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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여 오셔서 우리를 움직이소서

요한복음 권진관 형제............... 조회 수 2561 추천 수 0 2008.07.23 1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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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6:5-13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1.2.25 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성령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설득되고 힘을 얻고, 영적인 고취를 받는 삶을 살았다. 우선,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 예수가 공생애의 시작을 선포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말했다. 누가 복음 4장에서는 예수께서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셨는데, 거기에서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고 이를 이기셨다. 예수의 결단, 고난, 십자가는 모두 하나님의 영의 고취와 설득과 감동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은 특별히 성령의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요즘 교회와 신학계의 일각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연구도 풍부해 지고 있다. 안병무 박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복원을 위해 최근 작고하실 때까지 노력하였고, 그의 동료학자들과 제자들, 그리고 새로이 올라오는 학자들에 의하여 역사적 예수가 다시 소개되고 연구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란 얘기를 들을 때마다 본 필자는 무언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역사적 예수가 나에게 어떻게 가까이 올 수 있겠는가 나아가서 어떻게 나와 합일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알고 그것을 통해서 오늘날의 잘못된 예수관, 신앙관을 비판하는 것은 지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역사적 예수는 그 당시(2000년전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그것을 아는 건 옳은 일이고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시대 속에서 새롭게 창조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삶은 어떤 것인가? 예수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행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해야 하는가?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들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예수 자신도 원하지 않는 것임을 다 안다. "그대로"의 반복은 또다른 율법주의가 된다. 따라서, 신앙의 필요와 요청에 의하여 아니, 신앙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우리와 그리스도 예수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합일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성령의 중재없이는 역사적 예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에 불과했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예수는 내 마음에 들어와 나를 움직이는 동인이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성령이란 누구인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개인적 관점에서 성령을 보면,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가 연합하게 하여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영적 성장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교회적 관점에서 보면, 성령은 공동체를 창조하시며, 공동체를 양육하시는 분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 사회를 새롭게 변혁하여 생명을 살리는 사회로 창조하시는 분이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성령이 우리의 삶, 특히 개인적인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한다. 그옹안 우리 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주로 배웠고 논의하였다. 오늘 저는 역사적 예수와 성령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말해보려고 한다. 역사적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다음의 도표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 ----> 역사적 예수 ----->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영 -----> 성령 하나님

이 도표는 성서의 전체 흐름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에게 임하셔서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감동시키고, 설득하시고, 인도하셨다. 이것은 예수 안에 이미 신성이 있어서 예수가 한 일은 신이 한 일이라고 보는 정태적인 본성론의 관점을 지양한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이다. 본성론에 의하면, 예수는 신성에 의하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 (homo-ousia, 호모우시아)이며, 예수 안에 신성이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우시아(ousia)란 말 자체는 고정된 실체를 가리키는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 안에 이미 신성이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어서 예수를 움직이는 것은 예수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고대 교회, 로마 교회의 정통주의의 관점이었다. 신성이라고 하는 실체를 인정할 때에는 예수를 진정한 인간, 역사적 인간으로 볼 수 없게 되며 반신반인(半神半人)과 같이 된다.

이와는 달리, 성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으로 보았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는 순수하고 진정한 인간이었고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끌림을 당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인격(됨됨이)이 그만한 일을 결단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때문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할 수만 있으면, 그 고난의 잔이 비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예수였다. 그러나 그는 영의 충만 속에서 다시 결단한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를 움직였지만, 그것의 방식은 예수의 정체서와 자아를 부정하는 것, 즉 인간 예수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영은 예수의 자아를 존중한 상태에서 예수의 자발적인 결단을 유도해 내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의 자발적인 결단이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일치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역동적인 일치는 호모우시아의 교리를 극복하게 해 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이 정도로 이야기해 보고 그의 호칭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 고백은 신앙인들의 고백이었다.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육신의 잣대로 알지 않겠다고 했는데(고후 5:16), 이것은 바울의 신앙의 요구에 의한 고백이었다고 본다. 바울은 육의 그리스도(역사적 예수)가 아무래도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타자로 느껴졌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훨씬 더 바울 자신에게 가까운 존재였다.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실체보다는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가 더 자유롭게 바울의 마음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보다 유연한 존재, 보다 비실체적이면서도 현실재인 그리스도가 요청되었고, 그리스도는 우주 어디에나 편만하다고까지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 1:10).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골 1:17).

