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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모양도 없고

이사야 박동현 목사............... 조회 수 2262 추천 수 0 2008.03.17 21:22:36
.........
성경본문 : 사53:2 
설교자 : 박동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끝까지를 학자들은 흔히 이사야서 40장 이후에 나오는 네 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라고 합니다. 찬송가 뒤에 있는 교독문 60번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 본문은 특별히 수난주간에 널리 읽히는 구약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직 수난 주간은 아닙니다만,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게 되는 사순절 기간에는 언제라도 그 뜻을 새겨볼 만한 본문이 이사야 53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넷째 주일인 오늘 아침에는 그 가운데 3절을 중심으로 하되 필요할 때마다 그 앞 뒤 구절들을 함께 읽으면서 수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한다기 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 명상한다는 기분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본문에 들어 있는 한 마디, '고운 모양도 없고'를 제목으로 삼아 보았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이는 본문에서 '우리'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이 종의 모습을 본문은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여러 가지로 묘사합니다. 53장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다: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종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존재로 태어나서 그렇게 자랐고, 그 누가 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을 지녔음을 일러줍니다. 54장 14절에서는 이 종의 모습을 다른 식으로 묘사합니다:

전에는 그의 얼굴이 남들보다 더 안되어 보였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

이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제대로 다 드러내고 있지 못합니다. 제가 조금 더 쉽게 옮겨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를 보고 무리들이 몸서리쳤듯이, 그토록 그의 모습이 사람답지 않게, 그의 모양이 사람 같지 않게 일그러졌고. 어떻게 번역하든 뜻은 분명합니다. 다름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 오싹 소름끼치게 할 정도로 그 모습이 엄청나게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있어서 도무지 사람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이러하니 사람들도 그를 귀중하게 보지 않고 우습게 보고 심지어는 싫어하였다고 합니다. 53장 3절 첫머리가 이를 말해줍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그 다음 두 마디는 이 하나님의 종이 병과 아픔으로 시달린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히브리 본문을 따라 조금 더 쉽게 옮겨본다면:
아픔에 시달리신 사람, 병으로 낮아지신 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넷째 '야훼 종의 노래'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아주 보잘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흉측하다고 말합니다.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보는 이에게 혐오감을 주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 꼴이 그러하니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듯이 그를 업신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고, 본문의 '우리'도 이 사람 스스로 지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아무렇게나 대했다고 합니다. 3절 뒷부분이 이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그것이 아니더라고 합니다. 4-5절을 읽어보십시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그러니까, 이 보기에 흉측한 종은 바로 우리 때문에 아프셨고, 우리 때문에 괴로움을 겪으셨고, 우리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 때문에 으스러지셨고, 우리 때문에 매맞으셨다는 것입니다.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뒤 6-9절에 보면 그는 우리 때문에 재판 받으시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우리 때문에 죽이심을 당한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 우리를 위해 괴로움을 겪으시고 죽으신 뜻을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이 본문을 그렇게 이끌어 쓰고 있으니 마땅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 제가 여러분과 함께 관심을 기울여 보고 싶은 것은 거기 묘사된 하나님의 종의 흉측한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2절에 나오는 '고운 모양도 없고'를 설교제목으로 삼아 본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고운 모양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오히려 밉상스럽고 소름끼치게 하는 사람, 일그러지고 으스러지고 찢기고 얻어맞아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그 사람 - 그 사람 덕분에 바로 우리가 살아났다고 고백하는 이 본문은, 오늘 우리가 성화에서 보듯이 환한 광채가 둘레에 비치고 온화한 빛을 띠는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다니던 독일교회에서 보았던 십자가상을 기억합니다. 예배실 앞 왼쪽 조그마한 오르간 옆 구석에 놓여 있었던, 제 키만한 높이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철로 부어 만들어 시꺼먼 칠을 한 십자가상인데, 그 상 윗부분에 조각된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야말로 너무 끔찍하여 두 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예배실에서 이 십자가상을 처음 본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 교회 목사님께 '십자가상을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좀 보기 좋게 만들 수는 없었는지'하고 묻습니다. 심지어는 '그 모습이 지나치게 불쾌하여 예배당에 들어올 마음이 사라진다'고까지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제가 어린이 예배를 한 몇 달 함께 지도해본 적이 있는데, 그 때 보니 아이들도 그 상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면서 그 둘레를 빙빙 돌 뿐이지 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제 마음이 어지럽고 괴로울 때 이 끔찍한 그리스도상을 바라보면 오히려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여러분, '고운 모양도 없고' - 이사야 53장의 '우리'는 고운 모양도 없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남을 살린 하나님의 종이라는 점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놀라워합니다. 그리하여 1절에서 외칩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능력을 드러내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토록 보기 싫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이라니 그 소식을 누가 믿을 수 있으랴 - 이런 뜻의 고백입니다.
52장 마지막 절 15절도 같은 사실을 말합니다:

