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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이리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182 추천 수 0 2009.07.04 16: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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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0:29-32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106-108/ 행 20:29-38 1990.05.20 /05.27 /06.03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일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 : 29-32

  본문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잡힐 것을 예상하고 있는 바울이 그가 몇 년 동안 돌보고 또 시작케 한 교회들을 먼저 믿고 믿음이 앞선자들,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 외에 말씀께 부탁을 한다 하는 대목을 만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가 피로 값주고 산 교회입니다만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것이 예상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교회에 늘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교회에 늘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합니다. 그 흉악한 이리 앞에 다른 어떤 무기도 주지 않고 말씀 하나만을 무기로 주고 이제 떠나가는 바울의 그 모습과 그가 예상한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교회의 참 모습, 신앙생활의 핵심, 무기, 이런 것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모두가 일차적으로 어려웠던 것과 실패했던 것으로부터의 구제를 기대합니다. 어려웠던 문제가 해결되고, 좌절됐던 자리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형통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모두가 신앙적인 당연한 결과로 기대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약속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전투요, 싸움이요 환난의 시작인 것을 얘기합니다. 물론 거기에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복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빨리 배워야만 되겠습니다.

  29절에 보시는 바와 같이 흉악한 이리가 너희한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또한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32절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 : 32)라고 위로하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먼저 흉악한 이리 앞의 우리에게 왜 말씀뿐이냐, 그리고 그것이 왜 충분하냐 하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일종의 권면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주문이나 부적이 아니므로 무기화할 성격의 것이 조금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을 얘기할 때는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이런 것 이외에 좀더 다른 뜻이 우선합니다.

  열왕기상 8장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들을 다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거기 말씀이 어떻게 묘사되는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오늘날과 같으니이다.”(왕상 8 : 22-24)

  성경에서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으 말씀을 줄여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 말하자면 이 말을 누가 했느냐 하는 거싱 강조됩니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그 말이 누구의 말이냐? 여호와의 입이 말이다, 즉 하나님의 말이다, 하나님의 의지요, 뜻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주의 말씀께 부탁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이상 더 든든한 무기가 있을 수 없는 최상의 무기요, 최고으 방패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오늘날 이렇게 이루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입니디다. 자기가  성전을 지어놓고도 그것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임을 그가 간파하고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가도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같이 희어질 것이요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기우리라 여호와으 입의 말씀이니라.”(사 1 : 18-20)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입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가 절대적인 약속이고 기준이고 권위입니다.

  이사야서 55장으로 가시면 훨씬 더 확대된 설명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기로가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좀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 : 8-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 내가 한 그 말이 취소되거나 헛말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주께서 피로 값주시고 사신 우리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로마서 8장에 약속된 것같이 이 세상에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으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는 그 약속을 받아 영원한 운명이 취소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그것이 그렇게 절대적이고 권위적이고 불변하고 실패될 수 없을 바에야 왜 하필 ‘말씀’아냐 이겁니다.

  천군천사를 보낸다든가 성령의 어떤 특별한 은사를 주어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함을 합해서 같이 째려 보면 그 사람이 녹는다든가 합심해서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의 머리털이 갑자기 다 빠진다든가, 이럻게 힘과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이 의미하는 바가 힘고 능력, 성취하는 방법적 차원의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일종의 권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받은 자가 그것을 듣고 검토하고 시험해서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선택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를 지키시는 것을 그의 힘과 능력과 절대적인 권위와 모든 사랑과 열심 으로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것이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 그 속에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건 그것을 힘으로 가져야 되는 사림들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에 의해서만 발휘되는 힘인 것 같습니다.

  구원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때 십자가를 목에 걸어서 구원을 얻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표를 팔지 않았습니다. 주를 믿고 따르고 섬겨야 됩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그럴 때 언제나 그 말씀이 주문이 아니고 무슨 표가 아니고 부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 내용을 자꾸 설명하는 것을 보아서도 분명합니다.

  에베소서 1 : 13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말씀을 왜 진리의 말씀이라고 해야 됩니까? 말씀이 일종의 부적이고 주문이라면 우리는 내용에 대새서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외우면 됩니까?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듯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가 생겨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에 꼭 이런 내용적인 것임을 시사하는 표현들이 따라다닙니다. 뒤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구원의 복음.’ 그러면 그 내용을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되고 그래서 내가 동의하고 항복하고 선택해야 되는 것을 늘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쫓아나옵니다. 그 안에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빌립보서에 가 보시겠습니까? 2 : 16에서는 말씀을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 생명이 무슨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생명 되는 약이 아니고 생명 되는 무슨 주문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흉악한 이리 앞에 노출되어 있는 교회의 유일한 무기로 말씀을 제시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을, 다른 무기를 주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의 의지와 능력과 그의 모든 것으로 지키심을 확인했습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도 약속된 ㅂ와 같이 주께서 허락하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쓰이는 어떤 방법적인 것, 힘에 관한 것, 무기로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자가,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이가 이 교회의 보호자요 이 교회를 지키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우리에게 납득과 항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무기를 우리에게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줄타고 올라와야만 구원을 얻고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존재를 방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로 우리의 신변, 신자 된 지위를 보장하는 약속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6 : 37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 즉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는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또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주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약속, 즉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약속을 우리는 분명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린도전서 10 : 13에서는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당한 것이 없다’는 말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을 시험해 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천군천사가 아니고 왜 칼과 총이 아니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훨씬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박국서 2장으로 가 보십시다. 우리가 이것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살던 시대에 너무나 죄악이 판을 치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분인 줄 알고 있는데 왜 불의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핍박하고 죄가 저렇게 기승을 부려도 하나님이 가만 계시는가 하는 데 대해서 의아한 생각이 들기 시작을 했고 드디어는 그의 신앙까지 흔들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아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을 참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한 자들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핍박하고 저들이 저렇게 기고만장해 있어도 놓아 둡니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하박국서 2 : 4에 있는 것과 같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답을 주십니다. 그가 이 답을 듣고 3 : 17에 가면 이런 신앙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 : 17-19상)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봅시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그의 생각은 신앙의 결과가 언제나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순적한 결과골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그가 신자라면 그의 앞길에 난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를 해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신앙의 신앙의 가장 큰 기대는 환경과 조건이 개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신앙인으로 되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약을 먹습니까? 약을 먹으면 분명히 그 약을 먹은 결과를 얻으니까 약을 먹습니다. 써도 먹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하면 돈이 벌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어려운 일이 없고 신앙생활을 하면 애가 공부를 해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니까라는 식의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이제 생각을 바꿉니다. 신앙이란 이 세상의 환경과 조건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얻는 방법도 아니며 내 신앙이 그것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무화과나무의 소출이 없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 분이면 만족하는 데로 돌아섭니다. 그전에는 그런 환경이 만족스러워야만 그의 신앙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환난 속에서배우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 말씀을 유일한 무기로 줬느냐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조금 더 분명히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명기 8 : 1로 갑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호 광야의 길을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 : 1-3)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다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직전입니다. 모세의 입을 ㅌㅇ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내 말을 지켜라.” 왜 지켜야 됩니까?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너희가 만나를 먹은 것을 기억하라. 그래서 너희가 사람이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아라” 이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을 하자 일차적으로 해방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광야입니다. 물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셔서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을 춥지 안혹 덥지 않게 지키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는 우리가 하나님을 지킬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만 부르면 우리는 죄 안 짓는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적은, 지난 40년은 어떻게 된거냐 이겁니다. 그 40년은배가 고파서 40년이라는 기간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4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징벌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다니는 벌을 받은 겁니다.

