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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 '뿔'을 좇는 세상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1716 추천 수 0 2006.01.06 20: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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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독교사상> 10월호 특집 '무한경쟁 시대가 어떻다고?!'에 쓴 원고입니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걸음걸이보다도 방향이 올바른 것일까? "제발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 지향을 보아 내 삶을 판단하소서."라는 기도처럼, 낱낱의 행위보다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더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는 것일까?
나침반의 생명은 정확함에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꺼내들어도 바늘 끝이 정확한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재질로 만들어졌다 하여도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면 그 나침반은 소용이 없다.
나침반이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될 것이 있는데, 바로 바늘의 떨림이다. 아무런 떨림도 없이 단번에 원하는 방향을 척-하고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난 것이기가 쉽다. 제대로 된 나침반일수록 세밀하게 몸을 떤다. 정확한 방향을 찾기 위해 파르르 몸을 떤 끝 힘이 다 빠진 듯 바늘이 멈춰 설 때, 우리는 그 방향을 신뢰하며 바라보게 된다.
나침반의 바늘이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가리킬 필요는 없다. 단지 한 방향만 제대로 가리키면 된다. 한 방향만 분명하다면 나머지 방향도 찾아낼 수가 있다.
나침반을 재미 삼아 꺼내볼 때도 있지만, 사실 나침반은 생명과 관계된다. 결정적인 순간 나침반이 잘못되면 길을 잃게 되고 생명을 잃게 된다.

'동시에 동서로 갈 수 없다'는 유대 격언이 있다. 생각해보면 지당한 말이다. 同時에 東西로는 갈 수가 없는 일, 고집 부려 가려해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몸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정직하게도 가랑이가 찢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굳이 '정직하게도' 라고 쓴 것은, 우리들 때문이다. 우리들은 너무도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동시에 동서로 간다. 신기하게도 가랑이가 찢어지는 일도 없고, 통증을 느끼지도 않는다.
동쪽이 내 길이면 서쪽을 등져야 바라볼 수 있다. 북쪽이 내 길이어서 그 길을 가려면 남쪽을 등져야만 한다. 내가 내 길을 걷는다 함은, 매순간 등질 것을 등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뻔한데도 오늘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시에 동서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동서로 가면서 그것을 신앙의 힘, 혹은 성령의 능력이라 그럴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뿔'과 '뿌리'는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라 한다. 높이 솟아오른 '뿔'과 땅속으로 뻗은 '뿌리',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반대인 두 단어가 한 어원에서 나왔다니 뜻밖이다. 서로 다른 두 말이 한 어원에서 나왔다 함은 그 근본은 같다는 것, 결국은 둘이 무관할 수가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결같이 '뿔'을 좇는 세상이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화려한가,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처럼 되었고, 그런 삶의 결과는 어느새 삶의 질로 자리를 잡았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화려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택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구도, 양심도, 염치도, 신앙도 필요할 경우엔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토끼의 간'처럼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내남없이 제한속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아우토반을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몰고 질주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몰라서일까, 너무 잘 알기 때문일까,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는 굳이 묻지를 않는다.  
나무는 정직해서 위로 자라난 높이만큼 아래로 뿌리를 뻗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바람에게 진다고 한다. 흔한 발에 밟히는 민들레조차도 땅속에서 물을 찾을 수가 없을 땐 스스로 자라기를 멈춘다고 한다. 뿌리를 뻗어도 뻗어도 물을 찾지 못하면 위로 자라는 것을 멈추는데,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뿔을 좇는 세태 속에서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쥐가 나는 줄도 모르고 까치발을 하고 키 자랑을 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의젓한가? 오히려 앞장서서 달려온 것이, 저 무서운 질주의 대열 앞자리를 다투고 있는 이들이 깃발처럼 높이 쳐든 것이 혹 십자가는 아니었을까?
