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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역사관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102 추천 수 0 2009.07.04 1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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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1:31-36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113 / 1990.08.05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사도행전 21:31-36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붙잡아 폭행을 하는 중에 이 소문이 로마의 천부장에게 들려서 그가 바울을 구출합니다. 물론 살려내려고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떤 범법 행위인가 알기 위한 적법 절차를 밟기 위해서 제대로 구속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바울은 목숨을 건지게 되고 무사히 로마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공식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언제나 방해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기독교에 대해서 하등의 이해 관계가 없는 로마 정부는 결론적으로, 실제적 복음의 수호자가 되어서 바울을 구출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을 오늘 장면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적지 않게 당황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일어났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고 유대인들은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손을 놓고 유대인들의 뜻대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합니다만은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책을 통해서 볼 때 빌라도가 은밀히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공생애 중 여러 위기들을 보이지 않게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관과 이 세계관이 상당히 편협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겠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스케일과 그 우주적 광대함에 대해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력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싸움이다’ 라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앙인이란 결국 개인적인 경건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깊이 있게 주를 아는 일에 시간을 기울이고 또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역사라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세상은 결국 파멸하고 말 것, 더러운 것, 악한 자들이 판을 치는 곳,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는 가능한 관계를 피하고 먹고 사는 정도의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세상을 멀리하고 개인적인 경건에 몰입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앙이란 분명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개인이 결단해서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이라는 것은 스케일의 크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구원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차원에서 개인적이라는 말을 쓰지, 하나님이 전우주적 차원에서의 어떤 간섭과 일을 포기하고 계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가 우리가 제일 많이 오해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인간을 그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하고 그 구속사역의 핵심으로 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만은 전우주적이란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선 창세기 3장으로 가 보십시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3:17.18).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세상을 저토록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 이유는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래부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생겨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고 그것을 그의 영광과 지혜와 능력으로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사랑하셨고 모든 피조물 중 인간이 최고의 핵심인 관계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진노하심으로 모든 우주를 함께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타락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속은 언제나 우리 개인을, 인간이라는 대상을 최고의 핵심으로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계가 저주받은 것같이 인간의 회복은 부수적으로 모든 자연계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다는 이 스케일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갑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19-23). 지금 이 자연계가 탄식 속에 있고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아직 구속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 모든 자연계도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 영원한 약속의 아주 대표적인 표현이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 아닙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곧 자연계입니다. 이렇게 우주라는 스케일로 구속사역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전우주가 저주 아래 들어간 것같이,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자리에 들어간 것같이 구속, 즉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전우주적 차원에서의 회복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무엇인가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입니다.

조금 더 확대하십시다. 골로새서 1:19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이것이 구원의 구속사역의 우주적 스케일입니다.

성경적인 이 구원의 묘사, 구원에 대한 이 성경적인 크기를 보시면 우리가 우리 개인이라는 것에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아무리 우주가 크다고 해도 인간을 대신하거나 인간과 대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자연계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고 그것은 동시에 세상의 권세나 세상의 체제나 세상의 구조 나아가서는 역사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마치 버려진 것이고 파선하는 배 같아서 구원이라는 건 배가 파선해서 물에 가라앉기 전에 얼른 구출받는 것 혹은 불타는 빌딩에서 다 타서 죽기 전에 얼른 나오는 것 식으로 밖에는 우리가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하든 정치가 어디로 가든 이 세계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든 난 모른다 난 예수만 잘 믿고 있으면 된다라는 괴리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지게 됐다 이겁니다. 물론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자 것도 아니고 세상 역사에 무슨 정치적인 권세를 가지고 참여하자는 뜻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구속사역의 그 내용은 분명히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세상과 자연계와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됐냐 하면 하나님이 전 우주적인 스케일로 구속사역을 진행하고 계시며 역사를 그가 친히 주장하고 계신다고 하는 데 대해서 우리가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 형태로 역사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면 왜 히틀러가 생기며 왜 스탈린이 생기며 왜 어린이 유괴범들은 잡히지 않느냐? 왜 순 엉터리 영화가 히트를 하고 거룩한 영화는 아무도 보러 오지 않느냐? 우리에게 그런 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기독교적인 것을 단절시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선입관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서경은 거기에 대해서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무지한 관계로 우리 멋대로 기대해 놓고 우리의 기대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 되심을 우리가 혼자 부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태복음 13장으로 가십시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 하리라.”(마13:24-30)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문은 왜 가라지를 뽑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왜 가라지를 미리 뽑지 않는가? “내버려 둬라 결국 불 못에 던지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도 내버려둬라 그렇게 살다 죽게. 이런 식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하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라지가 있습니다. 종이 “뽑을까요?” 하자 주인이 뭐라 그럽니까?