  만나가 없고 반석의 물을 마시기 전에 저지른 죄가 아니라 만나와 반석의 물과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메추라기를 먹는 속에서 저지른 죄악들입니다. 너희의 지은 죄는 환경과 조건으 나쁨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외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적 요인 대문인 것입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 : 3)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까 배가 고파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도 짓고 부르면 더 짓더라는 것입니다. 먹으면 힘내서 짓더라구요. 옛날에는 배가 고파서 저지르는 도둑질이 제일 많았습니다. 지금은 배 부르니까 훨씬 기름진 죄를 짓습니다. 하난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그의 신앙을 지키고 그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드느냐, 편을 들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면 끝입니다. 교회든 인간이든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6 장이 두드러진 것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활를 보라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울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렇게 꾸짖으시면서 우리에게 무얼 요구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무엇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일단 배가 불러야 합니다. 배가 고픈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병이 들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야지요. 대학 3수, 4수 하면서 어떻게 신앙생활 합니까? 이렇게 언제나 주객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존재나 개인의 복을 위해서, 교회와 교회의 정당한 존립을 위해서 해야  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겁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이 주인노릇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가 언제나 높이 받들어지는 일로만 교회도 존속되고 개인도 존속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봉사를 잘하고 구제를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오고 헌금이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니비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선포되고 찾아오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생명의 말씀, 권유의 말씀이 힘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 말씀 아퍼에 항복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교회의 교회 된 가치이고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말하자면 흉악한 이리가 와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는 자체 내에서 부패되었을 때에만 붕괴됩니다.

  교회는 핍박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부패로 무너질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유일하게 말씀으로 무기를 가져야 되고 말씀이 무기가 되는 그 싸음에만 신경을 써야 됩니다. 다른 싸움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국가적으로 기독교가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속에서 교회가 해야 되는 것은 그 핍박 혹은 그 어려움을 면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 교회는 말씀이 힘을 발하는 교회가 되도록 애쓰는 것 이외에 자기를 지키는 방법이 없는 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살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를 통해서 할 일이 많은데 왜 죽게 하시겠습니까? 필요한다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을 것을 주실 것이요, 필요한다면, 온갖 기적을 다 일으키셔서 그를 보호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는 것같이 미련한 것은 엇습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과 날쌘 몸의 움직임과 힘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보호해야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너데보호할 능력 하나도 없이 잘먹고 잘사는 것 중에 강아지들이 있습니다. 치와와라든가 삽살개라든가 하는 종자들은 최고의 값을 들여서 키웁니다. 꼬리 하난 흔드는 겻 때문에 키웁니다. 이 세상에서 꼬리를 흔들어서 밥 얻어 먹는 것은 개밖에 없습니다.

이쁘게 구는 것 하나 가지고도 밥 억여 줍니다. 바로 자기 가치를 발휘하면 되는겁니다. 고양이를 길렀는데 잡으라는 쥐는안 잡고 밤낮 구워 논 생선만 물고 가면 고양이의 구실을 다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지키려고 한다면 벌서 신자가 이닙니다.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신명기 8장에 나온 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의 싸움이 무엇이어야 되었더냐? 외적 조건과 환경에 대새서는내가 알아서 하겠다. 내가 준 것으로 너희가 부족한 적이 있었느냐? 너희가 머을 것이 없었던 적이 있었느냐? 너희의 의복의 해진 적ㅇ 있었느냐? 발이 부르튼 적이 있었느냐? 너희가 이 광야를 돌아 다니는 40년 동안 너희들이 필요한 것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게 해준 것이 있었느냐? 그러나 너희는 그40년 동안 나한테 무얼 했느냐?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주님의 꾸짖음입니다. 적 앞에 섰을 때 적의 공격 앞에서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해야 되느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우리가 좀더 신자다워지는 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으로 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으로 너무 소문이 나자 그들이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고 예수를 죽인 자들이 두 사도를 불러다가 이 일 때문에 굉장히 공갈하고 협박하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을 해서 놓아 줍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오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여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앙들이 너서며 괸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구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잇,라엘 백서오가 합동하여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으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 : 23-30)

