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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상고함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433 추천 수 0 2009.07.02 07: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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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7:11-14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93 / 1990.01.28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사도행전 17:11-14

사도 바울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에 이르러 첫 성인 빌립보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고 데살로니가에서 이제 베뢰아까지 도달했습니다. 사도행전17:11에 있는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계속 해오는 동안에도 신앙상의 갈등과 어려움과 난관에 부닥쳤을 때 믿음의 선배들이나 어른들께 질문을 하면 이 말씀을 많이 주시곤 했습니다. 더 많이 성경을 상고해 보라, 더 많이 기도해 보라 하는 답을 많이 듣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가지고 생각하려는 것은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같이 성경공부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히는 여러 이단들도 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렇게 됐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고 문선명 일파, 박태선 일파, 몰몬교, 제7일 안식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단은 아닙니다만 특별히 많은 해를 우리 자체 내에서 끼치고 있는 베뢰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결단코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 특별히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아들 이삭도 아끼지 않고 바쳤다. 그러니 당신들도 바쳐라.”그러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바칠 수 있었느냐가 제시되지 않고 아브라함과 같이 되자라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고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며 그것이 어떤 유익과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성경을 공부하자 하는 것도 그렇게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베뢰아라는 곳에서 일어났던 성경공부의 열기를 통해서 그 내용과 원리상으로 성경이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서 이렇게 기록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됩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든가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기독교만을 얘기하지 말고 일반론을 펴서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종교적인 모든 자세 특별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논할 때에 종교심, 신앙상태 이런 것들이 아주 길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인간에게 나타나는 환상이나 경험들의 총체라고 이해를 하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삶을 다루는 인간학의 한 분야에 불과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경험하는 종교적인 현상, 종교적인 경험을 망라한 것을 종교라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란 신에 관한 문제이고 신을 경배하고 신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기에 그 정신적, 능력적,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무한히 초월하고 계시는 분을 인간이 인간 쪽에서 원한다고 해서 만나거나 감각하거나 조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들이 경험한 종교적인 환상이나 종교적인 경험을 논한다는 것은 그가 감지하고 그가 만날 수 있었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한계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이 그 인간의 능력과 이해와 감각의 범주내에 있다면 이미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인간이 가진 종교적 본성을 미화시킨다거나 스스로 상상하거나 하는 것에 불과하지 이것을 신학이라고 종교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종교라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신 쪽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밝혀주는 행위, 즉 계시가 있지 않는 한 거기에 수반되는 신학 또는 종교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밝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의 가장 굵은 분야를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이렇게 넷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이 주경신학이 맨 앞에 놓이는 이유는 주경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신 그의 말씀들과 내용을 살피는 학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살피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왜 앞장서야 되느냐 하면 이 신학을 연구하는 자가 신학을 출발할 때는 그 자세를 수동적이고 수납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가 다소 딱딱하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나 통일교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부분을 알고 계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데 대해서 먼저 귀 기울이고 그 요구하심과 말씀하심을 따라가는 자세가 언제나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보여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혼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가 선행되어야 되고 계시와 계시를 이해하는 눈이 없는 한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따를 수 없는 범주에 속한 초월에 관한 영역이라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 이 부분에 비밀이라는 얘기를 즐겨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19 말씀을 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9-21).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는 이 세상을 알지 못한다 그럽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나아가서 그 말씀을 전할 때에 가장 조심한 것은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상식을 통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얘기한 인간학의 한 분야에 불과하지 종교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이단과 진짜 신앙과의 차이는 진짜가 가짜인 것 같고 가짜가 진짜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요? 가짜들은 다 인간의 상식과 본성과 일치하는 것을 가지기 때문에 훨씬 그럴 듯합니다.