주인 되신 예수님이 “두어라” 라고 합니다. 왜 두라고 합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도 다칠까봐 그냥 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뜻이 하나 감추어져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처음부터 다른 종자입니까? 처음에 같았다가 나누어지는 겁니까? 처음부터 다른 종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것 이상입니다. 그럼 예수 믿은 사람은 처음부터 알곡이고 저 원수들은 가라집니까? 여러분 중에 금년에 예수 믿은 사람있죠? 그럼 작년에 만일 예수님이 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했으면 금년에야 예수 믿은 사람은 작년에 뭐였겠습니까? 가라지고 올해 지금 와서 믿으면 알곡이 되는 겁니다. 성경적인 묘사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알곡으로 태어납니까? 가라지로 태어납니까? 어떻습니까?

가라지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왜요?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성경이 분명히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죄인으로 출생하여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를 믿어 알곡이 된 겁니다. 이 말씀 속에는 분명히 지금 가라지 같지만 나중에 가라지 아닌 것들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역사를 보실 때 이런 개념을 가지셔야 하는 겁니다. 역사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은 언제나 신자들만입니까? 아니면 신자 아닌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행한 자들이 있습니까?

오늘 분위기로 보니까 나중 것이 맞을 것 같죠? 정말 그런 것이 많습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편들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신실한 종들에 의해서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신실한 종들에 의하여 된 것만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욕심에 따라서 일을 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학자들은 반반이라고 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창세기 50장으로 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기서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었고 전세계가 기근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애굽에만 먹을 것이 남아 있어서 그 형들이 아버지를 앞세워서 자기들이 팔아먹었던 동생인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애굽에 이민 와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늘 마음에 볼안함이 있을 겁니다. 자기들이 돈받고 팔아먹은 동생이니까 언제 이 동생이 자기네를 죽일지 모른다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그래도 좀 괜찮았지만 이제 아버지인 야곱도 드디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걱정하는 대목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와서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15-20). 요셉이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형들이 원래는 요셉을 미워서 죽이려고 그랬는데 죽여봤자 아무것도 유익한게 없으니까 죽이는 것 이상의 고통을 주면서 돈을 벌기로 해서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지금 아무 죄도 없이 팔려 와서 종 노릇하다가 감옥에까지 갇혔다가 나중에 극적으로 구출되어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보내신 거구나라는 것으로 이 해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누구를 쓴 겁니까? 요셉을 쓴 것 이상으로 형들을 쓴 겁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하나님의 뜻에 저들이 사용되었지만 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네들의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얽혀서 이일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형들이 없었더라면 요셉이 팔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요셉이 팔리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이 형들이 한 일을 잘했다 그럴 건 없지만 꼭 죽을 짓을 했다 그럴 수도 없는 묘한 경우를 성경에서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을 때 여러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에 의해서 구출을 받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한 뛰어난 일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바벨론 포로가 됐다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만에 그들이 본국으로 다시 귀환할 때는 저들에게 지도자가 있어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왕조를 이어받은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해서 풀려납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는 하나님앞에 쓰임을 받고 성경은 어느 곳에서나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그럴 때는 우리가 보통 하나님 앞에 신실한 헌신을 한 엘리야라든가 다니엘이라든가 바울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을 연상하게 됩니다만은 성경에서는 고레스를 나의 신실한 종이라 부릅니다. 고레스가 하나님 앞에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뜻에 사용한 도구였기 때문에 신실한 종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르므로 인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세상 그러면 무조건 다 가라지이고 무용한 것들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 놓으려고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눈에서 우리가 너무 흑백논리에 붙잡히면 안됩니다. 악당은 언제나 아무 쓸모없고 선한 사람만 쓸모 있다. 선한 사람끼리만 모여 살면 좋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깊은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유치원 고집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 깊은 지혜와 능력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판단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셔야 됩니다.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건 좋다 저건 틀렸다 나쁘다 이렇게 무엇도 정확히 꼬집어서 얘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는 가룟 유다와 사도 바울 중 누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겠습니까? 바울은 그때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철저히 반대한 악당이었고 유다는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회개를 맡았던 재정 담당 특별 보좌관까지 지냈던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을 팔아먹고 목 매달아 죽은 배신자가 됐고 사울은 회심하여 바울이 되어 죽는 날까지 주를 위하여 역사상 그렇게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도 지금 상황을 보고서 뚝 잘라 판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화해 무드는 뜻밖에도 우리가 그 동안 가장 미워했던 양극 체제의 냉전의 수반이었던 소련 공산당 서기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고르바쵸프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렇게도 얘기를 합니다. 그는 고레스다 그럽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의 뜻을 위하지 않은 자들, 자기네 발등에 떨어진 이해 관계 때문에 어떤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들이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신앙에 앞선 책임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대통령들이 오히려 잘못한 일들이 많고 소련인인 고르바쵸프가 더 옳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관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기에 역사는 의미와 방향을 갖는다라는 사실을 긍정적인 눈으로 수용해야 됩니다.

