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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늪에서 벗어나기

사도행전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85 추천 수 0 2009.12.13 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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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0:9-23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002.10.31

아이들이 쓰는 말 중에는 범생이라는 말과 날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범생이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모범생을 범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도 하지 않고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날라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범생이와 날라리에 대하여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범생이가 지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오~어제 밤새워서 공부했꾸나"라고 칭찬을 한답니다. 그런데 날라리가 지각을하면 "이 쫘아식~어제 뭐하다 이제와 응~!"하면서 매를 맞는답니다. 범생이가 수업시간에 코피나면 "이런 좀 쉬어가며 공부하렴"하고 양호실에 대려다 주지만 날라리가 수업시간에 코피흘리면 "야 임마! 누가 수업시간에 콧구멍 후비라 그랬어?"라며 두들겨 맞고 "야 이 자식! 바른대로 말해 너 어제 밤에 뭐해써?"하며 괜히 오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범생이가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어설픈 춤을 춰도 "이야..춤까지 출 줄아네.. 역시 달라.."라고 부러움을 사지만 날라리가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멋있는 춤을 추면 "저..저..저 꼬락서니하고는 저러니 맨 날 뒤에서 허우적대지..."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범생이가 자율학습 빠지며 학원이나 과외 받는다고 하면 "그래 열심히 하렴"하고 격려를 받지만 날라리는 "임마! 자율학습이나 잘해, 돈 썩히지 말고"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범생이가 성적이 오르면 "참 잘했어요~ 그렇다고 자만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렴"하고 칭찬과 조언들 듣지만 날라리가 열심히 해 성적이 오르면 "너 누구 것 보고 썻서"라고 컨닝 오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편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한번 모범생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잘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문제아라고 생각하면 그가 무엇을 하던지 문제아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공부를 못하면 모든 것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편견이라고 합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입니다. 학문적 정의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사실상의 근거 없이 지니고 있는 완고한 의견"입니다. 한가지 것을 가지고 전체로 판단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어느 시점에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대도 자신은 그것을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견이 있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편견에서 벗어나기 힘이 듭니다.

1. 우리에게 있는 편견은 무엇입니까?
1)베드로에게 있는 편견은 무엇입니까?
1)인종에 대한 편견(28):
오늘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옥의 땔감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심각한 인종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종편견은 아직도 심각합니다.
2)관습에 대한 편견(14):
베드로은 유대인으로 음식에 대한 정결법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은 먹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카샤룻'이라 불리우는 식탁에 관계된 법규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나 사물, 짐승, 가축 등을 부정한 것, 정한 것, 거룩한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려면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먹기에 합당한 음식을 가리켜 '코셔'라 부르며, 반면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이나 쓸 수 없는 그릇을 가리켜 '트라이프'라 부릅니다. 그 근거는 레위기 11장 1 - 43절에 두고 있습니다.
어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코셔'입니다. 상어, 고래, 미꾸라지, 오징어, 낙지, 꼴뚜기, 문어, 게,가재,새우,굴 등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고기의 경우 되새김을 하여야 하고 발굽이 갈라진 것이 '코셔'입니다. 말, 당나귀, 낙타, 돼지 등 못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짐승들을 베드로에게 3번이나 보여 주었습니다. 못먹겠다는 것입니다.

