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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빈들

마태복음 박경미 교수............... 조회 수 2131 추천 수 0 2008.07.23 16: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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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7-9 
설교자 : 박경미 교수 
참고 : 새길교회 2001.2.18주일설교 
역사에는 낭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근현대사 전체가 온통 그렇게 보입니다. 동학혁명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좌절됐고,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 애쓰다가 일본에 합병되었습니다. 해방되었는가 했더니 남북이 분단되어 참혹한 살육전을 벌였고, 4.19를 통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는가 했더니 5.16이 일어나 군사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은 12. 12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고, 국민소득 일만 달러 시대에 돌입했다고 환호하던 때가 엇그젠데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부실과 부패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강제 부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이 극적인 기적을 통해 갈대 바다를 가르고 적의 전차 부대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 통쾌하게 이집트를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해방의 감격을 안고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갈대바다에서 가나안까지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40일을 넘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 조상 대대로 갈구해온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40년이란 긴 세월을 빈들에서 헤매야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출애굽의 감격적인 체험을 했지만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서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불평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광야전승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노예근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을 토로하며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면 야훼는 이들의 불평을 들어주다가도 걸핏하면 분통을 터뜨리며 그들을 버리겠다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호령합니다. 그 옛날 야곱이 빈들에서 하느님과 씨름했듯이 빈들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싸움터였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는 적들과 싸웠던 하느님이 광야에서는 자기 백성과 싸웁니다. 모세라는 탁월한 중재자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스라엘의 불평도 끝이 없고, 야훼의 분노 또한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빈들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정말로 지독하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기나긴 광야편력을 통해 갈대바다의 그 감격적인 체험을 했던 1세대는 모세까지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광야편력에서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느님 야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노출됩니다. 이스라엘의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상대하는 하느님 역시 문명사회의 교양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거칠고 참을성이 없습니다. 역사 현실이 냉엄하듯이 빈들의 여정도 냉엄합니다. 그러나 빈들을 거치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빈들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싸워 그들의 노예근성을 뿌리뽑고 그들을 새롭고 순결한 인간으로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빈들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빈들의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성서는 빈들에 관해서 자주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남의 양떼나 지키던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목자들이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빈들은 갈대바다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40년 간 헤매던 그 빈들이고, 이스라엘이 한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기로 순결하게 다짐했던 그 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느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야훼 하느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빈들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예수도 빈들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의 시험을 받은 뒤에 공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동시대 인물들 중에서 청년 예수가 가장 동지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던 것 같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예수에게는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들도 많이 들렸을 것입니다. 난세는 영웅을 배출합니다. 예수 시대에도 뜻 있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주장들도 많았습니다. 젊은 예수도 이러 저러한 주장들을 들으면서 생각과 뜻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난무하는 주장들의 맨 밑바닥에는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고 신음소리마저도 내기 어려웠던 땅의 사람들, 암 하레츠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과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의인들로부터는 죄인들로 낙인찍히고, 체제의 수호자들로부터는 흙무지렁이들이라고 비웃음이나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주장들이 난무했지만 이들에게는 어둠도 깊고 침묵도 깊었습니다.
그 가운데 선 예수는 모든 소란스러움을 멀리 하고 침묵 속으로, 광야로 나가서 40일을 보냅니다. 힘을 분산시키는 소란스러움 속에서가 아니라 광야의 그 텅 빈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통찰의 명징함 속에서, 결단의 그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이 잔잔하고 고요한 힘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것입니다. 모든 시끌벅적한 것들을 제치고 하느님께서 고요하게 이루신 저 사건, 모든 사건들 중에서 가장 조용하게 이루어진 그 사건 역시 빈들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가 시험받은 유대광야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 근처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선포한 곳도 사해 근처에 있는 유대광야와 요단강 가였습니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물고기가 아주 많은 생명의 호수이지만 사해는 너무 짜서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요단강은 생명의 호수 갈릴리에서 발원하여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기 전에 사해 옆에 있는 유대 광야로 들어가서 시험을 받습니다. 죽음의 바다 길목 빈들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번뇌의 씨앗을 소탕합니다.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넘나드는 내면의 고투를 통해 마침내 대 자유에 이릅니다. 도통하게 됩니다. 나를 잃음으로써 더 큰 나를 얻는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듭니다. 예수는 그 빈들에서 문명의 치장 없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때 빈들에서 예수와 함께 한 것은 천사들과 들짐승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있는 사람은 도통해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도 있고, 해와 달과 교감할 수도 있으며, 새들과 말하고, 벌레들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온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들을 느낄 수 있고, 상처받은 영들의 탄식과 기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속에 파도처럼 와 닿는 생명의 물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과 하나가 되고, 공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함께 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갑니다.
