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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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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무에서 유 창조
기억의 창고는 얼마나 큰 것일까요? 얼마나 크기에 그토록 많은 순간들을 켜켜이 쟁여둘 수 있는 것일까요? 기억의 창고는 얼마나 내밀한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물론,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떠올릴 수 없는 것들까지 차곡차곡 쌓아두니 말이지요. 기억의 창고는 얼마나 오래가는 것일까요? 무심한 세월 속 고향의 집 마당에는 풀들이 무성하고 담장과 벽과 기둥 속절없이 무너지건만 마음속 기억은 생생히 남아 있으니 말이지요.
참으로 오래전의 일입니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서울에서 교육 전도사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겨울을 맞아 학생들과 함께 수리산을 찾았습니다. 겨울 수련회를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련회를 가질만한 공간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수리산 자락에 있는 허름한 기도원은 식사 준비와 샤워 등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과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몇 조로 나눈 뒤, 그들에게 각각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과제가 엉뚱하기 그지없었는데, 칡뿌리 캐오기, 개구리 잡기, 파란 싹 찾기 등의 과제였지요.
사방이 눈에 쌓인 산속 기도원, 그런데 찾으라는 것은 칡뿌리와 개구리, 파란 싹 등이었으니 얼마나 난감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서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니 겨울철에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는 더욱 난감했을 터이고요. 그럴수록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푹 자연에 파묻히는 시간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막막해했지만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한 뒤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 숨어 있던 자연의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겨울 해가 짧기도 했지만, 순서가 모두 끝난 것은 어둠이 다 내린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주어진 과제를 가장 먼저 이룬 팀은 개구리를 찾는 팀이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겨울 개구리를 찾지 못한 그들은 눈길을 뚫고 안양 시내까지 나갔고, 한 한약방에서 마른 개구리 한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하긴 그냥 개구리라 했지, 살아 있는 개구리라 하지 않았으니 과제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시내까지 걸어갔다 왔는데도 자신들이 가장 먼저 과제를 마쳤다는 말을 듣고 눈물로 얼싸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날 그 프로그램의 제목은 ‘무에서 유 창조’였습니다. 아무것도 짐작이 되는 것이 없는 무(無)의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합하면 얼마든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 정한 이름이었습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눈 덮인 겨울산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의 더운 입김은 지금도 피어오릅니다. 개구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산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먼 길을 걸어 마침내 개구리를 구한 감격과,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곳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길이 열린다는 깨달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그 시간을 함께 했던 학생 중에 지금까지 소중한 만남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으니, 이래저래 ‘무에서 유 창조’를 한 셈입니다.
한희철 목사 <교차로> 202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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