 말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보고가 다른 것입니다. 그가 나가서 한 일은 주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그걸 어느만큼 성실히 했느냐가 의미 있는 것이지 그가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어떻게 대접을 받았고 혼이 났고 방해를 받았느냐 하는 것들은 그 보고서에 올라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그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의 목숨이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목숨 때문에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을 2차적인 문제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부탁한 일이 우선이요, 그것을 위하여 당하는 어떤 고통도 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돌로 쳐서도 막을 수 없었고 감옥에 넣어서도 말릴 수 없었고 다른 어떤 세상적인 것으로 유혹해서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가져야 되는 분명한 원리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 가시면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일을 더 잘 설명하는 대목과 만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1:27-30)

어떻게 하라고요? 28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존재 가치와 그 책임 있는 신분과 지위를 뺏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유혹하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기셔야 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듯이 여러분이 십자가로 승리할 것이요 여러분을 대적하는 이들이 십자가 앞에 굴복하는 열매를 얻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에 유일한 목표요, 이유요, 책임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 남편 승진하는 것, 복권 당첨되는 것, 이것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첫 벗째 문제가 되거나 여러분을 좌우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신자답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어느속에서나 무슨 일에든지 그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30절에 있는 바와 같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의하여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사도 바울을 방해해도 그 악한 도전에 대하여 악한 것으로 그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문 되시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을 전할 뿐, 이 세상에서의 자기 지위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방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겪는 싸움입니다. 남이 나를 뭐라고 하든지 그것에 변명하고 대꾸하다가 신자로서 받은 바 책임 있는 것을 놓고 이 싸움에 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하느라고 우리는 신자로서의 싸움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원수보다 잘나게 해주십시오. ” 이것 외에는 기도 제목도 없고 욕심도 없고 헌금을 내는 이유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를 채찍질하는 것도 “저 아이의 부모보다 우리가 더 공부 잘했는데 왜 저집 자식보다 우리 새끼가 못하냐? ” 이 싸움밖에 없습니다. 자기 증명이나 하고 악으로 악을 대하는 싸움에 온 평생을 보내고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마라”라고 한마디 남기는 것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이것같이 가난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게 할 바에는 아예 예수를 믿지 마시고 세상 나가서 재미있게 사시다가 죽기 30초 전에 빨리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국 가서는 수의실 옆에 계시게 되겠습니다마는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그 몫을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참상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의 재판과 다를 게 있습니까?

세상 사람보고 물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약삭빠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만도 바쁜데 저들은 어쩌면 그렇게 세상에서도 좋은 것에는 언제나 앞장서 있고 예수 믿어서 좋는 것도 앞장서 있고 그럴 수 있을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가면 그 원수들이 세상에서도 우를 앞질렀는데 교회에서까지도 앞질러 있는 것 꼴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옥 가면 어떡합니까? ”라고 물으면 “천국가면 영원토록 그놈들 맡바닥에서 괄세 받을 것 같아서 더더욱 못가겠다”라며 이를 갑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약삭 빠른 사람들,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분부받은 사명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도 ‘나는 예수를 믿노라 나는 천국에 내 영원한 소망이 있노라’ 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내가 그때 저희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기에 여러분이 거의 저촉될 것 같습니다.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평안과 주술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목사한테 양복이나 한 벌 사주고 좋은 말 듣고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축복 받아내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 잘했다고 묻어 두면서 사는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을 가지고 책임 맡은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며 일생 동안 성실히 살기 위한 서로 간의 충고가 있어야 되고 격려가 있어야 되고 위로가 있어야 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을 기대하신다면 잘못 오신 겁니다. 오히려 교회가 그렇지 않는것에 대하여 슬퍼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우리의 영혼을 각성시키며 분발할 것을 요구하며 세상에게 지지 말고 환난과 궁핍과 곤경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을 기쁨으로 받은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설교를 원하는 자도 없고 하는 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의 복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외에 우리에게 기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돌이키실 때입니다.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 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범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1-9)

이제 모세가 주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몰아내야 됩니다. 여호수아는 큰 전쟁을 예비하고 들어 갑니다. 아마도 그는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가 가서 해야 될 이 거룩한 싸움, 영적인 싸움에 매우 당황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그 지도자로 불러 세우고서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담대하라, 강하라’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담대하고 강하라는 그 요구를 무엇을 근거로 주시는지 아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5절에 있는 식으로 얘기하면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우리의 신앙이 적극성을 띠지 못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내편이 되는 것만으로 ‘저는 이 일 못하겠습니다, 불안합니다’ 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신자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경배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보다 누가 더 무서운 것입니까? 세상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돈이 더 무섭고 하나님의 심판보다 세상의 심판이 더 무서운 것이 됩니다.

