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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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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시선-돈詩]
훔쳐가는 노래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 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훔쳐가는 노래’ 부분, 진은영(1970∼)
△ 나에게 매혹되었다면 너는 내 ‘주머니에 있는 걸 다’ 훔쳐야만 한다. 내 모든 걸 훔치고 빼앗을 때 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으리. 시인의 눈에 사랑은 봄에 속수무책인 ‘한그루 자두나무’라면, 자본가의 눈에는 급료 기계에 불과한 ‘여자 가정부’다. 자연론의 관점에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의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이라면, 자본론의 관점에서는 ‘도 박판의 푼돈’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의 돈을 훔쳐간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훔쳐간다. 사랑은 그렇게 자본을 닮았다. 기쁘게 서로의 모든 것을 훔쳐가는 것, 서로를 훔치고 서로에게 훔침을 당하는 것. 그것이 이해든 오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자본론을 공부한 철학도이자 자연과 낭만을 동경하는 시인의, 한없는 사랑 노래다!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시인의 사랑’),
너를 위해 매일매일 네가 훔쳐갈 ‘자줏빛 녹색주머니’ 속 노래를 꺼내줄 텐데….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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