2)우리에게는 어떤 편견이 있습니까?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방송작가가 되어 방송MC로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발행인으로 활동하시는 방귀희씨가 "21세기를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77가지 편견 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책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7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편견, 관습적 편견, 사고적 편견, 성(性)적 편견, 시각적 편견, 문학적 편견, 현상적 편견 등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오는 편견 4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우상으로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종족 우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현상을 인간 본위의 사고 방식으로 판단에서 유래한 편견입니다. "꾀꼬리가 봄을 찬양하여 노래한다"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동굴 우상을 말합니다. 각 개인이 자기가 가진 특성, 습관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내가 보건대, 참나무가 제일 단단하다" 등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시장 우상을 말합니다. 언어의 잘못된 사용 및 해석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인어라는 말이 있으니 인어가 살고 있다"라는 식의 편견입니다. 넷째는 극장 우상입니다. 권위나 전통, 학설, 유행에 맹종하려는 편견입니다. "유명한 학자가 '우주에 끝이 있다.'하니 우주에 끝이 있다."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학문적인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도 많은 편견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지역적 편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 지역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며 자녀를 그 지역 사람하고는 결혼을 시키지 않습니다. 정치인을 뽑으면 그 지역 사람은 절대 뽑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회까지도 그 지역 목회자가 있으면 가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모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잘 생긴 사람은 능력있고 선하며 못 생긴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여성이 운전하다가 사고를 당하면 집에서 애나 보지 왜 나와서 길을 붐비게 만드냐고 핑잔을 줍니다. 신세대외 기성 세대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늙은 사람은 빨리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아침에 장애인을 보면 재수 없다고 합니다. 장애인이 애인과 함께 걸어가면 장애인도 애인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학벌에따른 편견이 있습니다. 일류 학교만 나와야 행복하고 출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편견, 교회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다양한 편견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2. 우리가 이 편견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첫째는 내 눈의 시각에서 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분에서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편견은 무지 때문에 발생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시각으로 이방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미 집사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에디오피아 흑인에게도 그것도 당신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8장). 그러나 아직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것은 한 쪽만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장님 코끼리 구경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코끼리의 배를 만져본 장님은 " 이 코끼리는 바람벽과 같이 생겼구나"라고 믿고 말합니다. 코끼리의 송곳니를 만져본 사람은 " 이 코끼리는 창과 같이 생겼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사람은 "코끼리는 뱀과 같이 생겼구나"라고 확신을 합니다. 코끼리의 다리를 안아 본 사람은 " 코끼리는 나무통 같다"고 믿습니다.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이 그것을 일반적인 법칙으로 생각랄 때 편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16살 때 실연을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남자는 다 도둑놈이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산다면 그는 커다란 편견에 시달려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구타한다고 모든 세상의 아버지가 다 아들을 구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편견입니다. 제가 어느 세미나 강의를 들어 보니까 미국에 사는 한 교포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똑똑한 자매입니다. 박사과정을 다닙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성인데 얼굴에 윤기가 없고 막가는 인생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강사에게 상담을 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딸에게 충격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였는데 세 자매를 범했고 당시는 셋째 이모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남자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34, 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능하다고 해서 나는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다고 나는 멸망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냐로 관점을 바꿀 때 우리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매사 하나님이 어떻게 생가하는가로 관점을 바꾸어 보십시오. 내 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어떤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조금이나만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내 경험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절대화 시킬 때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어릴 때부터 유대인으로 자랐습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부정한 음식을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는 것은 그에게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 번이나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편견은 의외로 완강합니다. 이것은 인습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변화는 항상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하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면 얼마나 경험하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어떤게 모든 것을 경험하고 판단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제까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이방인을 버렸습니까? 이미 출애굽 시기부터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와서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편견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체계에서 발생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념을 니콜라스 볼터스토르프는 자료신념과 규제신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많은 경험을 합니다. 직접 경험을 하는 것도 있고 간접 경험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료를 자신의 신념 체계로 만들 때 일정한 것을 타당도, 신뢰도. 객관도. 실용도가 높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관점으로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규제신념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규율을 세워서 제한하는 신념을 말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규제하는가? 욕구가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내 경험을 절대화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내가 경험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것은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홍해를 한번도 건너보지 못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한번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문둥병 환자가 이제까지 한번도 문둥병에서 나아보지 못했습니다. 38년 동안 한 번도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나고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에는 맞지 않지만 말씀에 따라 순종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4절 보십시오. 고넬료와 일가 친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말씀에 따릅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38).44절에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놀랍니다(45).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 능력으로 안된다고 주저 앉지 마십시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고 알 수 없다하여도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한번 도 못해 보았으니까 그 일을 전혀 내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어느 일정한 시점을 중심으로 한 나 중심에서 인생 전체와 인류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으로 삶의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 때 사람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어느 일정한 시점을 전체로 알고 그것에 얽매여 인생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 조금 무능력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사람으로 앎니다. 군대 생활한 사람들은 군생활 때 자기의 졸병으로 있다고 해서 사회에서도 자기 졸병 취급을 하려고 합니다. 대학 교수들도 자기의 제자가 교수가 되어도 끝까지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장관이 되면 그 후에는 장관 이하의 사람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일정한 시간의 것을 절대화 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이렇게 섬겼는데 과거 시골 교회에 다닐 때는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왜 오후 2시에 예배를 드리느냐? 이거 이단 아니냐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배시간에 복음 성가를 부르지 않았는데 왜 복음 성가를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과거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약시대 성전 음악은 레위인들이 전담했습니다. 여자는 제외되었습니다. 중세시대도 소수의 성직자로 구성된 찬양대가 있었고 여자 역시 제외 되었습니다. 회당예배는 기악 반주 없는 순수한 노래였습니다. 4세기 동안 기악 억제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 피아노 역시 술집에서 사용했다고 반대하였습니다. 오르간 역시 로마경기장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해서 초기 교회에서는 반대하였습니다. 시대에 때라 옷은 변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을 본질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 사고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변화된 관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유연성이 없습니다. 성경의 계시의 점진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베드로의 생각은 신명기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크게 제사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나누어 나옵니다. 제사법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룰 제사에 대하여 예표적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시민법이란 그 당시 문화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제사법은 그 문자적 의미가 상실되었습니다. 시민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문화의 틀 속에서 살아야 만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그 시대 관습과 가치관으로 살려고 하면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시점의 것을 절대화시키면 결국 그것은 아집,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전환을 하여야 합니다. 나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 자기 중심적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알고 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아집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신앙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객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 영접한 사람은 관점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를 따르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열심히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다 물에 빠집니다. 말고의 귀를 벱니다.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해설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해설하는 것을 보면 우리편과 상대편에 대하여 아주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공을 차다 보면 선수들이 시간끌기를 할 때가 있는데
상대국이 이길 때는 해설자는 "시간 끌기를 하죠? 저런 선수는 당장 퇴장시켜야해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을 때 선수들이 시간끌기를 하면 "좋아요! 체력을 아낄 필요 시간을 벌어주고 있어요. 아주 노련미가 돋보이는 선수군요."라고 해설을 합니다.
