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영혼의 샘터

옹달샘

 

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얼음을 녹이는 것은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38 추천 수 0 2024.02.07 21:38:07
.........

3b2db892deb215454cf3aeee5fbd953f.jpg [한희철 목사] 얼음을 녹이는 것은

 

태어나서 자란 고향 부곡은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같은 모양의 집들이 나란히 서 있던 예전의 동네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철도청에 근무하는 이들을 위한 관사가 100호나 세워져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구조였습니다. 목욕탕도 있고 지하실도 있는 일본식 구조였는데, 그런 집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관사가 대부분 헐리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눈을 감고도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어릴 적 기억을 두고, 지금은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동네 서쪽 편에 있던 저수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월암리와 입북리와 초평리에 걸쳐 펼쳐진 큰 저수지였습니다. 동네에 다른 저수지가 더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릴 적 우리는 그냥 저수지라 불렀는데, 지금은 왕송호수로 불리더군요. 호수 주변으로는 바이크 시설이 설치되어 외지에서도 찾아오고 있고요.

 

어릴 적 저수지는 큰 운동장과도 같았습니다. 여름에는 수영을 하고, 조개와 우렁이를 잡고, 긴 줄기를 따라 물속에서 자라는 마름을 캤습니다. 겨울에는 겨울대로 동네 운동장이었습니다. 얼음이 꽝꽝 얼면 나무를 깎아 팽이를 돌리고, 외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습니다. 제 몸이 어는 것에 대한 통증인지 저수지 얼음장이 쩡쩡 우는 소리를 경외감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얼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썰매를 타다가 심심하면 조개를 잡기도 했습니다. 저수지가 얼 정도이니 저수지 곁에 있는 논은 당연히 얼음이 얼었는데, 우리는 조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얼음 밑 흙 속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조개를 어찌 잡을까 싶겠지만, 방법이 있었지요.

 

조개가 있는 곳 바로 위에는 조개가 숨을 쉰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얼음 위를 살펴보면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생긴 무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늬 주변으로 손이 들어갈 만큼 얼음을 깨고 손을 넣으면 조개가 잡혔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만이 알 수 있는 일로, 얼음장 아래에 있던 조개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입춘’의 시간을 맞습니다. 느낌이 그런 것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 어디선가 봄기운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햇살도 조금 더 밝고 따뜻해진 듯싶고, 바람도 한결 순해진 듯싶습니다.  

 

어릴 적 조개를 잡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얼음장을 녹이는 것은 따뜻해지는 햇살이나 순해지는 바람만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막 벙글기 시작할 꽃봉오리의 금 가는 소리일 수도 있고,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는 밝음의 기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음장을 녹이는 것 중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얼음장 밑에서 숨을 쉬는 누군가의 호흡, 그것이 물고기든 조개든 그 무엇인가가 숨을 쉬는 작은 온기 또한 얼음장을 녹이겠지요. 이 시대의 얼음장을 녹이는 것 역시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 한 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차로>2024.2.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21 한희철 나무 위에 그린 그림 file 한희철 2024-04-03 24
3220 한희철 녹색 파도 한희철 2024-03-27 15
3219 한희철 무는 개 짖지 않는다 한희철 2024-03-21 29
3218 한희철 봄은 어디에서 올까 한희철 2024-03-13 24
3217 한희철 배수진너 신진서 한희철 2024-03-06 10
3216 한희철 숨 막히는 길목 한희철 2024-02-28 22
3215 한희철 부끄러운 패배 한희철 2024-02-21 26
3214 한희철 무모한 신뢰 한희철 2024-02-14 28
» 한희철 얼음을 녹이는 것은 한희철 2024-02-07 38
3212 한희철 같이 간다는 것은 한희철 2024-01-31 35
3211 한희철 또 하나의 대장별 한희철 2024-01-24 18
3210 한희철 줬으면 그만이지 한희철 2024-01-18 47
3209 한희철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한희철 2024-01-15 46
3208 한희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한희철 2024-01-10 35
3207 한희철 모두가 사는 길 한희철 2024-01-03 51
3206 한희철 볕뉘 한희철 2023-12-27 38
3205 한희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희철 2023-12-20 28
3204 한희철 탕, 탕, 탕! 한희철 2023-12-13 19
3203 한희철 선생님들, 힘내세요 한희철 2023-12-08 17
3202 한희철 그건 제 돈이 아니잖아요 한희철 2023-11-29 20
3201 한희철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면 한희철 2023-11-23 36
3200 한희철 유쾌하게 지기 한희철 2023-11-16 24
3199 한희철 경이가 가득한 꽃밭 한희철 2023-11-08 19
3198 한희철 천원집이라고 불리는 집 한희철 2023-11-07 21
3197 한희철 하나님의 알파벳 한희철 2023-11-06 29
3196 한희철 정(情) 한희철 2023-11-02 41
3195 한희철 사랑의 시인 한희철 2023-10-26 43
3194 한희철 하룻밤 그리움에 머리가 다 세겠네 한희철 2023-10-20 39
3193 한희철 다음은 한글이다 한희철 2023-10-12 42
3192 한희철 어떤 노년 한희철 2023-10-04 53
3191 한희철 구렁덩덩 신선비 한희철 2023-09-29 52
3190 한희철 포도나무 앞에서 한 결혼식 한희철 2023-09-21 32
3189 한희철 김빠진 콜라 한희철 2023-09-13 29
3188 한희철 아이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한희철 2023-09-07 24
3187 한희철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공의 한희철 2023-08-30 25

 

 

 

저자 프로필 ㅣ 이현주한희철이해인김남준임의진홍승표ㅣ 사막교부ㅣ ㅣ

 

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글의 저작권은 각 저자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글을 다른데로 옮기면 안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