예수는 난세를 구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던 어떠한 집단에도 직접 가담하거나 동조한 것 같지 않습니다. 민족주의 운동이나 바리새파의 경건주의 계몽운동, 에쎄네파 은둔주의자들의 소종파 운동에도 예수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주장들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가 자신을 실어 분명하게 동조의 입장을 표명한 것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공생애 활동을 시작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대한 동의와 동참의 표시로 해석할 수 있으며,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활동을 개시했다는 것은 그의 활동을 계승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세례 요한의 선포는 둘 다 마지막 때가 이르렀으니 회개하고 곧 임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라는 호소로서 내용상 별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기존 사회의 지배세력을 향한 비난 역시 거의 비슷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같은 이들"이라고 비난한 말은 문자 그대로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들에서 살았던 들사람, 야인이었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빈들에 우뚝 서서 권력자들과 지도층을 질타하고 호령했기 때문에 요한은 그 앞에 서기가 두려운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비범한 인물이었고, 매우 엄격하고 강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남의 들러리나 서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은 흔히 자의식이 강하고 비타협적인 법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를 향해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다"면서 빈들의 흙처럼 자신을 낮출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들사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을 광야로, 마음의 빈들로 불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서의 위대한 예언자들은 광막한 빈들로부터 나와서 마을로 진입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인들도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에 진입했고, 예수도 광야 40일의 금식과 단련을 거쳐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갔습니다. 또한 유대교 안에는 광야로 나가 공동체를 이루고 마지막 때 하느님의 종말론적 개입을 기다리며 마음과 몸을 닦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이미 2세기부터 사막에 나가 수도생활을 하는 은자들의 집단이 생겼고, 중세 수도원은 이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노자는 곡신불사라고 했습니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습니다. 계곡은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물러나 있습니다. 계곡이 끊임없이 만물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은 그 비어 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계곡의 신을 현묘한 암컷이라고 했습니다. 계곡의 신은 그 텅 비어 있음 가운데서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생성합니다. 풀무는 비어 있지만 풀무질을 하게 되면 그 속에서 바람이 끝없이 나옵니다. 피리 역시 비어 있지만 불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옵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바람이 나오고, 비어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옵니다. 수레바퀴도 바퀴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잘 구릅니다. 비어 있는 피리처럼, 바퀴처럼 나를 비우고 만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다면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보다 큰 생명의 물결에 나를 실을 수 있습니다. 넘실대는 삶의 물결에 몸을 실어 광활한 생명의 바다를 둥둥 떠다니면서 허허 웃을 수 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계곡은 성서가 말하는 빈들입니다. 빈들은 어떤 곳입니까? 빈들은 빈곳입니다. 집착하거나 욕심부릴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욕심 부릴 것도 없고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허영심이 허망하다는 것을 광야에서처럼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광야는 지배자들이 지배욕과 탐욕을 버리고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에로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부패한 사회를 정화할 수 있는 곳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변혁의 힘이 생기는 곳이 광야입니다.
빈들은 또한 빈 마음을 뜻합니다. 빈 마음은 집착과 탐욕을 끊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그것은 나와 나를 추구하는 마음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마음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빈 마음에 메시아가 태어나고, 빈 마음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빈 마음이 되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빈 마음에 예수가 오고, 우리의 빈 마음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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