  이 기도를 잘 보셔야 됩니다. 지금 완전히 적국네 에워 싸여 있습니다. 예수를 죽인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들의 부추김을 받고 있고 또 예수 믿는 자들을 대적하는 세력이 아직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훨씬 소수입니다. 무슨 일이 이을 때마다 데려다 때리고 죽이고 공갈과 협박으로 이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옵나니 우리로 더 담대함을 가지고 주의일을 행하게 하소서, 적들을 물리쳐 주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입니다. 세상은 다 죄악 된 원리로 살고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저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 대하여 호감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 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에 대해서 악감을 품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기서 어떻게 되느냐, 이것을 어떻게 면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우리로 알게 하신 생며의 말씀이 내 살아 생전에 저 불쌍한 자들에게 가능한 한 전파되도록 써 주십시오”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들의 위협과 공갈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세상 불신자들이 혹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여 나에게와서 칼로 찌르면 “나 찌르고 당신 제발 예수 믿으시오” 이것이 우리의 태도여야지 “너, 나 찌르면 지옥 가” 이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으니 직장에서 남보다 먼저 진급해야 되고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으니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먼저 잘되어야 된다는 발상을 버리시지 않으면 기독교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한 기독교는 그런 이기주의자들의 또 다른 집단에 불과합니다. 돈 모아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고급스러운 사교단체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말씀 이외에 나에게 무기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십시오.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으로 여러분의 삶의 방향과 원리를 늘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 십자가라는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또 검검하십시오. 교회란 그런 이유 때문에 서 있고 신자란 그런 이유 때문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결과는 저 세상에 가서 얻습니다.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신자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받으시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되는 일로만 나의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되고 모든 일의 원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 십자가의 방법으로 하십시오. 지는 방법입니다. 당하는 방법입니다. 어디까지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죽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고의 모델은, 결국 그 표준은 순교입니다. 순교라는 것은 자기가 한 신앙적인 최고의 자세와 최고의 순종이 빛을 보지 못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신문에 나지 않습니다. 이준 열사나 유관순 같이 이름이 나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 묻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거시서 싹이 나는 법입니다. 어느 씨에서 무슨 싹이 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싹과 거기서 핀 꽃밖에 못 볼 것입니다. 그러나 뿌려진 씨 없이 혼자서 싹이 나고 혼자서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그런 나무드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흉악한 이리 앞에 말씀만으로 서 있다는 것이 불만이십니까? 이거야말로 너무나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 이외의 무기가 있다면 버려야 됩니다. 교회에 누가 나온다더라 그런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큰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무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노 대통령이 만일 우리 교회에 나오면 그 눈치 보아서 어떻게 한자리 하려는 사기꾼들이 다 좇아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일 수 있습니다. 또 와보았자 좋은 소리 한 번도 안 하는데 나왔으니 이건 뭐 천국가서 상 받으실 첫 번째 조건일 것입니다. 듣고만 가지 마십시오. 들은 대로 사십시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로 가야 되고 여러분의 개인 신앙도 그런 신앙으로 가셔야 됩니다. 그럴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이 이미 누리은 은혜화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인가를 여러분의 유일한 신앙생활의 보람으로 삼으실 수 있어야 되고 그것을 여러분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싸움에서 실패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런 힘이 발휘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힘을 모으시는 여러 교우들이 되기를 권합니다.

흉악한 이리-2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 : 29-30

  오늘 읽은 이 본문은 흉악한 이리 앞에 말씀으로만 무기를 삼게 된 교회와 신자의 본질 규명에 관한 것으로 지난 주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한걸음 더 나아가소 흉악한 이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좀더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말씀이라는 무기를 줬다는 것에서도 짐작되는 바와 같이 이 흉악한 이리는 외부적인 공격자라기보다는 내분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자체를 혼미케 하고 우리의 믿는 바 되는 신앙의 내용들을 혼잡케 하는 자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는데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제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가시면 훙악한 이리에 관한 정확한 표현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 : 5). 흉악한 이리를 거짓 선지자라고 얘기함으로써, 이 이리가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어떤 정치적 혹은 무슨 군사적 권세자가 아닌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외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항거하라는 무기도 없고 무슨 비책도 없습니다. 성경이 권면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공격일 때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항거해야 되고 어떻게 자신을 보존해야 되는가 하는 데 대하여 구체적인 경고와 방법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할 때 여기 나와 있는 대로 양의 옷을 입고 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 선지자들, 흉악한 이리가 올 때 이리의 본체를 드러내고 오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는 양의 모습을 하고 옵니다. 그런데 실상은 흉악한 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특별히 알아야 될 것은 이 거짓 선지자가 외견상 또는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이리라는 것을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이리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조심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이리다. 저 선지자는 가짜다”라고 할 증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척 보아서 알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거짓 선지자 중 대표적인 자는 박태선 장로 같은 사람입니다. 또 문선명 씨가 있습니다. 완전한 거짓 선지자고 흉악한 이리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양의 옷을 입고 있어서 거기에 미혹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흉악한 이리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거짓된 선지자라든가 흉악하 이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옳아 보입니다. 그럼 무엇에서 다른가 이럴 때 마태복음 7 : 15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 7 : 13-15 상).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 속에는 그의 가르침이 틀렸기보다는 가르치지 않은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거짓된 표는 그들이 틀린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꼭 가르쳐야 될 중요한 것을 저들이 안 가르치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의 가르침 속에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가르쳐 마땅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데 틀리는 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예수 믿는 신앙을 행복과 기쁨만으로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기독교의 행복은 환난과 붙어다니고 기독교의 기쁨은 희생과 멸시와 오해와 붙어디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환난과 고통을 감내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면류관으로 약속되어 있고 주를 믿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업수이 여기는 오해와 그리고 어쩌면 비참한 경지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는 것으로만 얻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형통하게 될지 예수를 믿어 곤란하게 될지를 성경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약속하지 않습니다.

