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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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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1 왜 마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는가?
요즘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소로우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고전으로 자리 잡은 <월든> 때문이겠지만, <월든>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 그의 일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생각을 담기에 일기만큼 좋은 그릇은 없는 것 같다. 수정은 동굴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고 고백하며,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그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일기라고 생각한 소로우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갔고, 성실하게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월든>을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 콩코드 강 월든 숲에 오두막을 짓고 평생을 자연 속에서 산 소로우는 분주하고 번잡한 삶을 사는 도시인들은 감히 생각하기 힘든 깊은 생각들을 마치 우물 속에 긴 두레박을 내려 맑고 시원한 물을 길어 올리듯 그의 일기에 담아냈습니다.
어느 날의 일기(1851.12.30)에는 나무꾼에 의해서 쓰러지는 소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하게 된 소나무를 베는 모습을 긴 일기로 남겼습니다.
두 명의 나무꾼은 높이가 30미터도 넘는, 예전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벌목당할 때 용케 살아남았던 열두어 그루의 나무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인근에서 가장 기품 있는 소나무를 베고 있었던 것입니다.
톱질을 마친 나무꾼은 나무를 더 빨리 쓰러뜨리려고 톱질한 자리에 도끼를 들이댑니다. 마침내 기울기 시작한 소나무는 대번 쓰러지지 않고 20도 가까이 기울어진 채로 15분 정도를 더 버팁니다. 마치 그런 자세를 하고서도 한 세기 동안은 더 버틸 것처럼 가지들은 여전히 바람에 물결치며 있었지만, 마침내는 쓰러지고 맙니다. 아주 위엄 있게, 천천히.
그 순간 소로우는 낭떠러지 쪽 바위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습니다. 나무도 죽을 때에는 신음소리를 낸다는데, 나무가 내는 신음소리를 소로우는 귀가 멍할 정도로 들었던 것이었죠. 톱과 도끼에 의해서 상처를 입고 쓰러진 밑동의 지름이 1미터 20센티나 되는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 그 소나무를 두고 소로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이고 있던 하늘의 공간은 앞으로 200년 동안 비어있으리라. 소나무는 이제 단순한 재목에 불과했다. 나무꾼들은 하늘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다.
-내년 봄에 무스케타퀴드 강변을 다시 찾아올 물수리는 늘 앉던 자리를 찾아 헛되게 공중을 배회할 것이다. 또 솔개는 자신의 새끼들을 보호해주던 고마운 소나무가 없어졌음을 알고 슬퍼할 것이다.
-왜 마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는가? 내 귀에는 아무런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거리에도 숲 속의 오솔길에서도 조문객의 행렬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한 그루의 쓰러짐을 두고서도 ‘왜 마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는가?’를 묻고 있는데, 소나무보다 더한 것들, 우리의 마을과 문화와 얼과 뿌리와 자존심이 곳곳에서 쓰러지는데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 왜 우리의 마을에는 조종이 울리지 않는 것일까요?
2006.4.9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요즘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소로우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고전으로 자리 잡은 <월든> 때문이겠지만, <월든>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 그의 일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생각을 담기에 일기만큼 좋은 그릇은 없는 것 같다. 수정은 동굴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고 고백하며,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그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일기라고 생각한 소로우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갔고, 성실하게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월든>을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 콩코드 강 월든 숲에 오두막을 짓고 평생을 자연 속에서 산 소로우는 분주하고 번잡한 삶을 사는 도시인들은 감히 생각하기 힘든 깊은 생각들을 마치 우물 속에 긴 두레박을 내려 맑고 시원한 물을 길어 올리듯 그의 일기에 담아냈습니다.
어느 날의 일기(1851.12.30)에는 나무꾼에 의해서 쓰러지는 소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하게 된 소나무를 베는 모습을 긴 일기로 남겼습니다.
두 명의 나무꾼은 높이가 30미터도 넘는, 예전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벌목당할 때 용케 살아남았던 열두어 그루의 나무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인근에서 가장 기품 있는 소나무를 베고 있었던 것입니다.
톱질을 마친 나무꾼은 나무를 더 빨리 쓰러뜨리려고 톱질한 자리에 도끼를 들이댑니다. 마침내 기울기 시작한 소나무는 대번 쓰러지지 않고 20도 가까이 기울어진 채로 15분 정도를 더 버팁니다. 마치 그런 자세를 하고서도 한 세기 동안은 더 버틸 것처럼 가지들은 여전히 바람에 물결치며 있었지만, 마침내는 쓰러지고 맙니다. 아주 위엄 있게, 천천히.
그 순간 소로우는 낭떠러지 쪽 바위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듣습니다. 나무도 죽을 때에는 신음소리를 낸다는데, 나무가 내는 신음소리를 소로우는 귀가 멍할 정도로 들었던 것이었죠. 톱과 도끼에 의해서 상처를 입고 쓰러진 밑동의 지름이 1미터 20센티나 되는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 그 소나무를 두고 소로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이고 있던 하늘의 공간은 앞으로 200년 동안 비어있으리라. 소나무는 이제 단순한 재목에 불과했다. 나무꾼들은 하늘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다.
-내년 봄에 무스케타퀴드 강변을 다시 찾아올 물수리는 늘 앉던 자리를 찾아 헛되게 공중을 배회할 것이다. 또 솔개는 자신의 새끼들을 보호해주던 고마운 소나무가 없어졌음을 알고 슬퍼할 것이다.
-왜 마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는가? 내 귀에는 아무런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거리에도 숲 속의 오솔길에서도 조문객의 행렬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한 그루의 쓰러짐을 두고서도 ‘왜 마을에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는가?’를 묻고 있는데, 소나무보다 더한 것들, 우리의 마을과 문화와 얼과 뿌리와 자존심이 곳곳에서 쓰러지는데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 왜 우리의 마을에는 조종이 울리지 않는 것일까요?
2006.4.9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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