이제는 그가 많은 이방 나라를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다. 왕들은 이제까지 듣지도 못한 일들을 볼 것이며, 아무도 말하여 주지 않은 일들을 볼 것이다.

바로 앞절 14절에서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한 그 종을 하나님이 높이실 때 그것을 놀라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53장 1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종을 높이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여러분, 이제 우리 자신들과 우리 둘레를 살펴보십시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둘레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선 남자들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언제라도 단정히 맨 넥타이에 아래 위 색깔이 같은 양복을 단정히 입고 깨끗이 면도하고 머리도 잘 빗고, 얼굴에 점잖으면서도 부드러운 듯 딱딱한 듯한 빛이 돌고 성경 찬송이 든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다니시는 분, 무언가 남하고는 구별되는 그야말로 거룩한 느낌을 주는 분 - 이런 모습이 오늘 보통 알려진 기독교인들의 겉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일요일에 거리에서 이런 모습을 지닌 분들을 보면 '아아, 저 분은 교회 다니시는 분이시로구만'이라고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거의 들어맞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교회를 섬길 때, 때로 무슨 옷을 입고 어떤 모습으로 교인들 앞이나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잠바나 걸치고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고 아무렇게나 심방도 하고 마을 사람도 만나고 싶은데, 교인들은 그러한 저를 이해하기 힘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해서는 교역자의 체통이 서지 않는다'는 식으로 눈치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시골에서만 그렇겠습니까?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실 정장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게나 편하게 옷을 입고 강의실에 드나들고 싶지만 그런 선생님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괜히 눈치가 보입니다. 물론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는다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임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미 굳어진 사회 관습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함께 생각해 볼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겉모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버릇의 뿌리가 혹이라도 다른데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제가 시골에 있을 때 겪은 바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가끔씩 교회용품이나 책을 사기 위해 시골을 버스를 타고 나와서 가까운 도시에 있는 기독교서점을 기웃거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몸도 제대로 가꾸지 않고 나가면 서점 직원들이 소홀히 대합니다. 무얼 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때로는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복을 잘 갖추어 입고 얼굴도 깨끗이 하고 가면 들어가는 순간부터 깎듯이 인사하고 아주 친절히 안내를 해줍니다. 그러면서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목사님, 오셨습니까?"하면서 저를 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한편으로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세태가 한탄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인격이란 게 옷과 몸 매무새에 좌우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여 스스로 불만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인지 오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모양을 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양을 내려면 겉을 꾸미게 됩니다. 속은 어떻든지 겉만은 곱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겉모습이 허술해도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품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선교하는 것도, 사회 활동하는 것도 모조리 그런 식으로 되기 쉽습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모양이 곱기만 하면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몇 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우선 우리가 주로 섬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을 때 그 모습이 어쩌면 그리 곱지 않았으리라 하는 외람된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으로 우리 주변에 별 고운 모양이 없어서 우리가 아무렇게 대하고 심지어는 박대하고 죄인처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는 예수님처럼 우리 잘못을 지고 우리 대신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 우리에게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도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여러분, 남의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사람, 아니 못난이로 눈에 띄는 사람, 볼 때마다 아픈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 도무지 사람처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상한 모습을 지닌 사람,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겪어야 할 괴로움을 대신 겪고 있는 사람 - 이런 사람들이 오늘 우리 둘레에는 없다고 보십니까? 아니 우리 스스로 못나 보이더라도 그 못나 보임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못남으로써 남을 살리는 사람들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제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우리는 남의 눈에 두드러지는 사람, 훌륭한 사람,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본문의 하나님의 종처럼 되도록 하십시다' 한다면, 여러분은 '암, 그래야지'라고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별 소릴 다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창세기 11장 4절을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옛 말이 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는 동안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합니다. 