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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156 추천 수 0 2009.06.29 21: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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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6:6-10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86 / 동역자 / 행 16:6-10 / 1989.12.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기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 16 : 6 - 10

 

바울이 바나바와 헤어지고, 처음 선교 여행을 떠났던 곳을 다시 방문하여 저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는 일을 위하여 2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1 - 5절에 이르는 동안에는 디모데를 어떻게 만나서 데리고 다니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오고 오늘 우리가 보는 6 - 10절까지는 그많은 성도들이 마음에 의아심을 품기도 하고 섭섭해하기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비두니아 쪽으로 가려고 애를 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했고 더더욱 마게도냐로 오라는 환상까지 보게 되어 마게도냐로 떠나게 되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종종 이 구절은 특별히 아시아인들, 그중에서도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제일 기독교적인 열심히 많으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섭섭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때 만임 주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면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건 이쪽 아시아가 되었고 괄세받는 건 백인들이 되지 않았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굉장히 큰 오해 중의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느냐? 그것은 지금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뜻에 따라 바울을 하나님이 꼐획하고 계시는 계획으로 빨리 인도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시기도 하고 환상을 보게도 하는 것이지 어느 쪽에 손해를 끼치고자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아시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아시아 반도입니다. 터키가 있는 곳이지요. 그러니까 바울은 기껏 팔레스타인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주의는 뛰어넘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많이 흩어져 살고 있던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계획은 바울을 통해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고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로 하여금 빨리 둥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부르고 계시는 것이지 아시아를 괄세한 그런 기록은 아닙니다.

 

어느 한 쪽만 가지고 그러지 마십시오. 아시아가 못살게 됐으니까 아시아에 태어난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지 우리가 잘 살 때 태어났으면 아마 좋았겠지요.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검둥이로 태어났으면 말짱 꽝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지금 소원하는 것과 결부시켜서 성경을 몰아가는 것같이 말도 안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볼 때 그말도 안되는 일들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시각이 굉장히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어떤 책임을,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는 ABC도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요. 제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울 왕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 하는 것이었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는 지금 우리 눈으로 볼 때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그런 기록들이 많습니다. 사울이 그런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인데 이스라엘의 왕까지 되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는 선택함을 입은 것을 보면 구원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폐위당하고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반대하고 악신의 부리움을 받고 결국 자결해서 죽고 마는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보면서 하나 분명히 해야 될 것은 구약은 조금 전에 질문한 것 같은 내용에 답하기 위한 기록은 없습니다. 구약 기록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데에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록하시고 싶고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은 많은 것 중에 구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가? 하나님은 어떻게 능력이 많으신가? 하나님은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무엇을 싫어하시는가? 하는 것이 그 내용의 초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심판이 굉장히 신속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악한 짓을 해도 심판이 그렇게 조속히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기록의 초점과 신약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같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관해서 초점을 모아서 기록하고 있다면 신약은 신자가 그가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심판이라는 것은 굉장히 보류됩니다. 언제나 실패가 있고 또 실패가 있고 또 실패가 있어서 돌아오고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이 기록이 되고, 이건가저건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일들, 이런 것들이 오히려 주류를 이루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가는 추적하지 않고 내가 소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주문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본다면 여러분은 성경에서 여러분이 요구하는 답을 얻어 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바울과 실라를 마게도냐로 몰아 내시는 이 기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기록 속에서 우리에게 알게 하고 싶어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내용 속에서 첫 번째로 확인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린 것같이 ‘하나님이 왜 아시아에는 복음 전하지 못하게 했을까? ’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동역자로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뜻이 맞지 않을 때 “넌 네 길로 가고 난 내 길로 간다” 이렇게 하시는 적이 없이 우리를 구슬리고 설득하고 강요해서 꼭 같이 가신다는 말입니다.

 

2인 3각이라는 게임을 아시지요? 두 사람이 발을 하나씩 묶어 가지고 두 사람의 발을 3개 되도록 해서 뛰는 게임으로서 서로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협조해야 되고 맞추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우리를 그런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를 위해서 진심을 갖고 있고 복음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하심에 맞지 않을 때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그를 설득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어떤 계획하에 있는가를 자꾸 알려서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즉 신자란 고귀한 존재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일에 동행하는 자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으로 가 보십시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하시고.”(마 16 : 18, 19)

 