세계가 찬탄할 정도로 한국 교회의 뿔은 높게들 솟아올랐다. 어질어질할 정도다. 빠르기도 했고, 눈부시고 화려하기도 하다. 그런데 뿌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는? 분단된 조국과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 백성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절실함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위로 자라난 높이만큼 뿌리를 뻗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자살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자살의 충동에 굴복하기 전 삶의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보낸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난 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쓴 책이 있다. 피에르 신부가 쓴 <단순한 기쁨>이란 책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매년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을 설문조사를 통해 순위를 매기는데 팔 년 동안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른 이가 바로 피에르 신부이니, 노사제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애정과 존경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교회의 통치조직과 그 대표들 가운데 일부의 태도가 때때로 복음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새로운 교황대사의 관저가 건축되고 있던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건축이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타르로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어놓곤 했다. 그러자 건축을 맡은 성직자가 경찰을 불렀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인상적인 마지막 문장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라는 말이 느낌표로 끝나고 있는 것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책 속에는 이런 글도 있다.
"어떤 가난한 나라에서는 고위 성직자의 재산이나 생활수준이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거주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농촌에서 막 목회를 시작할 무렵, 전도사 시절의 일이었다. 어느 겨울날 아랫마을로 내려가다 보니 저만치 논길을 따라 지게를 지고 오는 이가 있었다. 잔뜩 나무를 짊어졌는데 걸음새가 독특하다. 교우였다. 다 기울어진 집에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궁벽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집사님이었다.
신작로로 올라서는 집사님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집사님의 지게를 지겠다고 나섰다. 땔감으로 지게 위에 얹힌 나무가 제법이었다. 집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게를 지려 했지만 끝내 지게를 질 수가 없었다. 어깨 위에 걸려야 할 지게 끈이 자꾸만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이 많았던 만큼 웃음도 많았던 집사님이었다. 깔깔 웃는 집사님 앞에 지게를 세우고 가만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지게는 체구가 작은 집사님이 당신 체구에 맞게 만든 작은 지게였다. 당연히 지게 끈도 짧았다. 그런 지게를 덩치가 큰 전도사가 마음만 앞세워 지려고 했으니 결국은 마음뿐이었다.
그 날밤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집사님, 사람에겐 저마다의 고통이 있나 봅니다. 다른 사람이 져줄 수 없는, 저만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 저마다에겐 있나 봅니다. 내가 얼마나 작아져야 당신의 고통의 자리, 바로 그 자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인지, 집사님, 오늘 지지 못한 당신의 지게를 두고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낮아지지 않으면, 그렇게 곁에 다가가지 않으면 구경만 하고 말 일들이 적지 않다. 어떤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일들이 태반일 터, 이웃이 겪는 아픔의 자리에 닿기엔 너무 덩치가 큰 우리의 몸집이 마음에 걸린다.

<재미나는 인생>은 성석제의 소설집인데 짧고 기발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그 중에는 남자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불과 두 페이지 분량의 '고독'이라는 글이 있다.
목욕탕 한구석에서 몸을 씻고 있다보니 반대쪽의 온탕 앞에 거구의 사내가 혼자 앉아 몸을 씻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내 근처에는 가려고 하지를 않는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조차도 그 쪽으론 얼씬도 못하고 반대쪽에서만 복작거릴 뿐이다.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어쩌다 그 사내 근처에 가면 걸음을 멈추고 질린 낯이 되어 얌전하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늠름하게 앉아 몸을 씻는 사내가 부럽기도 하고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여 유심히 바라보니 사내는 시선을 공중에 고정시킨 채 묵묵히 때를 밀고 있다. 꾹 다문 입술, 검고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 짧게 깎은 빳빳한 머리, 온몸의 크고 작은 흉터가 사내의 직업이나 성격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한참 때를 밀던 거구의 사내가 마침내 끙-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 순간 그의 오른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게 된다. "참자."라는 글씨가 서툴게 새겨져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사내의 뒤를 따라가 샤워를 하는 척하며 반대 쪽 팔뚝을 쳐다보니, 역시 조금 긴 내용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착하게 살자."였다.
그런 내용이었다. 짧지만 기발하고 기가 막힌 역설이 아닐 수가 없다. '참자'든지 '착하게 살자'라는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거구의 사내 팔뚝에 문신으로 새겨진 그 말은 그가 얼마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인지를, 그가 얼마나 착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줄 뿐이다.
말과 본심은 그렇게 다르고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세요" 말하는 것은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바르고 시원한 지적이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한 경우에는 말을 하십시오." 했던 프란시스의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다.