이런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겠는가? 당신도 상식이 있으면 한번 생각을 해 보란 말입니다. “말 한마디면 싹 쓸어버릴 수 있는 분이 그것을 왜 지셨겠는가? 그는 실패한 분이다. 그래서 내가 왔노라”하는 것이 문선명의 얘기입니다. 다른 사람 얘기도 아니고 박태선의 얘기이고, 모든 이단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패해서 자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말이 됩니다. 아니 천국이 어디 있고 사람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는가? 생각을 해 보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들이 가진 윤리성과 도덕성과 같은 귀한 뜻을 모두에게 전하기 위해서 이것을 종교적인 형태로 가진 것이라는 겁니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국 가요.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겁니다.” 훨씬 솔깃하지 않습니까? 왜요? 우리가 훨씬 납득할 수 있는 얘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 있기에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은 가서 그의 말을 전할 때, 주께서 맡기신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이 인간의 이해력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를 스스로 매우 조심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들의 심령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이 일이 진행되기를 그가 매우매우 조심스럽게 두렵고 떨림으로 진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한 신자가 신앙의 진전을 위하여 그의 신앙적인 행위에 성경을 보았다든가 기도를 했다는것은 그것만으로는 답이 되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보았다고 무조건 그에게 신앙이 쌓여지고 기도를 하면 무조건 신앙이 깊어지는게 아니라 성경을 보되 보는 자의 열심, 보는 자의 간절함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이해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구스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하여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고 묻자 “설명해 주는 자가 없는데 내가 어찌 이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이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는가? 무엇을 말하며 그것을 또 어떤 방식으로 얘기하는가를 알지 않는 한 성경을 읽고 공부한다는 것이 우리의 열심의 표현밖에 안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열심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확인하고 만족하고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열심을 내었으되 열심을 낸 사람들끼리도 신앙상의 충돌과 오해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보는 눈을 조금 키워야 되겠고 오늘 이 짧은 시간은 통해서 바로 이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설교 내용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신학교에서 3년 동안 배우는 것을 30분 동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선 계시부터 출발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초월자이신 신이 한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행위를 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신 기록된 계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시되 관계를 맺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이 자신을 나타낼 때는 관계를 맺자는 겁니다. 복종을 하라든가 무슨 일을 시킨다든가 하는 어떤 관계를 맺자는 것인데 성경이 계시하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을 맺으시기를 원하고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서로 기뻐하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사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와 가까이 하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 같은 모습일 때는 하나님과 같이 있고 같이 말씀을 나누고 같이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마는 죄를 지은 지금의 저희들의 형편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우리는 모두 죽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처음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하시자 백성들이 그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간청을 합니다. “대신 가서 듣고 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시면 우리가 죽겠습니다.”

그 말을 감당 못합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서 설 수가 없습니다. 마치 뜨거운 열 아래 우리가 있을 수 없고 차가운 온도 속에 우리가 있을 수 없듯이 거룩하고 영광된 분 앞에 우리가 서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화목하며 친분관계를 유지하기를 기뻐하시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시되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 속에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고 기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를 구원해 내는 것을 병행하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되 나타내시는 것 중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위를 그 안에서 가장 중심되는 사건으로 다루셔야 되고 구원하는 행위를 이루시며 그와 병행해서 자신을 나타내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 속에 가장 핵심이 되고 가장 많은 부분을 포함하는 사건은 구속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 많은 구원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전부는 아닙니다. 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영광된 모습으로 서기 위한 완성이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언제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사람이지만 아직 데려감을 받지 않고 남아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 받지 않는 것으로만 꺼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수준까지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계시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라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속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이 구속사역을 하시되 우리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 사역을 우리는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구속사역이라 그럽니다.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사역이라는 것은 그 사역이 구속의 전계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성육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는 것, 그의 속죄사역,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는 속죄사역 그리고 그의 부활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구속사역의 근간을 이루며 중심을 이루며 이것이 기초가 되며 이것이 완성이 되는 행위들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사의하거나 인간의 협조가 필요한 사건이 아닌 인간 밖에서 일어난 독립된 사건이며 반복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구속사역입니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이 사건과만 함께 합니다.