그런데, 아무래도 그리스도는 예수와 가깝게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자유롭게 예수의 삶과 정신이 우리 안에 들어 와 육화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연결을 뛰어넘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의 성령은 대체로 그리스도의 영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갈 4:6)과 하나님의 영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이 우리 가까이에 오시고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가 되신 영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다(롬 8:9).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몸 혹은 육에 대조하여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몸은 타자로 남아 있고 멀리 떨어져있는 성질을 갖지만, 영은 가까이에 있고 함께 하는 성질을 갖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고전 5:3).

우리 교회전통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고 하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성령은 태초부터 계셨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성적인 삶과 그 삶의 성장은 모두 성령과 관계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며, 그 분이 내 안에 살게 해주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해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을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에너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부와 성자의 영적 에너지, 하나님과 아들의 속성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래서 성령을 역사의 뒷전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체험 속에 있는 현실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한다. 역사적 예수를 말하면서 우리는 그 뒤에 우리를 감동케 하여 역사적 예수를 찾게 하는 거룩한 영의 힘을 간과하고 만다. 성령이 없으면 예수가 우리 마음속에 깊이 파고 들어오지 않는다. 예수는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분이다. 팔레스타인에서 2000년 전에 계셨던 분이다. 이러한 분이 어떻게 나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 이 설교의 중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고 그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씀이다. 객관적으로 계신 예수가 내 마음 속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 들어오도록 해 주는 우리를 감동케 해서 2000년 전의 그 예수가 내 속에서 살아있게 해 주는 그 어머니와 같은 "살리는 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요청이요, 이미 요한 복음서를 쓴 요한과 요한 공동체의 요구였던 것이며, 체험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2000명 가까이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들이 모여들어 농성하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항의하고 싸우고 있다. 왜 노동자들만 희생당해야 하느냐고 외치고 있다. 이러할 때 성령은 그들의 절망되고 황량한 마음, 누군가 표현했지만, 그들 마음 속에 불고 있는 태풍보다 더 강한 삭풍을 재울 수 있는 뜨거운 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고난받는 자들 속에 존재해야만 한다.

저는 성령을 민중의 하나님, 모든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령을 요청하고 있다. 성령이 없으면 우리 삶은 삭막한 사막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를 강조하는 펜테코스탈 교회들이 나와 성령을 말하고 있지만, 저는 그들의 성령 이해는 매우 편협하고 물질적이며, 반지성적이며, 감정에 치우친 것이었다. 대형교회가 되고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축복받으면 성령의 축복이라고 보는 잘못된 성령이해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물질만능의 맘몬의 교회로 바뀌었고, 대형교회를 지향하고, 대형교회의 맘몬에 홀려 자기의 자식에게 담임 목사직을 세습시켜 주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자기 아들에게 세습시킨 어느 대형교회목사는 설교에서 세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라고 했다고 한다. 성령께서 택하신 목사가 현 담임목사의 아들을 택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저는 이쯤되면,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 분명하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대형교회들, 펜테코스탈 교회들은 성령의 이름 아래 민주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짓밟고 있으며, 이것은 성령을 왜곡시켜서 성령을 바알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성령은 누구인가를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려고 한다. 우선, 성령은 이름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성자인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다. 하나님도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다. YHWH라는 이름을 발음하기에 따라서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성령에는 제인, 소피, 탐, 제임스와 같은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성령의 이름을 은유적으로만 부르고 있다. 성령은 어머니, 주님, 위로자인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히브리어로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흐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리스어로 프뉴마, 라틴어로 스피릿의 원형인 스피리투스라고 부른다. 빛, 물,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등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모든 말들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이다. 그러니 고유한 이름 철수와 순자와 같은 이름은 없는 것이다. 실재하는 존재인데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어떤 아주머니를 수원댁, 과천댁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옛날부터 누구누구의 어머니로 불리었지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았던 것과 같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성령은 천대를 받아왔다.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 교회는 모두 서방교회로서 성자의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강조되었다.