  물론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게 파려 가고 모함을 받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틀린 점은 저들이 좋은 것만을 얘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태복음 7장식으로 얘기를 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얘기하지 않는 부분, 성경이 얘기하는 부분, 우리 신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러나 성경이 꼭 강조하는 부분을 거짓 선지자들이 빼놓는 것 중에서 몇가지를 말씀 드리면 좁은 문, 좁은 길을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  길로 들어서는 자, 즉 신앙인이 되고 예수 믿는 자가 맨 처음 이 문과 이 길을 들어서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세상과 군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고 여러부니 잘 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으로부터 호감을 받거나 세상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지금 이 산상설교 속에 나타나는 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걸치는 내용 속에서만 그 증거를 채택해도 마태복음 6장이 몽땅 그 얘기입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희가 기도할 때 저잣거리에 서서 하지 말고 너희가 기도할 때 사람 앞에 하지 말고 금식할 때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선을 행할 때 나팔을 불지 말고 은밀히 행하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보상을 요구하고 하나님께서 은밀히 갚으시는 줄 알아라. 말하자면 너희가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면 너희는 자기 상을 받는다. 사람 앞에 받는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얼마나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틀려 있느냐 하면 이런 것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일전에 김진홍 목사님이 오셔서 하신 얘기를 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우면 신자들이 분발을 한답니다. 집도 팔고 차도 팔고 교회의 어려운 것ㅇㄹ 해결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모두가 나서서 열심을 내는데 교인이 어려우면 아무도 돌아보아 주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신자가 생활고 때문에 자살한 일이 있었다라는 예를 드셨습니다.

  여기에는 좀더 신앙적으로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만큼 혼미케 되고 오해케 되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려운 일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풍조가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어려워지면 교회 앞에 와서 티를 내지 않습니다. 모두가 네가 어려운 것은 틀림없이 네가 무슨 죄를 졌기 때문이다라고 생가하기 때문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어려운 일을 당하자 욥의 세 친구가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너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나님 앞에 매를 맞느냐? 회개하라”하는 얘기였습니다. 욥이 나는 잘못한 일 없다 그러자 그러허게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분명히 죄를 진 것이다라고 공격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가장 큰 신앙상의 나쁜 풍조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세상이 알고 이웃이 알고 하나님이 안다라는 풍조입니다. 심자가를 지는 길, 가시밭 길을 걷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매를 맞는다고 생각하는 풍조입니다. 왜 신앙적인 행위를 한는데 왜 못 살며 왜 아프며 왜 실패가 있는가? 왜 슬픔이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한 겁니다.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병에 안 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이것만큼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말씀은 없습니다. 제발 여기에 끌려 가지 마십시오.

  요근래에 손을 얹으면 사람을 꺼꾸러뜨리는 목사님이 또 등장을 했답니다. 가지 마십시오. 그거 한번 넘어지고 오면 여러분 길 가다 여러 번 졸도하시게 됩니다. 좋을 것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번의 기쁨과 한번의 확인을 위하여 그런데 몸을 담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서 그런 것만 골라 보시게 됩니다. 성경이 하는 얘기 전부는 듣지 않게 되십니다. 목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신자들이 좋아할 얘기만 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저는 성경이 하는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계속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얘기를 한 것 이상으로 여러분이 싫어하는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난 그 목사가 설교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 몰라도 그 하는 꼬라지가 꼴보기 싫어서 난 못 가.” 이 후유증은 이런 부작용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제가 좋은 얘기만 할 수 없습니다. 꾸중을 할 때 잘 해야 된다는데 아직 제 나이가 어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50이 넘으면 좀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를 겁니다.

  또 하나 주어요한 것은 신자가 된다고 해서 자존심을 다 채우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셔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자존심이 없는 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된다고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 : 43, 44을 보십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에서 얘기하는 식으로 하자면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입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한 싸움에지지 마십시오. 내가 증명받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남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희생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여러 번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바와 같이 “아, 이것들이 예수 믿으니까 우습게 알어.” 이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광고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소속한 이 인근 주민들이 뭐라 하니까 우리 교인 중에도 드디어 불이 나신 분이 있어요. “아니 이것들이, 확 극장에다 팔아 버릴까? 매회 극장구경 오는 사람들이 그냥 차를 몰고 와서 꿍꽝거리는 꼴을 봐야 우리가 얼마나 좋은지 알겠나!” 이게 시험입니다. 거기로 넘어가지 마세요. “아니 이것들이”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배알이 없습니다. 이 싸움이 결단코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닌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혹 필요하다면 이 교회의 문을 닫고 해산을 하는 한이 있어도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즐겨 해야 됩니다.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말씀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이 얘기를 하지 않는 자는 다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헛된 욕망을 이루게 한다든가 다른 곳에서 맛보았던 좌절과 비굴함과굴욕적 열등의식을 느꼈던 모든 한을 풀어준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그것은 흉악한 이리입니다.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를 만날 준비를 하시려거든 주님이 가신 길을 뒤좇으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떳떳이 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여러분이 피 흘려 싸워 벤 머리 여러 개 들고 주를 만나러 갈 수 없습니다. 남의 자존심과 남이 마음을 짓밟고 서서 주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지도록 요구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승리라고 성경은 언제나 얘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여러분의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성경이 지적하는 것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4 : 24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세에 일어날 여러 가지 징조들 주에 그때에 형편이 어떻겠는가를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 : 24)

  능력과 기사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표도 아니며 핵심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인용했던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것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를 꾸짖는 대목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1-23)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 것이 구원의 표도 아니요 참 선지자의 표도 아니요, 베뢰아가 신앙에 있어서 앞선 자들이 아니며 정당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개인에게 부탁하신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말씀이란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격적이고 굉장히 포괄적이며 넓고 풍성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 단어인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 거짓 선지자 얘기 속에는 좁은 문, 좁은 길이 있는가와 함께 그 다음 16절에 있듯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를 하면서 선지자, 귀신을 쫓아내는 것, 권능을 행한 것을 주께서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미가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여기 거짓 선지자에 대한 성경의 어떤 하나의 예가 나옵니다. 이 예 속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미 3 : 5, 6)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친다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을 주면 좋다 좋다 그러고 먹을 것 안주면 저주받아라 그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목사에게 잘못 해주면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고 이에 무엇을 물려주지 않으면 저주를 준비합니다.