이름을 떨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날리고 싶은 사람은 고운 모양 없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이름을 떨치려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고운 모양을 드러내려고 애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내 이름, 우리 이름을 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자기를 그렇게 곱게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을 더 부지런히 가꿉니다. 더 나아가서 남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내 고운 모습을 버릴 줄 압니다. 내 스타일 꾸길 줄 압니다. 내 체면 같은 데에는 그리 크게 마음쓰지 않습니다. 내가, 우리가 고와지면 고와질수록 예수의 모습이 고와지지 않을까봐 염려합니다. 내가, 우리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예수님이 숨기어짐을 알기에 두려워합니다. 삼갑니다.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를 드러내기에는 너무 잘난 사람들이 우리들이라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조차도, 기독교인이라 내세우는 것조차도 우리의 고운 모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저는 가끔씩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너, 옷을 잘 차려 입고 얼굴도 손도 발도 잘 가꾸었지만 사실은 살찐 짐승처럼 보이는구나'하고 스스로에게 말해봅니다. 또 남들이 "어이, 박목사! 요즈음 얼굴이 아주 좋으이. 몸도 나고. 그전에 그렇게 야위었던 사람이 이렇게 되다니. 정말 몰라보겠네" 하면 그것이 그냥 좋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엉터리가 되었으면 겉만 이렇게 번지르르 해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야위고 가난하고 꾀죄죄해도 그 속에서 예수의 생명과 빛이 드러나는, 흘러나오는 그런 모습을 지닐 수 없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수난 당하신 뜻을 새겨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삼가고 돌이켜 보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사순절 기간에 이 한마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평소 즐기던 음식을 삼가고, 평소 좋아하던 일을 삼가면서 나와 이웃을 돌아보는 것도 사순절 기간에 해볼만한 일입니다만, 이 시간 본문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우리의 근본 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고운 모양 너무 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운 모양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저 사순절 기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평생이 그러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제부터는 모양내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다. 옷모양, 머리모양, 신발모양 내는 것도 문제지만, 업적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줄 모르느냐? 이래도 내가 수십년 어디 어디서 이런 저런 큰 일을 한 사람인줄 모르느냐?" 이런 식의 마음도 모두 고운 모양 내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내가 낸 책만 해도 몇 권인가? 이런 책, 저런 책 써 내지 않았어?" 이런 마음도 결국은 고운 모양 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 나라 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에서도 아무도 날 무시할 수 없어!" 이런 마음도 고운 모양 내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분들은 곱다고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일은 좀처럼 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너무 영광을 많이 누려서 하나님께 칭찬 받을 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모양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운 모양 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인정사정 없이 다투어 고운 모양 내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운 모양 없고 고운 모양 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 끼여들 틈이 없습니다. 저절로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렇게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고운 모양이 없는 사람이지만, 고운 모양 없이 우리 대신 고통 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신 그 분을 소개합니다" 하면서 그 고운 모양 없어 업신여김 받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제는 없는 고운 모양 내려고 힘쓰기보다는 고운 모양 없더라도 서로를 받들어 주는 교회와 사회를 이루도록 힘써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아니면 "당신들이 보기에 나에게 이런저런 고운 모양이 있어 보이지만, 그런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오, 알고 보면 별 거 아니라오. 당신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면 내 기꺼이 드리리이다. 그 누구보다도 고운 모양을 지니신 분이 나와 당신, 우리를 살리시려고 고운 모양도 없이 사셨으니, 그 분을 우리 함께 주로 섬기면, 그 분의 뜻을 따라 우리도 남을 살리고 이 세상을 곱게, 아름답게 만듭시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그리스도의 수난은 나와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을 살리시려고 고운 모양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수난은 그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살리고 이 세상을 살리려고 우리의 고운 모양을 버리는 삶을 뜻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 여러분, 이 한마디 말씀이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두고두고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는 가운데 '오 하나님, 제게 고운 모양이 없어도 좋으니, 오로지 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아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 드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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