바로 이것이 신자들의 영광 된 지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매실 것을 땅에서 우리 손으로 매게 하고서야 매는 분입니다. 하늘에서 풀기로 한 것을 우리 손으로 땅에서 풀어야 푸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는 말이지요. 우리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방법을 채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그런 의미에서 제한하셨습니다.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장가를 못가거나 시집을 못간 사람보고 아니 뭐가 아직도 부족해서 못하는가 그러면 다 준비되었는데 딱 하나가 모자라서 그런다 그러지요. 그게 뭐냐 그러면 신부가 없다 이거예요. 다른 것은 준비가 다 되었는데 예를 들면, 건강도 있고 돈도 있고 할 의욕도 있고, 요즈음 말대로, 집 있고 차 있고  다 있어도 신부가 없으면 결혼 못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말하자면 우리를 그런 존재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중에 무슨 자동차라든가 집이라든가 쇼파라든가 이쑤시개라든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결혼할 때 꼭 필요한 사람 중에 하나인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 : 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신자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이 말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뜻을 순종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일하심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주님의 사역과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이 늘 만족해 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언제나 그렇습니다. “너희는 저희 말을 들을지어다. 내가 이미 영광을 얻었고 또 앞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100% 만족하심을 증거합니다. 한편 예수님 쪽에서도 “나는 나의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의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고로 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의 기뻐하심을 위해서라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보류한다. 양보한다. 그렇게 얘기하십니다. 그 속에는 물론 두 분이 함께 그 일을 해나가실 때에 얼마나 그 협력체제가 공고한가 하는 것도 있지만, 말하자면 그렇게 주께서는 홀딱 아버지의 의해서 제한받으시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제한받으신다는 것 그리고 그 제한이라는 것이 모자라는 쪽의 제한이 아니라 두 분이 꼭 그토록 합의해서야 무슨 일을 하시는 그런 관계인 것을 봅니다. 이와같이 그런 존재로서 우리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닙께서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 20b)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행함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느니라’ 라는 선언과 방불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바울이 성령의 간섭을 받고 환상을 보는 사건 속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환상이고 바울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대접이요 관계입니다. 바울만의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함께 일하시는 속에 우리가 맨 처음에 살핀 것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제한을 받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제한받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면 이 제한을 받으시되 하나님께서 그 계획하신 것을 어떻게 열심히 이루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이 사건 속에서 봅니다.

 

우리가 영 못 알아 들으면 책으로, 일반 계시로, 다른 상식으로, 다른 것으로도 영 못 알아 들으면 나중에는 환상을 보여서라도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에게 설득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고야 말며 우리가 딴 길로 가면 못 가게 막는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힘있게 직접 역사하시는 열심을 우리가 이 사건 속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절대 간과하지 않아야 됩니다. 신앙 생활이란 결국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 요구하심에 순종하느냐의 싸움인데 제일 모자라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 하면 딴 길로 갔다가 얻어 맞고 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 교회에서의 간증거리나 신자들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내용들은 얼마나 맞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뭐와 같으냐 하면 여러분 자녀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공부 안하고 나갔다가 얼마나 터졌는가? 얼마나 복기짝이 헤어지게 맞았는가? 어떻게 수박이 여러 번 깨졌었는가? 이런 자랑밖에 안된다구요. 자녀의 자랑은 공부해서 훌룡하게 되는 일로 적극적으로 발전한 것에 있어야 되는데 그건 안하고 “나갔다가 매 맞고 돌아왔다, 밪 세끼 굶었었다. 굶었더니 얼마나 그때 골방에서 처량했던가! 그래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구두 주걱이 부러지게 터졌는가? 앞으로는 여름에도 내복을 꼭 2개씩 입어야겠다.” 이런 간증을 하고 있다구요. 이건 자랑이 아닙니다. 신앙이 옅은 자들이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의 뜻과 어긋나서 매 맞고 온 거, 그래서 또 나갔다가 또 맞고 오고 상처가 나으면 또 나가서 또 맞고 오고 이건 아니라구요. 불행한 일이지요.

 

적극적으로 주께서 원하는 요구와 원리와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인 차원에서의 변화와 발전과 쌓아감이 없는 것입니다. 이건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봅니다.