  저는 그런 목사들이 누구다라든가 그런 목사들이 나쁘다라는 얘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좇아가는 여러분이 한심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목사를 누가 키운 것입니까? 안수하면 넘어지고 한마디 말 듣고 북쳐서 떠들고 나면 좋아져서 좇아가 아멘 한 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입니다.

  이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것, 선지자 노릇한 것을 제가 갑자기 왜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것 때문입니다. 한 선지자가 능력을 펼쳐서 그 능력으로 주께 인도한 것이냐? 그 능력으로 양떼로 하여금 자기 앞에 희생하게 하는 것이냐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능력과 그 귀신을 쫓아냄과 선지자 노릇한 것이 결국 양을 살찌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 앞에 벌벌 떨게 복종하고 항복하게 하는 것입니까? 즉 열매가 누구를 위하여 열리는 겁니까? 열매가 양에게 열리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먹을 열매를 만드는 겁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조심해서 보십시오. 어떤 선지자를 만나든지 어떤 말씀을 베푸는 자를 만나든지 그것이 도대체 여러분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를 보십시오.

  미신이라는 것은 나중에 그 건강한 상식과 분별력을 놓치고 이렇게 붙잡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그 미신을 베푸는 자에게 가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절에 가서나 혹은 예날 남산에 올라가는 길에도 많이 있었던 점쟁이들에 가서 “당신 이번 여름에는 강가에 가면 죽는다. 그러나 이 부적을 갖다가 사리마다에 넣어 놓으면 안 죽는다”고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간증은 “그것을 사리마다에 넣어 놓았더니 애는 죽고 사리마다는 떴다. 역시 용하드라”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다음에 다 물어보게 됩니다. ‘이번에 회사를 열러고 하는데 어느 달에 열어야 되는가? 남자와 여자의 비율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 성은 무슨 씨를 써야 되는가? 김씨는 김이 새서 안되고 이씨는 이를 갈아서 안되고’ 등 전부 봐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건전한 상식이 없어지고 뭐에 매어 달려 있게 됩니까? 잘 보십시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매어 달려서 여러분이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그 사람에게 매어 달려서 여러분이 피폐해 갑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안겨야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먹이는 선지자라는 겁니다.

  에스겔서 34장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나하는도다”9겔 34 : 1-3). 양을 먹여야 합니다. 양을 키우는 것이 목자의 칙임인데 자기가 양을 몽땅 잡아 먹는 것입니다. 자기만 찝니다.

  하나님께서 늘 선지자들에게 요구하는게 뭡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고 저들을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 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삶의 구석구석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나 혹 잘못 되면 이 목자가 자기가 가진 어떤 신비한 것을 미끼로 하여 신자들을 자기에게 매어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매어 달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혹되지 마십시오. 흉악한 이리입니다. 분별하십시오.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이런 아주 실제적인 예를 아직까지도 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것 주으이 하나가 방언입니다. 방언 은사라는 것은 그 말 자체에 있는 것같이 믿는 자 모두에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사입니다. 은사란 그 말 자체의 의미가 그렇듯이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 그러니까 은사를 받는 사람이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그에게 맡긴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라는 단어 속에는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러나 방언 받게 해준다는 미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했습니까? 방언 연습도 시켰습니다. 그것은 은사라는 말 자체에 배치되는 겁니다. 은사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뜻과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대로 주는 겁니다. 내 옆의 사람이 은사를 갖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그 은사가 펼치는 하나님의 간섭과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나누면 되는 것 아닙니까?

  같은 얘기를 우리 실제 생활에 연결해 보십시다. 여럽분이 신앙생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쓰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귀히 여기는 것 중에 여러분 자신이 은사를 받아서 그 은혜를 펼치지 않으면 안됩니까? 여러분이 은사를 받아야 되고 옆의 사람은 그 은혜를 입는 자여야만 속이 편합니까? 이것이 나쁜 풍조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도울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서 말없이 눈물만 흘리면서도 기도하는 역할은 다 싫고 하나님 돈 주세요 해서 돈으로 보란 듯이 콱 던지는 역할만 전부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쁜 풍조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능력, 능력이 됐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신자 노릇을 해도 나타나는 역할로 하려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역할로, 내는 역할로, 그리고 바보 되는 역할은 아무도 안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준다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피폐시키고 어떤 목자의 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입니다.

  예레미야 8장으로 가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 : 10, 11). 이 기쁨과 감격을 얘기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복막염에 걸려서 병원에 갔더니 파스 붙여주고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그 의사는 나븐 사람입니다. 뇌막염 걸려서 병원에 갔더니 머큐로크롬 발라주고 다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만 있겠습니까? 그 의사를 가만 놔 두게써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와 목자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여러분들이 목사에게 여러분 편을 들어달라는 요구를 목소리 높여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업했는데 잘되게 와서 기도해 주시오. 애 시험 볼 때가 됐는데 함격하게 해 주시오. 이번에 주식을 뭘 샀는데 그 증권이 올라가게 해 주시오. 이런 것 외에 여러분이 목사를 다른 이유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한번 꼽아 보십시오.

  “내가 요새 돈을 벌었는데 이 존을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절 부른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 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저한테, “제가 이번에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었습니다. 내가 돌이켜보니 내 인생이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목사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이렇게 묻는 사람 없습니다. “목사님, 자식을 잃으니 살 맛이 없어요. 이리로 좀 와 줘세요.” 제가 뭡니까? 제가 안마사입니까? 여러분이 목사를 무슨 이유로 불렀었는가를 점검해 보세요. 여러분이 정당하게 목사를 불러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헤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2-17)

  성경만으로 여러분의 위로를  삼으시고 힘을 삼으십시오. 세상의 박수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묻혀 있는 데 대해서 화내지 마십시오. 한을 풀려고 예수를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말씀과 더불어 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워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뒤좇아 여러분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열매를 맺히십시오. 여러분이 열매를먹으려고 들지 마시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시고 거짓 선지자를 좋아하는 여러분의 성품을 말씀으로 분별하여 제거하십시오. 능력 좋아하지 마시고 사람 앞에 잘난 척 하는 것 좋아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 9장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 : 23, 24 상). 똑똑하면 다른 것으로 똑독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마십시오. 사람 앞에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똑똑한 것입니다. 용기있는 것은 팔을 붙이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남이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싸움을 걸었을 때 씩 웃고 돌아서는 것이 용기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마십시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십시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십시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만족을 구하십시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십시오.

