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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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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맹물과 빈 수레
오 년 전 이맘때 열하루 DMZ를 홀로 걷던 중 ‘평화의 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며칠 무더위에 지쳤기 때문이겠지요. 평화로 가는 길이 어찌 쉽겠냐는 듯 정상 부근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힘에 부쳤는데 바로 그곳에 ‘비목공원’이 있었습니다. 백암산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지키고 있는 십자 형태의 비목을 보고서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쓴 시로 만들어진 노래, 바로 그 ‘비목’(碑木)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녹슨 철모가 환영처럼 얹힌 비목 앞에서 ‘비목’을 부르는 마음은 남달랐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생각하면 언제라도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그분들은 나라 사랑을 말로 하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서겠지요, 세치 혀로 나라사랑을 대신하는 이들을 보면 참 가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을에서 축제를 열기로 하고, 포도주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축제 장소에 큰 포도주 통을 준비해 놓고 한 집에 한 병씩의 포도주를 축제 전날까지 통에 붓기로 했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누구라도 따라 마실 수 있도록 포도주를 모으기로 했던 것이지요.
마침내 축제가 벌어진 날, 마을 사람들이 포도주통에서 포도주를 따라 축배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겠습니까? 포도주통에서 나온 것은 맹물이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은 맹물을 부었던 것이었습니다.
큰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마을을 복구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습니다. 마을 사람 하나가 제안을 했습니다. “흙과 돌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할 터이니 수레가 하나 이상인 사람은 수레 한 개씩을 내놓읍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찬성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제안을 했습니다. “수레를 끌려면 소나 말이 있어야 할 터이니, 소나 말을 두 마리 이상 가진 사람도 한 마리씩 내놓도록 합시다.” 이번에도 모두들 찬성을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허름한 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이 머뭇머뭇 말을 꺼냈습니다. “일을 하려면 먹어야 할 터인데, 닭이 두 마리 이상인 집에서 한 마리씩을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제가 기르는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내놓겠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갑자기 조용해졌고, 아무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수레를 두 개 이상 가진 사람도 없었고, 소나 말을 두 마리 이상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집에서는 닭을 서너 마리씩은 기르고 있었습니다.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배는 혀로 말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말 없는 희생은 바위산처럼 무겁습니다. 하지만 말뿐인 희생은 검불처럼 가볍습니다. 아무리 말을 그럴듯하게 해도 말뿐인 희생과 사랑은 맹물과 빈 수레일 뿐입니다. 맹물로는 축제를 열 수가 없고, 말로 만든 빈 수레로는 돌멩이 하나 나를 수가 없습니다.
<교차로> 202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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