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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 어느 날 인우재에서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5287 추천 수 0 2002.01.05 2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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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605. 어느 날 인우재에서

 

아침시간, 솔뫼를 다녀오며 재철씨를 만났다. 개울 건너 산간 밭에 고추를 심고 있었다.

“좀 있다 새참 들러와요.”

재철씨는 새참을 먹으러 오라고 청했다. 이 어려운 때에 그래도 함께 밥을 먹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조금전 들린 가게에서도 고기를 잡아 온 신기염씨가 매운탕을 끓이려 하니 점심때 오라고 했으나

“인우재 올라 갈려구요.”

한동안은 작실 ‘안골’이라 했던 것을 이제는 그냥 ‘인우재’라 한다. 

“무슨 일해요?”

재철씨가 물었을 때 “그냥. 공부 좀 할려구요”

대답했는데 대답하고 나니 순간적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일과 공부’, 난 그렇게 이 땅에서 생소하고 송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실 재철씨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재철씨는 나와 동갑이다. 그런데 아직 총각이다. 농촌에 태어났으면 나 또한 겪었을 아픔을 고스란히 재철씨는 겪고 있다. 

 

아내가 챙겨주는 가방을 받아 들고 인우재로 올라왔다.

아내는 오늘 학교 급식을 가야 한다. 화요일은 상담, 수요일은 자녀교육에 대해 배우기 위해 원주를 나가는데, 그러고 보면 아내도 제법 바쁜 삶을 산다. ‘일 없이 심심한 삶’보다야 바쁜게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자기 일을 가진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사방천지 녹색 물결 넘실대는 인우재는 더없이 고요하다. 방문을 모두 여니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방안을 통과, 선선한 기운이 가득하다.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지난번 읽다만 ‘기호의 언어’(정교한 상징의 세계)를 읽다. 당장 ‘써먹을’ 책보다도 좀 더 광범위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지 싶다. 

심하게 부는 바람 탓인지 문 하나가 “쾅!” 소리를 내며 되게 닫혔다. 송화가루가 노랗게 덮인 마루로 나와보니 사방이 바람 물결이다. 저 아래 논둑에 선 미류나무가 바람에 쩔쩔매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키가 클 수 있을까 싶도록 자란 미류나무 꼭대기 부분이 바람에 휘청휘청거린다.

마치 긴 머리카락 날리듯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 건지, 넘보지 말아야 할 경계가 어디인지를 자연은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와 어제 옮겨 심은 참외 모종과 호박 모종, 나무 몇 그루에 물을 주었다. 제 땅에서 난 것들은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잘만 사는데, 옮겨심은 것들은 한동안 돌봐주어야 한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다. 라면이 뭐가 좋으랴만 간편해서 좋다. 송화가 노랗게 앉은 상에 혼자 앉아 앞산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다. 아내가 싸준 짠지와 오이, 방금 산에서 캐온 도라지 몇 뿌리 뿐이지만 모자르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고추장에 찍어 도라지를 한 입 베어 물자 쓴 맛이 싸아 입을 돌아 몸으로 퍼진다. 쓴맛 뒤로 퍼지는 상큼함이 유쾌하다.

굴러다니는 그릇을 씻어 조금 남긴 음식을 담았다. 산짐승이 배고플 때 먹겠지.

샘물을 받아 물을 끓이며 새로운 녹차 봉지를 연다. 아직 먹던 차가 조금 남아있기는 하나, 차를 전해 준 분을 생각하며 새로운 차를 마시기로 한다. 책을 보기도 하고 앞산을 마주 보고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풀을 뽑기도 하고, 가만 무릎 꿇기도 하고.... 하루가 그렇게 갔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를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셔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사63:17)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를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사 64:7)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들의 샘으로 삼은 것이다.”(렘 2:13) 

예언자를 통해 듣는 말씀이 아프기도 했다.

그게 뭔 대수냐고, 그렇게 밖엔 안되냐고 할진 몰라도 부끄러운 현실 참회하고 싶은 마음 아주 없지는 않은 하루였던 걸. (얘기마을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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