  남의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믿고 바라십시오. 여러분이 죽어 화평케 된다면 여러분이 즐겨 죽으십시오. 죽으면서 짹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앙이요, 성경의 가르침이요, 여러분이 싸워야 되고 경계해야 될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교회가 말씀이 지켜지도록 싸우시고 여러분의 개인이 말씀 안에 있도록 싸우싮오. 다른 것을 위해서 우리는 싸울 줄 모릅니다. 다른 것은 하지 맙시다. 여러분의 신앙도 그것으로만 점검하십시오.

흉악한 이리-3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도행전 20 : 32-38

  성경이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자와 교회가 흉악한 이리 앞에 노출되어 있기에 저들을 대적하는 무기로 말씀을 주셨다 하는 대목을 오늘까지 세 번째로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보통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성경의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 아마 그것을 여러분이 명확하게 확인해 보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내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내는 어떤 신비한 묘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뜻밖에도 많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 속에서도 그 신앙이라는 것이 주께 맡기는 싸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께 맡기는 싸움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 주께 맡긴다는 신앙 속에는 정당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정당치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그의 사랑과 베푸시는 은혜와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뜻이 실패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식으로 맡긴다는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나옵니다.

  때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구원해서 이제 가난안을 향하여 출발한 시점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마음이 바뀐 바로는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빼앗으려고 추적해 오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 : 10-14)

  이게 맡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장면이고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구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넓고 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원에는 3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완료형의 시제로 말하는 구원을 받은 것이 있고, 진행적으로 말하는 구원을 받고 있는 지금의 진행 과정이 있고, 미래적인 완성을 약속하는 구원을 받을 것이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설명을 하자면 구원은 받은 것이고 그리고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받은 것이라는 것은 신분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고 하나님을 몰랐고 지옥으로 갈 신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꿀 자가 없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확보된 것이고 거기에 덧붙일 것도 없고 거기서 무엇이 감소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한 생명이 출생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출생한 생명이 자라나야 되는 것같이 그 다음의 책임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신분의 변화가 수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준의 변화는 마땅히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입니다. 출생한 모든 생명은 자라나야 되고 성숙해야 되고 온전해질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됩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등장한 이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싸움은 바로 구원의 완료형 시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신분의 의미가 변화합니다. 우리는 죄인 됐던 자리에서 하나님에게 의논하거나 부르짖은 적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내십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돌을 던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의논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았고 우리와 의논해서 십자가를 준비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이 사건 속에서 모세를 보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에 의해서 모세를 보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며 하나님이 바로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를 설명하는 민수기 13장을 보시면 금방 그 차이를 구별하시게 됩니다.

  이때는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입국을 목전에 두고 있는 때입니다. 들어가서 얻을 땅에 정탐꾼을 먼저 보냅니다. 12명의 정탐꾼이 들어가서 그 땅을 살펴보고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닝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하더인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 : 25-33)

  앞에 있었던 출애굽기 14장에 나타났던 이스라엘의 불평과 민수기 13장 여기에서 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절망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앞에 있었던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과 신앙적인 태도와 상관없이 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고 홀로 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합니다.그러나 이 가난안에 입국하는 싸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부하면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신앙적인 실천에 옮기지 못한 죄로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다가 다 죽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앙에서 맡긴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결단코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완성을 하나님이 대신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1 : 28을 봅시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 28)

  “쉬게 하리라” 그랬습니다마는 “짐을 대신 져 준다”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 : 29, 30). 짐을 대신 져 주는 적이 없습니다. “네 짐을 갖다 주께 맡겨라”는 사실상 성경적 약속이 아닙니다.  짐을 벗어던지면 주님이 우리 짐을 대신 져 주는 식의 신앙적인 보호는 없습니다. 짐을 어떻게 지는가를 가르쳐 주는 법만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 주문이 아니고, 부적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어떻게 짐을 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설명서를 잘 읽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될지를 필요로 한다면 성경을 잘 읽으셔야 됩니다. 잘 읽으면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를 배우시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결단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혹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하면 없어진다고 약속하는 데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최고로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는 자들은 베뢰아파입니다. 저들은 신앙이 좋으면 병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모든 병은 믿음이 약할 때 들어오는 귀신의 탓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설득력을 가집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좋고 신앙이 좋으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으로 갑시다. 로마서 12장에 가시면 왜 말씀이냐 하는데 대한 좀더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구절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 1, 2)

  분별해야 됩니다. 내가 결정해야 됩니다. 결정해야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다른 문제입니까? 어떤 하나의 일이 내 앞에 닥쳐 왔는데 그 일을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를 내가 정해서 그 일을 결정한 대로 감수해야 됩니다. 그러너데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느냐 하면 어떤 큰 일이 생겼을 때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그 일이 해결된다고 자꾸 기대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녀가 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갈 것인가?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적성검사 해보시고 모의고사 보셔서 그 적성에 맞고 그 실력에 맞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기도를 했더니 “걱정마라 부모가 부모가 보내고 싶은 데 보내라 내가 답안지를 보여 주겠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기도란 내가 당한 일을 해결해 주는 묘책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즉 신앙이란 것은 나의 인격과 나의 성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완성을 요구하고 있지, 일을 해결하는 비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가 가장 조심해서 보셔야 될 ㄹ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 즉 믿음이라는 말도 그렇고 기도라는 말도 그렇고 성겨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잘못하면 일종의 주문적인 주술적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했다 그러니 낫게 해 주십시오. 믿습니다. 그러니 해결해 주십시오. 그것은 안됩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 그 문제를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되느냐가 아니라 기도했고 성경 봤고 믿음을 바치오니 문제 없이 해 주십시오라는 것은 안됩니다.