 

에베소서 1장으로 가보십시다. 7절 말씀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 : 7 - 10)

 

이 말씀은 꼭 기억을 해아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직접적이고 열성적으로 그가 행하시는 모든 계획과 뜻이 우주적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전 피조물과 전 역사가 다 포함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일하심을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면서 하나 깨우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가져야 할 시각입니다. 신자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당황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도대체 역사를 왜 이렇게 방치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그의 책에서 얘기한 것같이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압제합니다. 흉포한 무리들이 그들의 흉폭성과 죄악성으로 형통한 길을 걷는 것을 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악하는 것으로 잘 먹고 잘 살 뿐만 아니라 그들의 흉포함과 불의함으로 의로운 자와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태껏 우리가 살아 왔던 전 역사를 볼 때 역사에서 큰소리 쳤던 사람은 언제나 칼 들고 총 들었던 사람이지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을 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이 세상을 외면하시는 것이냐? 아니면 대강대강 손을 대시는 것이냐?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역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나 신자 개인을 인도하시는 방법을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항복할 수도 없고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하 죽이시는 것을 보고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마저도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었던 것을 우리가 이제 분명히 봅니다.

 

그로 인해 ‘우리’ 라는 열매가 맺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는 그 순간에 이 온 우주 만물에 신이 없어진 것도 아니요 주께서 피 흘리신 것으로 주님이 소멸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오랜 기간 동안 받음으로 인해서 기독교가 약화되었거나 믿는 사람의 수가 줄었던 것도 아닙니다. 주를 믿고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밑졌던 사람들이 불행했던 것도 아닌 것을 봅니다.

여태껏 인류 역사도 사실은 기도교와 전혀 무관하게 흘러왔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이 역사를 주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자기네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일을 실패하시지도 유보하시지도 약화시키지도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백성을 언제든지 불러내시며 그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꼭 전달하시며 주 앞에 와 엎드리는 자에게 경건한 비밀과 영원한 약속들을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을 흠도 없고 점도 없게 키워가셨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사 우리가 나중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섰을 때 흰옷 입은 자들이 주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나도 잃어버님 없이 온전히 면류관을 쓰고 찬송하며 모일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되는 중요한 국면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며 그 일을 지금 이루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다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 눈에 증거들이 부족해 보이고 그것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이 별로 눈에 잡히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되어감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우리식 표현으로 해서, 집요하게 이루시기로 열심을 품고 계시느냐 하는 것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 : 21, 22) 하는 구절에서 봅니다. 앞의 10절에서 본 바와 같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느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일을 지금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 안에서는 온 우주 만물, 전 역사, 전 피조물이 다 그 범주에 드는데 20, 21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이 그 발 아래 무릎 끓을 것이요 그 안에서 통일될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십니다.

 

여기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을 얘기하지 않고 신자 모두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그러면 국가의 이름이요 민족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총칭인 것같이 교회란 주를 믿는 자녀들의 총칭입니다. 그 머리로 주십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우리와 존재론적으로 불가 불리의 결합을 하셨다고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면 머리만 가있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사 그가 가신 곳에 우리가 올 수밖에 없게, 이 일을 그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고야 말 것을 이렇게 확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건에서 보는 두 가지 중요한 국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을 함께 이루시기를 원하며 그 일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모자람 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루도록 간섭하시고 열심히 일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너희 안에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고 내가 목표로 하는 곳에서 우리의 인생과 목표가 정지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그렇게 성령을 보내신 분, 성령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수준까지 우리를 빚어내고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며 우리를 깨우치고 분발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같이 나갔다 매 맞고 들어온 기록만이 아니라 협력하여 앞으로 나간 기록들이 여러분 신앙 생애에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전 생애, 사도 바울의 자기 묘사, 사도 바울의 사역들을 묘사한 것들 속에서 바울이 얼마나 뛰어난 신자인가? 주를 향하여 얼마나 열심을 가졌는가 하는 면이 있늩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떻게 그 몸을 달구어 냈는가 하는 것도 거기서 보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의 수준 열심, 신앙의 경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사 ‘도대체 바울을 어디까지 미치게 했는가? ’ 미쳤다고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그런 경지로 그를 기어코 항복시키고 분발시키고 앞서 나가게 했는가를 보는 것이 됩니다.

