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15,000원13,500원 (10.0%, 1,500↓)
가시관을 쓴 고난의 종은 참하나님이신 동시에 참사람이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으신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종처럼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이사야서 53장에 그려진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을 따라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그 고난으로 말미암은 영광을 되새겨 보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난 증거임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하는 감격적 강론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 사이에 있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의 구원과 교회와 세계의 완성에 관한 모든 계획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6342-6429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1.이사야서 53장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향해 달려오고 있고, 신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달려 나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의 계획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 인류 구원과 교회, 세계의 완성에 관한 모든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이 ‘성경의 위대한 장’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가장 탁월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세상이 그분을 어찌 대우할 것이며 또한 그분은 어찌 대속을 성취할 것인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2.기독교 신앙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바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비참한 형벌이었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다시 누릴 수 있게 해 준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과 세상의 헛된 이론에 무너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단과 세속주의에 빠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다 준 유익을 실제로 누리며 살고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풍조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리는 것뿐입니다.


3.십자가 사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이 믿어진 것입니다.(롬5:15, 8:32)
저는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회심을 하였는데 그때 제일 먼저 믿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죽게 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나 탐구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느 한 순간에 그 복음의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믿기 시작하자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기 시작했습니다.


4.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속에 나타난 증거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그분의 생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뚜렷하고 찬란하게 드러난 지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치 어두운 하늘에 작렬하는 불꽃처럼 드러났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인도와 보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으나, 이것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사랑의 예고편에 불과하였습니다.


5.불꽃은 보지 못한 사람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좋은 뿐 십자가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꽃놀이에 갔지만 불꽃은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6.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게 하는 제사장,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는 왕이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일반적으로 ‘메시아’ 대신 ‘그리스도’ 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시대적 정황 속에서 가지고 있던 메시아상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아 의식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의식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메시아’라는 단어보다 즐겨 사용했습니다.(마1:16,18)


7.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4대 성인 중 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그분을 통해 구속되며, 창조의 목적은 그분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그리스도 없이 지은 바 된 것이 없으며, 인간과 세계의 존재 목적은 그분 없이 설명될 수 없도록 의존되어 있습니다. 만물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께서 실재하심으로 탐구가 가능하고, 인간이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분 때문입니다.


8.마음의 닻을 내려야 할 곳

한정된 시공간에 사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그 삶의 근거를 영원한 세계에 정초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써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 인간의 마음이 닻을 내려야 할 곳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9.믿지 않는 세대

선지자의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메시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10.그리스도 없이 기독교는 없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한 사람,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고, 인간은 누구이며 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지 알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11.메시아에 대한 약속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우리가 전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시종일관 계시하신 한 가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했던 가장 커다란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12.세상이 예수를 거절함

사람들이 보기에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은 한 사람,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고운 모양도 없고 좋은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메시아의 이러한 출연은 성경에 이미 예고된 바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집착과 편견 때문에 그 예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연약한 외모 안에 숨겨진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요1:45-46)


13.자기 소견대로 판단함

누구나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자기 생각들을 피력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면 이 세상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어야만 해. 교회는 이러저러 해야 하고, 구원은 이러저러한 것이어야 해.”
그들의 진술의 이면에는 항상 그들 나름의 집착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신론을 유신론에 대한 편견이라고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이 예고는 오늘날에도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이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4.연약한 예수 안에 있는 구원

그 옛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하여 드려지던 제물들은 특이하게 주목할 만한 아름다움이나 풍채를 지닌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 양, 염소, 소 등 사람들이 끌고 가면 끌려가고, 죽이면 죽임을 당하는 힘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겉모습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에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찬송하고 경배합니다. 그 힘없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모든 죄 가운데서 건져 준 구속의 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15.외면당한 메시아

세상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를 박해하였을까요? 인생은 단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든가, 핍박하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든가, 부끄러워하든가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이 행한 일은 멸시하고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건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영받는 때는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주와 모욕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도 복음은 거절당할 뿐 아니라 멸시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16.배척받는 예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멸시를 퍼붓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이 기대했던 모습과 다르면 외면하고 믿지 않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미워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고통을 준 사람들은 이방나라의 백성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7.부당하게 대접받는 예수