  백억이 생기는 것과 백억을 버는 것과는 어던 차이가 있습니까? 수중에 백억이라는 현금이 똑같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아주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백억이 생긴 사람은 그 백억이 없어지면 꽝입니다. 백억을 번 사람은 백억이 하나의 멸매입니다. 백억이라는 열매를 맺은 나무, 즉 본체가 있는 것인데 백억이 생긴 사람은 본체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백억이란 현금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이제부터 소모할 줄밖에 모르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백억을 번 사람은 백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벌기 위해 쌓은 실력으로 또 벌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이런 백억이 생기는자가 아니라 백억을 벌어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성숙, 신앙적인 지혜, 신앙적인 깊이의 소유자인 한 존재, 인격, 그 깊이를 가진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이 목표이지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신자에게 말씀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한 짐을 벗어버리는 싸움으로 가지 않고 모든 기도나 모든 신앙 행위가 그짐을 어떤 시각고 어떤 목표와 어떤 자세로 지느냐의 싸움으로 갔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빌립보서 4 : 13 같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 : 13).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모든에다’가 괄호를치고 지금 당신이 소원하는 것을 그 괄호에 넣으십시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 자식을 합격시킬 수 있느니라’ 믿습니다고 하며 아멘이라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자꾸 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구절이라면 우선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나와야 됩니다. 지금 이 구절을 쓰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헐벗고굶주린 삶을 살아왔고 매를 수업시 맞았고 돌로 맞고 세 번이나 파선당했고 동족에게만 위험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위험을 당하고 광주리타고 도망가고 그리고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는 갖가지 고생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그가 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구절을 쓰는 그런 실력을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모면하는 데 쓴 적은 없습니다. 그는 그 일을 감당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 앞에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 : 11, 12). 세상이 유혹하고 공갈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가야 될 길을 가는 실력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배우셔야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짐이 없어지는 자가 아니라 싸움이 있는 자요, 짐이 있는 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싸움인 십자가의 짐을 질줄 아는 자여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말씀이 우선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어떻게 인생을 가야 되는가? 만일 이 말씀이 하나의 주문이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결하는 부적이라면 우리에게는 싸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누가 더 많이 기도해서 누가 더 많이 얻어냈느냐의 싸움이지 갈등이 있고 시행착오가 있고 그래서 고민이 있고 밤잠 못 자는 일이 잇고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일들은 없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싸움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갑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하나 더 드십시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느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네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 : 6-8). 달려갈 길,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할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면 다른 데 가 보셔야 됩니다.

  오히려 이런 데가 세상을 사는데 낫습니다. 부적 써 주고 점 쳐주는 데가 낫습니다. “동쪽으로 가시면 귀인을 만나실 겁니다.” 이쪽이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것입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좋지만 십자가는 꼭 지고 가시오.” 이것밖에는 얘기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제가 어디로 가야 잘 될까요? “그것은 알지 못하지만 오늘 어디로 가든지 오른편 뺨을 맞거든 왼편 뺨도 대시오.” 사실 교회는 이것밖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복을 받으며 누구와 친해야 권세를 누리는가에 대해서 전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 권세자들보다 주님을 먼저 사귀십시오. 주님 가신 길을 뒤좇으시오. 세상에서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고 오해를 받는 것을 기쁨으로 감수하십시오. 이것밖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 외으 것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면 그것은 사기꾼입니다. 저희가 보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도 이 말씀을 주고 있는 이 장며너에서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보시면 금방 일간된 사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너희를말슴에 부탁할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지금까지의 선교여행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 : 17부터 다시 봅시다.

“바울의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 : 17-20). 잘 보십시오. 거기에 왜 겸손이 있고 눈물이 있어야 됩니까? 만일 말씀이 일종의 주문이고 믿음이라는 것이 묘방이라면 거기에 무슨 눈물과 겸손이 필요합니까? 마술사들이 마술 할 때 여러분 겸손 떠는 것 보셨습니까? 울면서 하는 것 봤습니까? 자기가 이제부터 교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셨지요? 그리고 이제 짠 하고 손 안에서 토끼를, 손 안에서 돈을 만들어 냅닏다. 이제부터 나타날 결과에 대해서 그가 자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앙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어떤 신비한 묘책이라면 거기 왜 눈물과 갈등과 한숨과 잠못 이루는 밤과 겸손이 있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당해야 되고 거리낌 없이 했다라는 말이 왜 등장을 해야 됩니까? 여기서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은 위협과 오해를 감수하고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닙니까?

  31절에 가셔도 이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눈물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받는 사람들은 척 알아 듣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주술적 행위라면 그가 전한 말이 상대방 마음을 후벼파고 들어가서 상대방을 금방 변화시켜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는 안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 말들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권세 있는 말이고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수긍할 때까지 이 말씀은 기다리고 여러 번 설득을 합니다. 척 하면 알아 듣지 않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악한 사람들을 돕고 도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 : 34, 35). 친히 수고하면서 이 싸움들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는 뭐가 없습니까? 이 기도의 내용 중에는 “내가 가서 당할 일을 없이 해 주십시오”라든가 “내가 떠나고 남아있는 이 교회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오지 말게 해 주십시오”가 이 기도의 내용 속에는 안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뭡니가? 신앙이라는 것은 백억이 생기는 것이 아닌 백억을 버는 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써서 신앙생활 하셔야 되고 열심히 그렇게 되는 날을 위하여 그 과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씩 하나씩 배우시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습득하셔서 그 단계 단계들을 거쳐 완성의 자리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학인할 교회의 말씀과 신자에게 말씀을 무기로 준 성경이 주장하는바 내용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것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신자에게서 성실한 삶의 과정을 뺏는 것은 다 틀린 겁니다. 성실한 삶의 과정을 없이 만드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잘못이 아닌데 삶의 과정을, 성실한 삶의 과정을 뺏을 수 있는 것-기적, 참으로 위험합니다.