성령은 있지만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민감한 감각이나 센스가 없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느낀다. 성령은 공기와 같아서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지만, 그러나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들 주위에 안 보이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공기는 바람이 되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릴 뿐 아니라, 때때로 커다란 힘을 일으킨다. 성령은 이러한 존재다. 또, 성령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 필수적인 존재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집안에서 일이 돌아가게 해 준다. 그러나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와같이 성령은 여성성, 주체가 아니라, 매개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성령은 약자의 하나님, 민중의 하나님이 아닌가 한다. 연약한 인간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 성령은 피조물들의 온갖 약함과 고난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 하나님이다. 신음하고 탄식하는 성령은 분명히 민중의 탄식을 대변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롬 8: 22, 23)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6)

역사 속에서 성령주의자들은 많은 탄압을 받아왔다. 몬타누스운동은 기원 2세기에 있었던 유명한 성령운동이었다. 중근동 광야 지방에서 일어났던 이 운동은 몬타누스만이 아니라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실라(Priscilla)라고 하는 여성들이 주도했던 운동이었다. 매우 영성 체험적이었고, 철저한 윤리적 실천을 강조했으며, 그 안에는 권위적인 위계질서가 없고, 철저히 평등한 구조, 특히 남녀간의 평등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통교회에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단으로 몰렸다. 피오레의 요아킴이나 마이스터 에카르트와 같은 신비가들도 교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제도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순복음 교회는 지금 그런 소리를 덜 듣고 있지만, 성령주의 순복음 교회를 들여다 보면 민중들이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순복음 교회는 민중의 교회이다. 그런데 의식이 없는, 대중적인 민중들의 교회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성령을 이용한 교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순복음 교회는 진정한 성령의 민중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이 민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유대의 쉐키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쉐키나의 유배의 해석학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쉐키나는 영의 거하심을 말한다. 내주하심 즉, indwelling을 말한다. 여기에서 이 내주하심은 항상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유배받는 이스라엘의 약자들과 함께 유배되기도 한다. 오늘날 구조조정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실직되는 사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노동자들과 함께 유배를 떠난다. 따라서 현실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계셨다가 다시 떠나는, 유배되기도 하는 현존이며,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떠나셨다가 우리가 뉘우치는 상황 속에서 함께 계시는 존재가 쉐키나 사상에서 유래된다. 쉐키나는 하나님을 대변하는데, 이 하나님은 고난받는 자와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영광을 누리고, 안락한 부류와 신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쉐키나 성령은 사회로부터 유배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민중의 하나님인 성령은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시며, 그것을 통해 과제를 맡기신다. 독일어로 은사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Gabe인데, 이 Gabe의 변형인 Aufgabe는 과제, task라는 뜻을 가진다. 성령은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어떤 과제를 준다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가정 속에서 우리에게 정의를 세우라는 과제를 준다. 예수와 같이 성령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맘몬이나 불의나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샬롬, 정의, 평화, 생명의 살림을 위해 자신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들에게는 삶의 열정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할 지라도, 절망의 늪이 아무리 깊다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삶의 열정에 불을 태우도록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성령은 지나온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시는 분이다. Reborn은 천진함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로 새롭게 태어나서 이제 성장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양육한 우리들의 옛 모습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 이제 새롭게 성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성령의 열매는 맺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령은 과거를 벗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와 같은 생명의 원천이다. 그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정열"에 불타게 한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삶을 살되 열정을 가지고 살게 하며, 삶을 자라게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성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삶의 넓이를 넓혀주고, 삶의 깊이를 깊게 해주고, 삶의 길이를 늘려준다.

* 삶의 넓이란 개인적으로 말하면 삶의 자유와 창조성의 확장으로 넓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삶의 넓이란 내 개인의 삶이 넓어지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조건 속에서 삶의 넓이는 넓어진다. 삶은 이웃에의 봉사를 통해서 확장으로 넓어진다. 우리의 손길이 더 많이 뻗칠 때 그 확장된 만큼 우리의 삶은 넓어지고 풍성해진다.

* 삶의 깊이란 우리가 가지는 믿음을 통해서 측정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는 정의에 대한 신뢰이다. 물질과 재물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나라를 향한 가치들을 신뢰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의 깊이가 측정된다. 물질적 성공, 지위에서의 성공, 온갖 외형적 성공으로 우리의 삶의 깊이가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생태적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의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기쁨 속에서 삶의 깊이가 측정된다.

* 삶의 길이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삶의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넘어서며 새로운 미래를 희망하는 정도로 측정된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도 우리의 삶의 길이는 확장된다.

결국 우리의 고백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를 움직이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당신이 함께 하심 속에서 거듭나고 성장하여 결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움직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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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6 마가복음 누가 이 바윗돌을 옮길 것인가? 막16:1-4  최만자 자매  2008-07-26 1509
17325 마태복음 두 지원자 마8:18-22  정진우 목사  2008-07-26 1620
17324 마태복음 주님, 우리가 언제 마25:37-44  민영진 목사  2008-07-26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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