그렇다면 대체 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단순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왜 싫어하고 미워하며 부당하게 대접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들이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모든 고통이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망할 뿐, 메시아 안에 있는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18.아픔과 슬픔을 아는 예수

성경은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간고’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은 ‘아픔들, 고통들’입니다. 그리고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은 ‘질병, 연약함’입니다.
메시아의 지상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이해하며 품어주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스스로 당하시며 인간의 슬픔과 아픔에 자신을 복속시키셨습니다.


19.멸시를 당하는 예수

죄가 없으신 그분이 질고를 아시게 된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멸시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참된 구속의 비밀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우셨던 말구유를 만져 보고 그분이 메사아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누우셨던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을 들여다보거나 골고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보는 것으로는 그 놀라운 구속의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습니다.


20.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그리스도

여러분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확고하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삶과 신앙 가운데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있는 사랑과 자랑들이 헛됨을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의 안목으로는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주님을 믿음의 눈은 보게 합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과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21.홀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간곳이 없고 오직 자신의 번영과 행복이 우상이 되고 자아의 실현이 최고의 가치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이 행복하도록 돕는 한도 안에서만 하나님도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 과거에 알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가슴 저리게 깨닫고 있습니까?


22.예수를 안 사람으로 살자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아무리 오래 교회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헌신적인 삶을 신앙의 자랑으로 삼아도 신앙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는 한, 그의 존재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는 없는 가지와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그러한 형식뿐인 삶으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23.우리를 위한 고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을 사람들은 핍박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도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한 고난이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고난이 메시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하는 징벌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24.희망은 바른 이해로부터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오해를 받고,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고난에 쌓여 있었고, 그래서 그분을 아는 것은 곧 그분의 고난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핍박을 받아온 적이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따라가기 위해 슬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수록 그분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25.메시아에 대한 오해

한 시대 안에는 항상 그 시대의 정신이 흐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특별히 그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고자 애쓰지 않는 한 그 시대의 아들이 되어 살아갑니다.
메시아가 오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아래 살아가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의 폭압과 경제적인 착취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열망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정치적인 압제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도 자신들의 생각과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6.우리 시대의 오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학을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념 때문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인간의 자율과 미래 세계에 나타날 과학의 진보를 낙관한 나머지 죄인 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지금도 사람들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보다는 시대의 상황과 시대의 정신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27.하나님의 생각을 가르쳐 줄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메시아에 대한 육에 속한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한때는 시대의 정신과 자기의 생각에 눈멀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보다는 희미한 자신의 선입견을 신뢰하여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좋으신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보다 신뢰함으로 메시아를 보지 못하는 예전의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을 눈뜨게 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8.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사람들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불화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정작 그렇게 살고 있을 때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영원에 대하여 인식하고 자기의 영혼의 상태와 운명에 관해서 눈뜰 때, 그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29.대속은 무엇인가-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이 대속의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여야 하는 것은 이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30.누가 대속하셨나-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범죄의 속죄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올리신 영원한 효력을 가진 속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흠 없으신 ‘그’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메시아가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도, 구속받은 우리가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죄로 말미암아 절망적인 상태가 된 인간들을 구원해 주실 유일한 ‘그’이시기 때문입니다.


31.무엇을 대속하셨나-반역과 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의 죄악을 우리 안에서 도말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부서뜨려지다.’ 이것은 큰 쇳덩어리 사이에 무엇인가 깨어지는 물체를 넣으면 큰 쇳덩어리의 강한 압력에 의해 사이에 끼인 것이 으스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으스러지듯이 부서지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32.대속의 결과 -하나님과의 평화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상실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채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반역의 경향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인간들에게 이제 그 죄의 멍에를 벗고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 길이 열렸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지극히 더러운 죄인 사이에 새로운 교제의 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화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은 인류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하나님과의 ‘평화’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33.대속의 결과-질병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이 감당하실 사역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치료함으로써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실 일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비참한 상태를 어루만져주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픈 몸을 고쳐주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래한 은혜의 시대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34.어디에서 대속하셨나-십자가

