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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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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아이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야누시 코르차크, 그의 이름을 마음에 씁니다. 잊지 말아야지, 공들여 한 자 한 자 씁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 그런 만큼 ‘그’라 쓰는 대신 ‘코르차크’라 쓰기로 합니다. 코르차크의 이름이 익숙해질 때까지, 코르차크의 삶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말이지요.
1879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코르차크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자 의사요, 문학가였습니다. 코르차크는 1905년 당시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군에 군의관으로 징집이 됩니다. 러일전쟁에 투입된 코르차크는 중국 하얼빈과 선양으로 파견을 나갔는데, 무엇보다도 전쟁의 와중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참상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 코르차크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바르샤바에서 고아들을 구호하는 일을 해온 부부가 코르차크를 불러 고아원 원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시설에 봉사를 하러 오는 코르차크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르차크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코르차크와 아이들에게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코르차크의 나이가 61세였을 때입니다. 고아원 주위로도 폭탄 소리가 이어졌고, 마침내 나치는 바르샤바를 점령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집단 거주 지역인 게토로 몰아넣었습니다. 코르차크와 고아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코르차크는 백방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 코르차크를 존경하던 한 사내가 코르차크를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했습니다. 코르차크가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도록 위조 신분 서류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코르차크는 대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최대한 숨겨보겠다는 말을 들은 코르차크는 아이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이 최선이라며 자신만을 위한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1942년 나치가 게토의 고아원을 찾아옵니다. ‘멸절의 장소’라 불리는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끌고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코르차크의 말을 따라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는 코르차크를 따라갔습니다. 주변에서는 사정없는 채찍질이 난무했지만 190명의 아이들만큼은 묵묵히 줄을 맞추어 걸었습니다. 그때 한 독일 장교가 코르차크에게 쪽지를 건넸습니다. 신호를 주면 코르차크를 행렬에서 빼주겠다는 쪽지였습니다. 하지만 코르차크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흔들며 쪽지를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끝내 코르차크는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가 아이들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렴. 아저씨는 너희들과 함께 갈 거야, 그곳이 어디든지.”라고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코르차크는 끝까지 지켰습니다.
유네스코는 1979년을 ‘어린이의 해’이자 ‘야누시 코르차크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1979년은 코르차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죽겠습니다”라는 코르차크의 음성이 메마르고 무정한 이 사회 속에도 천둥소리처럼 울렸으면 좋겠습니다.
<교차로> 202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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