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영혼의 샘터

옹달샘

 

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볕뉘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38 추천 수 0 2023.12.27 22:08:01
.........

3b2db892deb215454cf3aeee5fbd953f.jpg[한희철 목사] 볕뉘

 

가능하면 지키려 하는 습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짧더라도 하루에 글 하나씩을 쓰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나 생각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생각을 적으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생각에 녹이 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녹이 스는 것은 쇠만이 아니어서, 생각도 멈추면 녹이 슨다고 여겨집니다.

 

며칠 전에는 ‘볕뉘’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었습니다. ‘시간을 잊고 오래 앉아 있게 하는, 작은 볕뉘’라는 글이었습니다. 창호지를 바른 문에 햇살이 환하게 머무는 모습을 보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추사의 유배지에서 보았던 김정희의 글씨였습니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글씨로, ‘작은 창에 빛이 밝아, 나를 오래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입니다. 

 

창호지를 비추고 있는 햇살과 그 햇살을 보며 떠오른 추사의 글씨는 우리말 하나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볕뉘’라는 말입니다. ‘볕뉘’는 몇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틈을 통하여 잠깐 비치는 햇살’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 등입니다. 

 

그렇게 쓴 짧은 글을 읽은 몇몇 지인들이 ‘볕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뜻을 새길 겸 다음 날에는 ‘뉘’라는 글을 썼습니다. ‘익숙한 볕을 두고 볕뉘는 낯설다. 쓿은 쌀 속에 섞인 벼 한 알처럼, 볕 뒤에 뉘가 놓여 뜻을 그윽하게 한다.’는 글이었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주는 길이 있듯이, 말에도 말과 말을 연결하는 길이 있지 싶습니다. ‘뉘’ 이야기를 하려다가 ‘쓿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쓿다’라는 말 역시 흔하게 쓰는 말은 아닙니다. ‘쌀이나 조 수수 따위의 곡식을 절구에 넣고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뉘’는 ‘쓿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뉘는 ‘찧지 않아서 겉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채, 쌀 속에 섞여 있는 벼 알갱이’를 뜻하니까요.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에는 밥을 하기 전 쌀 속에서 뭔가를 열심히 골라내는 모습이 있습니다. 

 

‘뉘’라는 말은 볼품이 없어 보입니다. 있어도 고만 없어도 고만인 말처럼도 보이고, 혼자서는 자기 자리도 찾지 못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뉘’라는 말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볕’이라는 말 뒤에 놓이자 뜻이 그윽해집니다. 작은 틈을 통하여 잠깐 비치는 햇살은 물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를 생각하게 하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는 화음을 잘 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슬며시 다른 음을 내지만, 함께 노래하는 이들의 노래를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재능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세상이 차가울수록 ‘볕뉘’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부시지는 않아도 누군가의 허전함을 비춰주는 환한 햇살로,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관심으로 살아간다면 말이지요. ‘볕뉘’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볕뉘’와 같은 삶을 꿈꾸는 세밑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차로>2023.12.2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21 한희철 나무 위에 그린 그림 file 한희철 2024-04-03 24
3220 한희철 녹색 파도 한희철 2024-03-27 15
3219 한희철 무는 개 짖지 않는다 한희철 2024-03-21 29
3218 한희철 봄은 어디에서 올까 한희철 2024-03-13 24
3217 한희철 배수진너 신진서 한희철 2024-03-06 10
3216 한희철 숨 막히는 길목 한희철 2024-02-28 22
3215 한희철 부끄러운 패배 한희철 2024-02-21 26
3214 한희철 무모한 신뢰 한희철 2024-02-14 28
3213 한희철 얼음을 녹이는 것은 한희철 2024-02-07 38
3212 한희철 같이 간다는 것은 한희철 2024-01-31 35
3211 한희철 또 하나의 대장별 한희철 2024-01-24 18
3210 한희철 줬으면 그만이지 한희철 2024-01-18 47
3209 한희철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한희철 2024-01-15 46
3208 한희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한희철 2024-01-10 35
3207 한희철 모두가 사는 길 한희철 2024-01-03 51
» 한희철 볕뉘 한희철 2023-12-27 38
3205 한희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희철 2023-12-20 28
3204 한희철 탕, 탕, 탕! 한희철 2023-12-13 19
3203 한희철 선생님들, 힘내세요 한희철 2023-12-08 17
3202 한희철 그건 제 돈이 아니잖아요 한희철 2023-11-29 20
3201 한희철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면 한희철 2023-11-23 36
3200 한희철 유쾌하게 지기 한희철 2023-11-16 24
3199 한희철 경이가 가득한 꽃밭 한희철 2023-11-08 19
3198 한희철 천원집이라고 불리는 집 한희철 2023-11-07 21
3197 한희철 하나님의 알파벳 한희철 2023-11-06 29
3196 한희철 정(情) 한희철 2023-11-02 41
3195 한희철 사랑의 시인 한희철 2023-10-26 43
3194 한희철 하룻밤 그리움에 머리가 다 세겠네 한희철 2023-10-20 39
3193 한희철 다음은 한글이다 한희철 2023-10-12 42
3192 한희철 어떤 노년 한희철 2023-10-04 53
3191 한희철 구렁덩덩 신선비 한희철 2023-09-29 52
3190 한희철 포도나무 앞에서 한 결혼식 한희철 2023-09-21 32
3189 한희철 김빠진 콜라 한희철 2023-09-13 29
3188 한희철 아이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한희철 2023-09-07 24
3187 한희철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공의 한희철 2023-08-30 25

 

 

 

저자 프로필 ㅣ 이현주한희철이해인김남준임의진홍승표ㅣ 사막교부ㅣ ㅣ

 

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글의 저작권은 각 저자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글을 다른데로 옮기면 안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