대속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가운데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일에 아무것도 공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오직 우리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35.왜 대속하셨나 -하나님의 사랑

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원치 않는 십자가 고난을 기꺼이 받으셨을까요?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옥체를 깨뜨려 제물로 드리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밖에는 우리의 반역과 죄악을 해결할 길이 없으셨기에, 그분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36.대속에 대한 반응-은혜와 감격

대속의 교리는 성경 66권의 뼈대이며,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믿는 바를 최대한으로 요약한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바로 대속의 교리일 것입니다. 이처럼 대속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적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37.대속의 계획자 -하나님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중간에 등장하는 ‘여호와께서는’입니다. 대속을 계획하신 주체가 ‘여호와’이시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38.대속의 이유-우리 모두의 죄악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양의 죄를 짓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 닿아 있습니다. 모양은 여러 가지이나 본질적으로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뿌리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인류가 범한 각양 각색의 악들은 그 본질적인 죄로부터 맺히는 수많은 열매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죄악’이라는 표현은 죄의 이러한 본질적인 뿌리와 열매를 동시에 지적하는 적절한 단어입니다.


39.대속할 죄악-하나님을 떠남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그냥 살아간 것입니다. ‘죄’라고 하면 사람들은 살인과 간음, 사기와 절도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각기 제 기로 간 것이 바로 메시아가 대속하셔야 했던 죄악의 정체로 규정합니다.


40.양의 비유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즉, 누군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돌봄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양과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 비유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41.대속하시는 사랑

한 사람의 삶은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에 좌우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만큼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간 양과 같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대속해 주시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치 없는 인간들을 대속해 주셔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42.자신의 무가치함을 아는가?

인간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만큼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대속의 교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붙들어주는 것은 이 교리만큼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잘 보여주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 때문에 값지게 된 것이지 원래 우리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43.행복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죄의 용서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투영된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열어주신 하나님과의 화목의 삶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44.고난과 침묵

‘그가 곤욕을 당하여’가 메시아의 육체적 고통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괴로울 때에도’는 그분의 내면적인 고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도 고난을 받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ㅗ가 누구신지에 대해 생각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양성(兩性)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사람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실 때에는 그분의 신성(神性)을 인성(人性)아래 감추셨습니다. 그분은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45.침묵의 이유1-하나님의 지혜를 아심

고난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였던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지 고난을 찾아 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신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바로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어도 그것으로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46.침묵의 이유2-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

메시아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굳게 다무셨던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을 누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주간, 그분의 고난도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에서 보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는 지극히 평화롭습니다. 그 평화의 비밀은 그분의 내면세계 가득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47.침묵의 이유3-목표에 대한 인식

메시아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굳게 다무셨던 세 번째 이유는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에 시선을 집중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위의 시선이나 판단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48.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인의 손에 이끌려서 도수장으로 들어가는 어린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주인을 신뢰하며 도수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비유한 것은 얼마나 적절합니까?
날카로운 칼이나 가위를 가지고 자기 몸의 털을 깎는 자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움 속에서도 잠잠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털 깎는 자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 받는 모습이 그러하셨습니다.


49.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산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생의 참혹한 현실과 고난 앞에 당당히 맞설 용기를 줍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가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의존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50.감추어진 대속의 비밀

대속의 지혜는 인간보다 훨씬 영리한 마귀도 알 수 없었던 비밀이었습니다.(골1:26) 유대인들도 이러한 대속의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함으로써 칭찬을 받은 베드로 조차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1.대속이 믿어지게 하는 성령

우리는 이 무지한 세상에 대속의 의미를 알리기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그 복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떠나 진노 아래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속의 지혜를 전할 때,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도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지혜를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인간들의 증거를 사용하시지만, 그 증거를 통하여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52.대속의 진리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자기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진리에 깊이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그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신 하나님과의 화목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삶이 놀라운 대속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위한 송영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53.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삶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펑펑 우는 감격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눈물이나 감격만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거룩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입니다.
대속은 반역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이 우리의 전 존재를 지배하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54.대속의 방법

범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선택 중 그 어느 것도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능력만 있을 뿐,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으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으심만이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불순종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인 죄의 지배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잇기 때문입니다.