그러나 구속사역은 이것과 달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인간 주체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가 있습니다. 개인 개인을 불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속죄하시고 부활케 하신 그 생명에 모두를 참여케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간 개인의 주체 속에 파고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각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일어나며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보통 성경계시에 의해 취급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으로 이런 중심적이고 객관적인 사역들이 함께 기록되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표준과 척도가 되지 않게 함입니다. 하나님의 뜻, 계획,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척도와 표준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계시와 함께 등장을 할 때는 그 척도가 오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얼마든지 봅니다. 개인적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일 중에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환상과 어떤 기적적인 체험 속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성경에 기록이 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이 척도요 표준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말이 생깁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방언을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라는 식으로 어긋나고 오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독특하고 특별한 감동이 있을 때 그 사람이 그것을 표준과 척도로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만납니다. 구원의 확신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중생 받은 날을 기억한다고 합니다만 저는 기억 못 합니다. 그러나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누구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중생한 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중생한 사건에 대한 기억도 따로 없습니다. 어느날인지 모릅니다. 이슬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르게 구원을 얻었고 지금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개인적인 구속사역이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그런 것을 우리는 바로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받은 구원입니다. 환상이 있고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은 고넬료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위해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보신 바와 같이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구나 거기서 그 사건을 채택한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보는 시각인 것입니다. 거기서 만일 고넬료의 사건을 고넬료가 구원 얻을 때 보니까 환상도 보고 방언도 받고 성령의 세례도 받았다. 그것을 표준으로 제시하면, 즉 개인적인 구원 사건을 표준으로 제시하는 날에는 우리 모두가 실족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의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 어렵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구속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건과 주관적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또 다른 차원에서 인류의 각 세대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책임을 갖습니다. 옛날 시대에도, 500년 전에 살던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 되고 600년대, 700년대, 800년대 그래서 1000, 1100, 1200, 1300 그래서 1900년대 사람들, 2000년대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말하자면 이 구속사건은 역사성을 띨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 한 시대, 한 환경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는 모든 세대와 환경과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는 모든 인류의 세대들과 연결되어야 된다는 면으로만 역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더욱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시점부터 시작하여 다시 그들의 그 백성들을 모으사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완성된 자리에 들어가기까지의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실 목표를 가지신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차원에서 또 역사성을 가진다 그럽니다.

즉 역사성을 가진다는 말 속에는 한 시대만 나타나지 않고 어느 시대나 반복되야 한다는 얘기와 함께 하나님께서 이 구속사역을 그리고 자신을 보이신 사건을, 완성하는 목적을 두고 진행시키고 있다는 뜻에서도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하겠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역사적 진전성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읽는 데는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이 역사적 진전성이야말로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이 지금 기초를 놓는 때냐? 상량식을 하는 때냐? 준공식을 하는 때냐라는 시각을 가져야 될 필요성을 알게 되고 그 시각을 가져야만 그때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그 계시가 의도하는 것과 틀리지 않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구속사역에 대하여 맨 처음 예언이 떨어지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는 그곳이 마치 어떤 씨앗같이 모든 내용이 그 몇 마디 말 속에 함축되어 있어서 뭐가 팔이고 뭐가 다리인지, 뭐가 뿌리이고 뭐가 잎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때에 와서 조금 발전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 구속사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될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리고 ‘네 씨로 말미암아’라는 예언 속에서 어떤 중보자가 나타날 것이 조금씩 보입니다. 싹이 나는 모습을 봅니다.

다윗에 가면 조금 더 확대되고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오시자 완전히 만개한 전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는 그날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보고자 그 나무를 속단하는 것은 바보 짓입니다. 여러분 이런걸 생각해 보십시오. 나팔꽃과 나팔꽃씨가 서로 비슷한 데가 있습니까? 나팔꽃씨를 아십니까? 동그랗고 까만 환약같이 생긴 것이 나팔꽃이 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팔꽃씨를 보고 틀림없이 나팔꽃을 뭐라고 상상하겠습니까? 시커멓고 네모나고 크게 생각하겠죠. 메주덩어리에 구두 약칠해 놓은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성경을 볼 때 어느 부분에 나타난 것이 지금 어느 단계의 모습인가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확한 모습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어디까지만 설명한 것인가를 보는 시각이 없으면 “성경에 그렇게 써 있는데요”라는 말로 그 성경이 의도하지 않은 부분을 그 성경으로 고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코스모스씨는 어떻습니까? 코스모스 씨앗은 꼭 손톱 깎아 놓은 것 같습니다. 비유가 좋지 않습니다만 그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것이 코스모스가 됩니다. 비교할 수 없죠? 그것이 처음 뿌려져서 싹이 날 때는 또 어떻습니까? 싹이 나면 이게 다알리아인지 이게 채송화인지 거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나중에 커서 꽃이 피고 열매 맺을 때가 돼야 우리는 그 나무의 전모를 보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를 보는 시각이야말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세례 요한에 관한 평가를 이렇게 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 이렇게 세례 요한을 높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소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낫다 이겁니다. 왜 그렇죠? 거기에는 이런 비유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시대의 사람과 예수님을 본 이후의 시대는 그 복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모습을 본 것에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도 보았습니다마는 그전에는 기껏 봐야 씨앗과 싹밖에 못 본 것이고 예수님 이후에는 꽃과 첫 열매까지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이므로 열매까지 봤으면 이제 다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여인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크지만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까지만 보고 죽는 겁니다. 물론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도 봅니다만 나중에 그의 십자가 사역을 못 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내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이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결론에 이릅니다. 그럼 성경을 보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며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이런 몇 가지 분명한 기준을 갖고 보셔야 됩니다. 유기적입니다. Organic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기계같이 부분부분이 이렇게 따로 독립되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통일되지 않으면 기계와 같습니다. 팔은 팔로 따로 놀면 안됩니다. 이건 몸의 부분이어야 됩니다. 어느 부분이든지 그 부분은 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부분이어야 됩니다. 그런 유기적이고 단일성(unity)을 가진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잘라놓고 보면 안됩니다. 모든 부분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론 같은 것을 오해하지 않아야 됩니다. 예정론에 의하면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리고 벌받기로 예정하셨냐?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부분은 부분만으로 잘라져 나가지 않게 조심을 해야 됩니다. 예정론을 얘기함으로써 그 예정론이라는 부분이 몸에서 잘려 나가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사람을 예정하셨다.’ 그럼, 마찬가지로 구원 못 얻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기로, 즉 유기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된다. 그러면 잘라져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몸통과 팔이 붙어야 됩니다. 예정론을 얘기할 때도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사랑하는 자를 부르시고 정하시고 간섭하신다라고 이 부분을 설명하고 나머지 부분 그러면 구원 못 얻은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셨느냐를 얘기하면 이것이 몸통에서 잘라져 나가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명심하셔서 구원 못 얻은 사람은 자기가 안 믿은 탓이다 그러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시각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설명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이해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것을 모두를 설명시키면 여러분은 정신적인 혼란만 올 것입니다.

