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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배우다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970 추천 수 0 2003.03.25 11: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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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3 나무에게 배우다

 

이번 가을, 제게는 나무가 선생이었습니다. 책상이 놓여있는 창가에 앉으면 바로 나무를 마주하게 됩니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간간이 나무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초록이 지쳐 붉고 노란 빛 엷게 퍼질 때부터 잎새 모두 떨어져 허전해질 때까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무심한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대개는 변함 없는 표정으로, 그러다간 나들이라도 나서는 듯 곱게 단장한 얼굴로, 그러다간 침묵으로 기도를 바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4층, 4층 높이까지 자라 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나무마다 4층보다 낮았으면 아파트 생활은 더욱 불안했을 것입니다. 아파트 높이를 뛰어넘는 나무를 바라보다 문득 아파치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흙을 떠나 높이 솟아오른 아파트와 흙을 찾아 멀리 떠나간 아파치, 흙과의 거리감으로 아파트와 아파치는 비슷하게 위태했습니다.
종알종알 매달렸던 아카시아 잎새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떨어지곤 했습니다. 추위에 떨며 눈여겨보았던 함박눈을 꿈꿨던 것일까요, 아지랑이처럼 날던 봄날의 나비를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일까요, 때로는 눈발처럼 때로는 나비처럼 바람에 날리곤 했습니다.
자기 발자국 소리마저 지우며 내리는 빗속, 시간까지 정지한 듯 무엇하나 움직이지 않는데 천지에 금 하나 내며 툭- 떨어지는 잎새 하나! "내 때를 알게 하소서" 나무는 서서 거듭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도 있었습니다. 울창했던 잎새 모두 떨군 나무가 가슴에 품었던 새집 하나 허전하게 드러내고선 하늘에 바치는 기도 "제가 한 일은 고작 이것뿐입니다", 그 정직한 고백이  빈 가지를 오히려 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허전할수록 빛나는 것이 정직한 고백임을 빈 가지의 허전함을 통해 배웁니다.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잎과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잎, 맥없이 지는 손바닥만한 잎과 춤추며 날리는 아기손톱 같은 잎, 물든 빛깔과 떨어지는 모양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무리 없이 어울려 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을 키워준 대지의 품, 누구라도 그 품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그 넓은 품을 두고 사람들은 왜 다투고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나뭇잎의 가벼움과 당연함이 새롭게 보입니다.
나무는 같은 자리에 서서, 많은 것 맞고 많은 것 보내며 같은 자리에 서서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말없이 가르칩니다. 내 선 자리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할 것, 주어지는 모든 것을 불평 없이 받으며 때를 따를 것, 그리곤 나머지를 잊을 것, 단 한 번뿐인 계절을 지나며 지나치게 많은 것을 꿈꾸지 말 것…, 나무가 선생이었습니다. (200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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