  기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데 왜 기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하실지언정 그 기적이 정당하게 살아야 되고 성실히 살아야 되는 신자의 성숙의 과정을 뛰어넘도록 의도되는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닦여지고 만드어져야 되는 신자의 완성의 과정으로 가는 것을 기적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손을 놓게 되면 안됩니다. 이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저희 애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여러 부류의 아이들이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만고강산으로 공부하는 애들ㅇ이 누구냐 하면 부모가 부자인 애들이랍니다.  애들은 부모가 물려줄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밖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그럽니다.  이것이 물론 전부 맞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저희 애한테 들은 것이니까 꼭 맞겠습니까마는 그래서 거기에 물들어 우리 아들과 딸이 심각하게 저와 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 저희에게 무얼 남겨 주실 겁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이 내가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주께 기도하면 백원 어치 올 것이 백억원 어치 오고, 조그만 차 탈 것이 큰 차로 변하는 식으로 기대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아주 잘못 집고 있는 겁니다. 아주 헛다리 집고 있는 겁니다. 그런 신앙의 차원에서 빨리 벗어나십시오. 그러나 고집부리고 싶으면 그렇게 얘기하는 곳으로 가셔서 같이 좋아하다 망하십시오. 성경에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성실히 이 과정을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갈라디아서 6 : 7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 : 7,8)

  거두려면 심으셔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싶으면 경건을 연습하십시오. 경건의 결과를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경건을 연습하십시오. 훈련하지 않고 애 쓰지 않고 연습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것은 다 거짓말입ㄴ다. ‘믿으니까’라는 것은 핑계도 되지 않고 조건도 되지 않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셔야 됩ㄴ다. 모든 다른 것이 그렇듯이 영어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수학에도 왕도가 없습니다. 과학은요? 그것도 왕도가 없습니다. 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왕도가 있는 것은 잠은 잘수록 늘고 노는 것은 놀수록 더 그렇게 됩니다. 게으름은 왕도가 있습니다. 그것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연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기적과 함께 우리가 조심해야 되는 많은 것들, 그 속에는 믿음도 속하고 은사도 속합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을 성실한 신자로서 훈련의 삶을 포기케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틀린 겁니다. 똑같이 종말론이 그렇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짜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아 다닙니다. 제일 빨리 예언된 것은 1992년에 오신다는 것이고 1997년에 오신다, 1999년에 오신다 이런 설들이 무성합니다. 저는 모릅니다. 주님도 모르신다고 그랬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뭐 보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들 말로는 해답 보고 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으로 가 보십시다. 왜 주께서는 다시 오시는 날을 함구하셨는가? 왜 몰라야 되는 가 하는 것에는 이런 깊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십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 : 36-39)

  분명히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주님 자신도 모르고 아버지만 압니다.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떤 낌새를 챌 만한 징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아, 정말 말세구나, 주님이 곧 오시겠구나”르는 어떤 징조가 없다고 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늠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 : 40, 41). 여기 데려감을 당하는 자와 버려둠을 당하는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데려감을 당ㅎ는 자도 그때까지 주님이 지금 오실거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영적인 원리에서 세상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기 책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날짜를 예언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틀린 점이 그들이 언제 오신다라는 말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성실한 삶의 과정을 손놓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한 달 뒤에 오신다. 그러면 여러분은 당장 뭘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직장 다니겠어요? 애들이 공부하겠어요? 한달 있으면 주님 오실건데 미쳤다고 영어공부 하고 있으며 미쳤다고 회사 나가겠어요? 뭐 하겠어요? 다 실컷 먹고 퍼져 있을 겁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신자의 신앙적인 자세는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가 맡은 삶을 살면서 종교인다워야 되는 겁니다. 매를 갈고 있고 밭을 갈고 있고 회사에서 일 하시고 자식 키우고 지지고 볶고 있으십시오.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일들 속에서 목표를, 하늘나라를, 원리와 자세를 신자답게 하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내일 주님이 오셔도 오늘까지 내가 해야 될 일을 해야 됩다. 학생들은 공부하시고 어머니들은 가정을 지키시고 남편들은 직장에 나가서 열심히 땀흘려 일 하십시오. “내일 주님이 오십니다. 여러분 다 모여서 기도합시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안 옵니다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성실히 사는 데 있습니다.

  성실히 산다는 것은 신자가 된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세상사람과 똑같은 조건과 환경과 일반적인 사건 속에서 증거하십시오. 종교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는가? 아셔야 됩니다. 바울의 환난과 고통을 음미해야 되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한 알릐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되는 것을 배워야 되고 주님께서 매 맞으신 것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옳고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야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하며 일곱 번 정도의 용서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는 것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를 배워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행위가 그것으로 인하여 짐을 벗는 것, 성실함을 외면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행심으로 가득차는 데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을 권면하여 여러분이 백억을 버는 사람, 경건을 연습하는 사람, 주를 닮는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자리에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져서 가는 사람이 되는 싸움을 하기로 결심하셔야 됩니다.

  여기 가자 저기 가자에 춤 춰서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이번에 모 목사님 오셔서 안수하는데 까무러친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처음에 가서 안 까무러치면 다시 돌아와서 줄서서 또 가서 받고 세 번이나 했는데도 까무러치지 않아서 나는 아닌가 보다고 밤새워 운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쓸데없습니다.

  누가 능력을 행하고 누가 어떤 하나님의 힘을 나타낸 것을 저는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성실한 신앙생활을 대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느날 들어가서 울고 불고 통성기도 하면 한달치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한끼를 배 터지게 먹어도 옆구리가 빠지게 먹어도 두끼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행위, 신앙적인 성장도 아무리 한번에 많이 먹어도 두끼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한끼입니다. 배부른 한끼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성경에 맞아야 됩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난 너 모른다라는 뜻밖의 선언을 듣지 마십시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이 믿는 자들마저도 유혹하려는 말세에 나타난 많은 시험과 유혹 속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든든히 지키시고 살찌워야 된다는 책임을 놓치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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