역사는 의미와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항상 분별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지혜가 너무 깊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절망으로 보이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도 하시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형태로 역사가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 속에 목적과 내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의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 신앙인이다 그럴 때는 개인적인 경건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전 인격적인 영성 훈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시켜 가는 한 시대에 존재하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역사적 사역에 있어 내가 한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사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치적인 관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세력이 되어서 정치를 기독교적 형태로 바꾸자 하는 것이 꼭 우리의 시대적 책임이 아닙니다. 역사가 결국은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획하시고 목표하는 어떤 지점에 가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믿는 낙관적 차원에서 책임있는 시대인이 되어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는 데 있어 여러분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우리의 부정적인 역사관입니다.

여러분 지금 상식적으로 역사의 끝은 무엇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이 역사의 끝은 뭡니까? 요즈음 종말론이 한창 돌아다니고 있는데 1992년 예수님이 오신다는 헛소리가 많습니다. 역사의 끝이 뭐라고 기대를 합니까? 세상의 끝이 뭡니까? 종말이다 재앙이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너무 비관적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세상의 끝은 재앙도 아니고 종말도 아닙니다. 세상의 끝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왜 거기까지 생각이 안 미치는 겁니까?

세상이라는 건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과 물질계, 자연계를 없게 하시고 완전히 다른 영계로 만드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곳도 자연계입니다. 그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다시는 전쟁도 없고 이별도 없고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고통하는 것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거기도 자연계입니다. 지금 있는 이 세상과 연속되는 것인데 지금 세상같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거나 우리 인간들이 사망 아래 있거나 증오하거나 죄가 끼어 있지 않은 곳으로서의 자연계입니다.이 세상이 그 곳으로 갈 겁니다. 그런데 이대로는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종말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이 세상, 이 자연계에 있는 썩어지는 것들, 사망의 세력 그리고 악한 것들, 즉 가라지를 뽑아내는 작업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 종말은 우리에게는 ‘어서 오십시오’ 해야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말이라는 얘기가 신자들에게까지도 공포스러운 장래가 되어서 “아, 예수님이 언제 오신데.” 언제 오시는지 알면 뭐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려고 그러는 겁니까? 이상하게 부정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나쁜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훨씬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낙관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역사를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실 것이요, 거기 의인들만 살게 할 것이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실 것이요, 다시는 사망이나 죄짓는 것이 우리 옆에 없도록 할 것으로 만들 것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주께서 다시 오셔야 되고 심판이 있어야 되고, 지금 형태로의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어떤 신적 개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개입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공포스러운 미래로 있어서는 아주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관이 종말이라는 데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종말, 재앙 이렇게 되니까 이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다, 이 사람들 늘어나는 것 봐라, 이 교통지옥을 봐라, 이 핵무장한 것 봐라, 전쟁을 봐라, 지진을 봐라, 공해를 보라, 망한다 망한다라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역사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소리를 높일 것입니다만은 결국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 다 붙잡혀 불 못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요, 이 세상은 고쳐질 것이요, 그리고 주를 바라던 모든 신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찬송과 감격과 기쁨 속에서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낙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주도해 나가시고 간섭해 나가신다는 걸 잊지 않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하고 거짓을 얘기하고 악한 일들을 도모하며 자기의 주어진 권세들을 남용합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그들이 결코 신자들을 해할 수 없고 교회를 넘어뜨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지금 마음껏 하라고 그러십시오.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입니다.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교독함으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 내용의 뜻을 잘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오리 불려가는 초개같도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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