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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구두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1056 추천 수 0 2003.04.08 1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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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2 낡은 구두

 

나는 요즘 낡은 구두를 신고 있다. 낡았지만 편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낡은 구두를 고집스레 신고 있다. 지난번 미국을 다녀올 때에도 이 구두를 신고 다녀왔다. 지난 봄에는 낡은 구두를 눈여겨본 한 교우가 구두를 사겠다고 가게까지 갔는데, 가게에서 구두 이야기를 듣고는 어색하지만 끝내 사양을 했다.
사실 한국을 떠날 때 친구가 식구대로 사준 구두가 있어, 한 번도 신지 않은 구두가 한 켤레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 낡은 구두를 신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내가 지금 신고 있는 구두는 아버님이 신던 구두이다. 3년 전 아버님께서 주님 품에 안기셨을 때 유품 중에는 아버님이 신던 구두도 있었다. 신으신 지가 꽤 되어 보이는 구두였다. 버릴 수도 있었지만 한 번 신어보니 내 발에 잘 맞았다. 그 때부터 나는 아버님이 남기신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아버님과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크게 떠오르는 시간이 없다. 몇 몇 순간들과 몇 몇 말씀들이 생각 안 나는 것은 아니나 유별난 순간을 나누지 못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늘 출퇴근하시던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이가 드셔 노인이 되셨다는 느낌이다. 어려운 시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시느라 요즘의 아버지들처럼 자녀들에게 따로 마음쓸 여유가 없으셨다는 것을, 그게 아버지 세대가 져야 할 허전하고 무거운 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아버님이 노년에 접어드셨을 때였다.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다리를 주물러 드리던 기억과, 우산을 들고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던 기억, 중학교 시절 운동을 좋아하는 내게 한 가지라도 운동을 제대로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그 때만 해도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할 때였는데, 아버님을 뵙고 돌아서는 내게 우연처럼 하신 말씀도 있다. "모든 일을 즐겁게 하라"는 말씀이었다. 평안히 가시면서도 따로 남기신 말씀이 없었으니 가족들에게는 유언과 같은 말씀이 되었다.
내게 아버님의 삶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의 삶으로, 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고향에 가지 못한 삶으로 남는다. 금강산 자락이라 했던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이 고향이신 아버님은 평생을 고향을 마음에 묻고 사셨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버님이 남긴 구두를 신을 때마다 아버님이 남긴 삶을 생각한다. 충분히 나누지 못했던 아버님과의 시간과 아버님이 끝내 가슴에 묻고 가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한다.
지금 신고 있는 구두가 낡을 대로 낡아 더는 신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 때에는 일부러라도 아버님 누우신 단강을 찾아 아버님 산소 앞에 신을 벗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만큼 아버님을 생각했노라고, 아버님의 삶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남아있었노라고 뒤늦은 마음을 드리고 싶다. (200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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