 

이런 얘기가 있지요? 세계에 유수한 학교들이 있지만 음악을 하려면 줄리아드에 가야 된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 말은 그 곳을 졸업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교가 그렇게 만들어 낸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도 미국에 가면 유명한 테니스 학교가 있어서 그곳에서 배우게 되면 실력이 많이 늘게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모든 사역과 그의 사역에 임하는 태도와 그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능력의 뛰어남이 아니라 그를 그 자리에 세우시고 그렇게 그를 항복시키고 그를 막 끌고 나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데를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9 : 16입니다. 본인이 이 말씀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는 걸 만나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을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 9 : 16 - 18)

 

사도 바울은 자기 상이 무엇이냐 그럴 때 내가 남보다 더 열심을 낸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는 것을 주의해 보셔야 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똑똑했고 더 하나님을 향하여 많이 일했다고는 안합니다.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밀어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거기까지 끌어낸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 내가 항복하고 하나님이 나를 거기까지 끌고 갔을 때 순종해서 내 욕심, 내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이 상이면 상이지 내가 남보다 능력이 더 있고 헌신을 더 했다고는 얘기할 수 없다고 자신을 평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벨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늩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한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 : 1 - 10)

 

여러분은 이거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전 이런 느낌이 듭니다. 나팔을 잘 부는 사람이 그것을 있는 대로 소리높여 부른 것 같습니다. 나팔이 저 혼자 소리를 낸 게 아니라 부른 자의 영향 때문에 그 음이 있는 대로 높아지고 그 소리가 있는 대로 터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그러나 이 얘기가 바울의 개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인간을 신적 열심과 신적 권능과 능력에 부르사 우리로서는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을 그 안에 풍성히 넣어서 마구 뽑아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찌 이런 외침을 할 수 있으며 이런 선언과 표현들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팔이 혼자서 무슨 소리를 내겠습니까? 휭휭거리는 바람 소리밖에 더 내겠습니까? 그걸 루이 암스트롱이라든가 하는 대가가 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한 소리가 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안 받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1 : 23부터 봅시다.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의 자기 고생한 얘기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중야를 깊음으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 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 : 23 - 27)

 

이런 기록을 보면, 그가 몹시도 대단한 사람이어서 이쪽에서 돌을 던져도 꿈쩍도 안하고 저쪽에서 창을 던져도 꿈쩍도 안하고 그 몸에 창고 박히고 돌도 박혀 있어도 굳건히 서 있는 불사신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 기록은 이런 느낌을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 : 28, 29)

 

그가 지금 열심을 갖고 어디를 찾아 나가는데 창으로 막아도 문을 막아도 또 나가고, 바위로 쳐도 나가고, 기어코 목적한 데에 손이 닿을 때까지는 그 손을 잘라도잘라도 막아도막아도 그 손이 기어코 거기 가고야마는 -괴기 영화같이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열심과 무엇으노도 막을 수 없는 신적 고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큼 방해하는 것을 뚫고 나갈 수 없는데 이건 사람이 아닌겁니다.

 

물에다 가두었는데도 살아나고 불로 막아도 나오고 물로 막아도 나가고 돌로 막아도 나오고 무엇으로 막아도 뚫고, 뚫고, 뚫고 나와 기어코 이 외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여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는 경지까지 흘러 나간, 주닙의 성품에 다가가게 된 바울의 심정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희는 내년에 장년부라는 것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청년부 다음에 결혼하신 분들로 30세에서 40세 미만까지로 장년부를 만들 작정입니다. 왜 이런 부서를 만드느냐 하면 제 마음에는 이런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교회가 젊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이 주는 쾌락과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유혹에 젊은 영혼들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쾌락이나 오락으로 그들을 불러들일 것이 아니고 이 예수를 믿는 기쁨, 예수를 아는 행복으로 얼마든지 젊은 영혼들을 봍잡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일에 우리는 힘을 쓸 예저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더 재미있지만 하나님 앞에 혼나고 매맞을까봐, 지금 행복한 것이 하나님 앞에 방해 받을까봐 마지못해서 예수를 믿는 식으로 나와 앉아 있는 것은 보통 밑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아주 재미있는 것입니다. 물론 좀 다른 재미입니다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밑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재미를 아십니까? 물론 모르시겠지요. 그러나 알아야 됩니다. 꼭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기쁨을,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안에서 신적인 성품으로, 신적인 열심히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마음껏 증폭되는 것을 여러분 절대 놓치지 않고 경험하셔야 됩니다. 세상적으로도 우리가 삶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종적을 남기는 것도 없이 다만 시간만 흐르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신앙이라는 것도 다만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천국 가기 위해서 그 시간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완전한 오해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자라가야 되고 쓰임을 받아야 하며 기쁨이 누적되어 어디에도 담을 수 없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신자로서 우리의 우리 된 것을 마음껏 발휘하셔야 됩니다.

 

이 일에 여러분 모두가 절대 낙오하시거나 외면당하시거나 스스로 자신을 그 일에서 회피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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