55.인간의 숙명

인간은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도 피할 수 없으면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은 자신도 죽게 될 것임을 알고,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과 상관없이, 죽음은 창조 시 인간이 부여받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너무나 커다란 형벌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복종하여 사는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렇게 죽어가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56.짐작조차 할 수 없는 죽음

죄의 지배아래 있게 된 인간은 죽음이 자연스런 일인지 모르지만, 죄가 없으신 메시아에게는 결코 죽음이 자연스런 일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본성상 죽음과 거리가 먼 분이십니다. 완전하고 순결한 영으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메시아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전지전능한분이셨으나, 죽음은 그분에게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57.침묵과 온유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온유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온유함은 하나님을 위한 단호한 결단을 배제한 인간적인 부드러움이나 비굴함이 아니며, 더욱이 우유부단함에서 오는 무기력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에서 비롯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데서 비롯되는 거룩한 단호함이나 진리에 대한 결단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들을 포함하지 않는 온유함이라면 그것은 ‘인간적인 비굴함’이지 결코 ‘거룩한 온유함’이 아닙니다.


58.일사각오의 신앙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의 양태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동기는 같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살든지,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대속 재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기까지 그분을 위하야 살기로 작정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59.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

주님의 죽으심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단지 예언만 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첫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60.여호와께서 원하신 일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께서는 함께 일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이 일을 계획하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죽으심으로 이 일을 성취하였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이 일을 우리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성자 하나님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 하나님의 믿음 주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대속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61.속건 제물이란 무엇인가?

속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은 죄 중에서, 특별히 소유권을 침해한 범죄에 대해여 배상과 함께 올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범죄하였을 때이고, 또 하나는 이웃의 물건이나 소유에 대해 범죄하였을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범죄한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씻고 깨끗하게 되는 사건이고, 대속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훼손된 거룩함이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62.거룩함을 범한 죄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상은 거룩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왔고, 온 창조 세계에 죄가 범람했습니다. 세상은 일순간에 거룩함의 빛을 잃게 되었으며,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던 찬란한 영광의 힘을 상실했습니다.


63.남의 소유를 훔친 죄

속건제에 관한 규례는 두 대상을 향해 이웃의 재산을 훔친 죄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먼저 재산상의 손해를 입은 이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나님입니다.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도 배상의 제사를 올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64.거룩함을 추구하라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까? 이제 다른 인생의 길은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자신과 이 세상 안에 다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원래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구별’의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배타적으로 하나님께 봉헌되었거나 선점되었기에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65.거룩함-하나님의 백성들의 독특성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이 실제로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미 맛 잃은 소금이며 불 꺼진 등불입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아무리 높게 십자가를 내걸고 아무리 크게 교회라는 명판을 붙여도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함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도 인도주의의 사랑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언해도 입헌군주국의 실권 없는 왕을 모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66.열매를 맺으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은 주님 홀로하신 일이지만, 그 씨를 통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는 일은 우리가 협력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건 제물로 죽으신 것이 마음에 감격으로 다가오십니까? 그렇다면 입을 열어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말하십시오. 전도로 이어지지 않는 감격은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67.부활의 약속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사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이 죄악 가득한 땅에서 고단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만듭니까?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분과 같이 영광에 참여할 것이요, 주님과 함께 죽으면 그분과 더불어 다시 살리라는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68.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과 소망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미래에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에 대한 현재적인 소망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경험 속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으며, 미래에 있을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소망 없이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69.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오롯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표 하나에 집중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바로 자기를 화목 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70.목표 없는 삶의 비극

삶의 목표가 그리스도 없이 세워진 것이라면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 모든 것이 헛것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있고 종교적으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으나,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던 사울처럼 말입니다.