핸드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국이 범했을 때는 "손을 썼어요! 축구는 발로 하는 경기라는걸 모르는 것같아요."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가 손에 맞았어요 그러면 " 공이 손에 맞았어요. 아주 절묘한 찬스였는데 공이 손에 맞았어요."
심판이 오판을 하면 우리 나라에 유리하게 하면 "심판도 사람이죠? 실수할때가 있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러나 우리 나라에 불리하면 "심판이 눈이 멀었어요! 심판에게 경고를 줄 수있다면 퇴장감이죠."
해설자는 똑같은 상황인데도 평가는 다르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편견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것은 심리학에서는 "자기봉사 편견(Self-serving biases)"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과외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 시험을 보았습니다. 점수를 잘 맞으면 선생님은 자신이 잘 가르쳐서 좋은 점수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점수를 적게 받았습니다. 그러면 학생이 무능력해서 그렇게 좋지 않은 점수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반대로 점수를 많이 맞으면 자신이 실력이 좋아서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점수를 적게 맞으면 선생님이 잘 못 가르쳐서 그렇게 낮은 점수를 맞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이유없이 어떤 사건을 다른 사건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그릇된 편견을 갖게 됩니다. 남편이 어떤 여인과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집에 와서 낮에 걸어갔던 사람이 남편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이혼하자고 하면 그것은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 편견입니다. 그는 3류 대학 출신이니까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그렇고, 그는 일류 대학 출신이니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그 여자는 얼굴이 예쁘니까 마음이 좋고 결혼하면 생활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 모두 그런 경우입니다.
편향 통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신문이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도 사람들이 도둑이 쾌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도 사람들은 다 도둑이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도 사람들이 조금 느립니다. 그러면 모두 그 도 사람들은 느리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이 인기도를 조사할 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람들을 표본으로 선택하여 발표합니다. 신문이 여론이라고 보도하면서 일부 계층의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신문사 나름대로 이익이 될 만한 것만 취사 선택하여 보도합니다. 이것 역시 편향 통계에 의한 편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구원섭리를 이해한 후에는 완전히 인생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이제는 이 세상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는 편견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고넬료와 그의 일가 친척들을 살리는데 그가 쓰임받게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편견의 늪에서 벗어나기/행10:9-23/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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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7 사도행전 인간의 불가능 속에 계시는 하나님 행12:1-17  김필곤 목사  2009-12-13 2554
15616 사도행전 땅을 보는 사람과 하늘을 보는 사람/ 행12:17-25/  김필곤 목사  2009-12-13 3108
15615 사도행전 한 시대 하나님의 쓰임받는 사람들 행13:1-3  김필곤 목사  2009-12-13 2679
15614 마태복음 화평과 검으로 오신 예수 마10:34-39  강종수 목사  2009-12-13 1841
15613 고린도후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고후4:11  조용기 목사  2009-12-14 1779
15612 마가복음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막15:12  조용기 목사  2009-12-14 1727
15611 시편 감사와 찬양의 위력 시100:4~5  조용기 목사  2009-12-14 2997
15610 열왕기하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 왕하6:14~17  조용기 목사  2009-12-14 2237
15609 빌립보서 삶의 푯대와 인생 빌3:13~14  조용기 목사  2009-12-14 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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