문신처럼 새겨진 우리의 고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사는지가 중요할 터, 정말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원주 흥업에 있는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 앞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다운 호수다. 호수 한가운데는 '거북섬'이라 불리는 작은 섬이 하나 있어 호수의 운치를 한결 더해 준다. 그런 아름다움은 새들의 눈에도 돋보였던지 언제부턴가 거북섬엔 학이며 왜가리 등이 날아와 섬을 하얗게 수놓기도 하고, 때때론 고고한 날갯짓을 선보여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곤 한다.
호수와 관련하여 매지 캠퍼스에 근무하는 분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다. 날이 몹시 춥던 어느 겨울밤, 학교에서 야간근무를 하는데 한밤중 느닷없이 밖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리더란다. 놀라 밖으로 나와 보니 소리는 호수 쪽에서 나고 있었다. 비단을 찢는 듯한 괴이한 소리는 간헐적으로 이어지곤 했다.
두려운 마음을 겨우 진정하며 호수 쪽으로 다가가니, 뜻밖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청둥오리이지 싶은 철새들이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가는 있는 힘을 다해 급강하, 호수 속으로 뛰어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괴상한 소리는 날갯죽지가 물에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추운 겨울 밤, 호수의 가장자리로부터 얼음이 얼어 오니까 호수가 모두 얼면 있을 곳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철새들이 물이 얼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져 물살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결국은 호수가 다 얼어붙어 철새들은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던 철새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거룩한 몸짓으로 남아있다. 한 철을 지내는 철새도 자기자리를 그렇게 지키려 했는데, 빛과 소금으로 세워주신 세상 속 우리의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점점 사라지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새벽호수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자 누구인지?

마음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믿음이 매우 깊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도 그를 보고 몹시 기뻐할 정도였다. 그는 대단히 거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대하되 그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았고, 사람의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의 깊은 곳을 살폈으며, 누구를 만나든 그를 용서했고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천사가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에게 보내셨다. 무엇이든 청하기만 하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친히 치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천사들의 일입니다."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될 테니까요."
"그러면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하느님의 은총을요. 은총만 있다면 저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안 된다. 어떤 기적을 원해야 한다. 안 그러면 한 가지를 억지로라도 떠맡겨야겠다."
"정 그러시다면 이걸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결정이 되었다.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그가 그 그림자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조건으로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샘들이 다시 솟고, 삶에 지친 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감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해 수많은 은총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는 잊혀진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소원은 충분히 성취가 되었다.
마지못해 구하였던 마지막 은총, 있을 곳에 말없이 있어 모든 것이 넉넉해지는 은총이야말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꿈이 아닐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간절한 꿈이 아닐까?
시골에서 목회를 하면서 몇 년간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다. 이웃들의 마음을 배울 겸 시작한 일이었다. 농사래야 대단할 것이 없어 그저 흉내 삼아 따라 한 농사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두어 해 하다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느새 쑥 자라 있는 잡초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알게 된 우리의 옛말이 있다. '상농은 땅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잡초를 가꾼다'는 말이다. 잡초와 씨름을 하다 지쳐버린 나는 영락없는 최하농이었다. 내 마음을 크게 붙잡았던 말은 '상농은 땅을 가꾼다'는 말이었다. 많은 곡식을 거두면 그보다 좋은 농사꾼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뜻밖에도 상농은 곡식보단 땅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게 농사꾼만의 이야기일까? 교회가 그렇고 신앙인들의 삶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덩치를 키우고 숫자를 늘이면 사람들은 상농이라 할지 몰라도, 진정한 상농은 땅을 가꾸는 이들이다. 땅을 외면한 채 열매의 양에만 매달리는 이는 진정한 상농일 수 없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좋다. 복음의 실체가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혁명이 일어났건만,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차 대접을 하는구나." 한탄했던 주교가 있다던데,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극적으로 변화된다. 성경을 눈여겨보면 삭개오를 만난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내려 오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속히!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로마라고 하는 나무에서, 부와 지위를 얻기 위해 이웃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삭개오는 나무에서 내려왔고, 예수를 만났고, 자기 집을 찾은 그분 앞에서 새로운 삶을 결단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예수께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 당신을 따르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도 같은 말씀이 아닐까? 내려오라는, 속히 내려오라는!   2005.10.3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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