71.십자가에서 발견한 인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 없이 세워진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 지푸라기처럼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실 때 사실은 자기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26:15)“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22:10)


72.무엇을 위한 은혜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더 많이 경험하고자 하고, 성령의 붙드심을 더 강력하게 체험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갈망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살기 위하여 우리는 은혜를 구합니다.


73.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라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해 아무런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취해야할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분투하며 살 필요가 없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74.만족하시는 그리스도

여기서 만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 때문에 느끼는 만족이고, 또 하나는 인간들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시며 느끼는 만족입니다.


75.완전한 대속을 누린자의 삶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돌아보며 만족을 느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공로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은혜로 마련해 놓으신 생명의 삶을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결하신 메시아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놓으신 다리를 아예 건널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76.지식의 빛

그분의 생애는 교사로서, 또는 설교자로서, 이 세상에 불쌍한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속에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그분의 눈물겨운 섬김은 그 미련한 인간들에게 입을 열어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마5:2, 13:35)
그분은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일생을 사셨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입술의 말로써만이 아니라 몸으로써도 가르치셨습니다.


77.의롭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일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뜻도 알지 못한 채 읽고 외우고 해석하며 논쟁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참된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자기 지식으로’ 풀어 가르쳐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와 지식의 빛으로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78.지식-구원에 이르는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참된 지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무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아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무지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참된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이 비치고, 사람들은 유대교의 거짓된 가르침과 결별할 수 있었습니다.


79.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메시아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방법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지식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분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80.기쁨 없이 사는 삶

그리스도인이 기쁨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은혜로부터 멀어진 채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대해 정당한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며 찬송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사랑을 입은 우리의 의무는 그 사랑을 늘 회상하며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81.영광 받으시는 메시아

뱀의 후손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창3:15)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인류를 가두고자 하였던 악한 세력들은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매달아 죽이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붙여 그리스도를 죽음에 복속되게 하신 것은 보다 더 큰 영적인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였습니다.


82.승리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 ‘주(主)’로 불려지셨습니다. 가장 낮아지신 사건을 통해 가장 높아지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11)


83.영광받으실 이유1-자기 영혼을 버리심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의 승귀(昇貴)가 그의 비하(卑下)와 연결된 것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대비의 방식으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둘 다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던 이유는 거기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강요받은 죽으심이 아니라 자원하는 죽으심이었습니다.


84.영광받으실 이유2- 죄인처럼 멸시받으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자로 취급받을 만한 그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고자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수치스러운 오해를 받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취급당하며 멸시 받으신 것의 정점은 체포당하신 후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분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었습니다.


85.구속의 기쁨으로 살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임으로 불리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잊고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그분이 그렇게 참혹하게 형벌을 받으셔야 했음을 들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에는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맛보는 신령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이 필요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죄인들 중 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86.고난의 실상1-우리의 죄를 지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왜 사람들은 그분을 바로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 구약성경이 예고한 메시아가 그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도대체 왜 순결하신 그분을 범죄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 하시는 현장을 보기라도 했습니까? 그들도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일 열심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 속에서 어떤 흠이나 범죄의 증거를 찾으려고 했고, 그럼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어느 진술도 서로 일치하지를 않았습니다. 재판장도 그분이 죄 없으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7.고난의 실상2-죄인들을 위한 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며 살아가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늘의 권세로 지상 사역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와 똑같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명의 삶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십자가 위에서 흘릴 붉은 보혈보다 먼저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기도의 눈물을 바치셨습니다.


88.위대한 장을 덮으며

많은 사람들이 달콤한 것만 원하고 쓴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이 되는 것은 달콤한 것이 아니라 쓴 것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이야기만 듣고, 쉽고 편한 길로만 걷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아무나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참 신자의 길은 결코 아무나 걸어갈 수 없습니다.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넓고 많은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기에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지극히 협착하고 위험하며 외로운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그분처럼 기도하고 사랑하며...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