우리는 다시 돌이켜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편이며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어야 됩니다. 더 이상 필요한 힘은 없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며 명령을 주셨으니 그 명령대로 살아야 할 것만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어쩌다 잘먹고 잘살고 잘노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슬그머니 우리에게 주어진 횃불을 감추어야만 되는 곳까지 밀려 왔습니까? 불행한 일 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험은 학생운동이나 좌경화나 이북 공산당이나 미국이나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그 영역과 하나님의 권위를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항복하여 쓰임받지 않고 치장만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의 능력을 세상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를 키우고 있고 신자들은 심리적인 위안을 받기 위하여 교회에 나올 뿐 하나님을 무서워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생명된 원칙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서로 웃고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시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행복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편을 드십시오. 하루라도 빨리 돌이키시면 그만큼 이익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느냐 하는 것 때문에 흔들지 못하게 하십시오. 돌로 맞고 능욕을 당하고 환난과 고통 속에 있었으나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길을 가는데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관심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여셨도다” “나에게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하며 긍휼을 전하게 하셨도다”“내 말을 듣고 돌아오는 자가 있었도다” 이것 외에는 그의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도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여러분을 퉁하여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존귀하심이 드러나며 죽어가는 영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열매 맺는가로 자신을 점검하셔야 됩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가치 있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 외에 어느 것도 여러분의 인생을 흔들지 못하게 하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마시고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이 기억하는 영혼들이 되길 바랍니다. 목사하고 친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하고 친하십시오. 교회와서 잘난 척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쓸모있는 인생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더 많이 나타나시고 일하실 수 있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것외의 일들은 교회 와서 요구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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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 요한계시 부활의 능력 계3:21  이천수 목사  2009-07-08 2740
1743 마태복음 뜻이 하늘에서 마6:10  이천수 목사  2009-07-07 2636
1742 에배소서 '우리 모두 한 지체다' 엡5:30  이천수 목사  2009-07-07 2291
1741 마태복음 사망의 포위망을 뚫자 마7:1-10  이천수 목사  2009-07-06 1993
1740 고린도후 삼층천의 축복 고후12:2-5  이천수 목사  2009-07-06 3406
1739 마태복음 사랑이 팔자다 마16:16-18  이천수 목사  2009-07-06 2115
1738 창세기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15  이천수 목사  2009-07-06 2722
1737 야고보서 나를 벗어나자 약1:12  이천수목사  2009-07-06 1952
1736 요한복음 물과 영생수 요4:9-14  강종수 목사  2009-07-06 2100
1735 창세기 돼지 저금통 file 창38:1-19  태승철 목사  2009-07-05 2812
1734 사도행전 바울의 자기 변호 행22:2-5  박영선 목사  2009-07-04 2179
1733 사도행전 기독교적 인간관 행21:37-22:1  박영선 목사  2009-07-04 2396
1732 사도행전 기독교적 역사관 행21:31-36  박영선 목사  2009-07-04 2102
1731 사도행전 흉악한 이리 행20:29-32  박영선 목사  2009-07-04 2182
1730 사도행전 교회의 결심 행20:28-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005
1729 사도행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2153
1728 사도행전 생명을 살리는 의와 사랑 행20:6-1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78
1727 사도행전 유일한 기준 행19:23-32  박영선 목사  2009-07-02 1936
1726 사도행전 그늘 속의 아볼로 행18:24-28  박영선 목사  2009-07-02 3675
1725 사도행전 출발과 끝 행18:9-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614
1724 사도행전 의지적 예정 행18:5-11  박영선 목사  2009-07-02 1759
1723 사도행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행18:1-4  박영선 목사  2009-07-02 3041
1722 사도행전 철학과 과학 행17:22-31  박영선 목사  2009-07-02 1566
1721 사도행전 코카콜라 행17:16-21  박영선 목사  2009-07-02 2339
1720 사도행전 성경을 상고함 행17:11-14  박영선 목사  2009-07-02 2433
1719 사도행전 주 예수를 믿으라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3445
1718 사도행전 신앙의 구걸 행16:26-34  박영선 목사  2009-07-02 1703
1717 사도행전 기도와 찬송 행16:22-32  박영선 목사  2009-07-02 2202
1716 사도행전 점치는 여인 행16:16-23  박영선 목사  2009-07-01 1976
1715 사도행전 여자, 루디아 행16:11-15  박영선 목사  2009-06-29 2168
1714 사도행전 동역자 행16:6-10  박영선 목사  2009-06-2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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