성경이 통일성이 있다는 것은 성경 자체 주인이 단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거짓이 없으시며 무슨 일을 하다 중간에 변동, 변경하시거나 취소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 안에는 모순이나 상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통일성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모순되어 보이거나 충돌되어 보일 때는 우리는 거기서 더 상상력을 진전시키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속행위를 진행해 나가시는 일 때문에 성경계시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과 절정을 이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그 열쇠이고 기초이며 완성이며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5:39에 가시면 성경이 가지는 모든 계시의 핵심이 예수님 되심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그럼 또 하나님을 나타내는 부분을 봅시다. 요한복음 1:18로 갑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분이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셔야 될 분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서는 그 위치가 가장 중요하며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언제나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설명하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주님께서 그 앞서 기록됐던 성경을 해석한 것이 있다면 그 해석이야말로 또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주님의 행동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주님의 말씀도 최고의 권위를 가집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골로새서 2:2입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2: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역사 전체도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으로 가십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윤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그리스도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열쇠이고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 이런 최소한의 기준과 최소한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추적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지난 주간에 저희 집에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분이 찾아오셔서 많은 상담을 나누었는데 그분을 흔들 방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앙이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근거를 갖고 있는 성경구절들의 해석이 틀리고 이 원리를 벗어나고 있다는 설명을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세상 답답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나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건이기 때문에 성경에 채택되었지 그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다른 면에서 더 독특하다는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역사가 구약에 대부분의 내용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민족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향한 뜻을 펼쳐보이기에 적당하기 때문이지 그들이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얘기해서, 공부를 잘한다든가 똑똑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라든가, 야곱이라든가, 모세라든가, 엘리야라는 사람들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물론 앞서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의 신앙이 우리보다 천부적으로 다르다든가 그 종자가 틀리다는 의미로는 성경에 채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방불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펼쳐보이실 하나님을 표현해 나타낼 가장 적당한 무엇이 있어서 저들을 쓰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부러워하거나 엘리야를 부러워하거나 다니엘을 높이지 말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 다니엘을 다니엘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시각이 집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우리의 눈이어야 됩니다. 그 사건이 입면도냐 평면도냐를 볼 줄 알아야 되고 기초를 닦고 있는 때냐, 주차장을 짓고 있는거냐, 옥상을 지어서 피뢰침을 다는 때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무작정 들어가서 많이 읽으면 된다, 열심히 읽으면 된다는 것으로 보지 마시고 언제나 겸허한 제사로,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보고 이것으로 인해서 넘어지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믿으며 동시에 겸허한 마음으로 깨우쳐 주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언제나 성경을 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그러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펴시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의 뜻을 이해하시고 더 깊은 자리로 인도하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늘 구하는 자세로 이 성경을 열고 그 안에서 여러분이 마음껏 자라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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