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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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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4-972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1
새야, 네가 앉아 있는 푸른 풀밭에 나도 동그마니 앉아 있을 때, 네 조그만 발자국이 찍힌 하얀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 때 나도 문득 한 마리 새가 되는 느낌이란다.
오늘은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네가 떨어뜨린 고운 깃털 한 개를 주우며 미움이 없는 네 눈길을 생각했다. 지금은 네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주운 따스하고 보드라운 깃털 한 개로 넌 어느새 내 그리운 친구가 되었구나.
넌 이해할 수 있니? 늘 가까이 만나 오던 이들도 어느 순간 왠지 서먹해지고, 처음 대하는 이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처럼 정답게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말이야.
네가 무심히 흘리고 간 한 개의 깃털이 나의 시집 갈피에서 푸드득 날개소리를 내듯이 내가 이 땅에 흘려 놓은 시의 조각들이 어디선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아니 하늘로 영원히 오르기 전에 사랑하는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이미 새가 될 수 있다면... 너를 조용히 생각하는 오늘밤은 나의 삶도 더욱 경이롭게 느껴져 잠이 오질 않는구나.
내 삶의 숲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보물들이 너무 많아 나는 내내 콩새가슴으로 설레이는구나.
2
해질녘, 수녀원의 언덕길과 돌층계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내 마음에 새가 되어 날아드는 어린 시절의 동무들. “나하고 놀자” “소꼽놀이 하자”고 불러내던 눈매 고운 소녀도, 학교 갈 때면 내가 보고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우리 동네 쪽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얘기했던 마음 어진 소년도 수평으로 앉아 있다가 파도 모양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오네. 깊은 뜻도 잘 모르고 전에 자주 되풀이했던 그립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이젠 너무 오래 안 듣고, 안하고 살았더니 문득 어린 시절의 동무들이 날아와 나를 부르네
3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 가슴에 내려앉아 하늘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모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4
1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높은 담장 안에서 자유를 그리며 라면 박스로 만든 서가에 <꽃삽>이란 나의 책도 꽂아 두고 본다는 대철의 글을 약간은 슬프게 새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오늘은 한 주일 동안 쌓인 빨래는 하는 날. 우중충한 세면장에 덩그라니 혼자 앉아 양말을 빨고 있는데 창 밖에 웬 참새소리가 그리 요란한지. 재잘재잘재잘... 하도 시끄럽길래 일어나서 내다보았더니 잎이 파란 삼나무 한 그루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놈들이 그 안에 숨어서 지절거리는 것이겠지요.
갑자기 한 놈이 후두둑하고 튀어나오더니 십여 마리가 뒤따라 나와 저쪽 취사장 쪽으로 날아가 버리데요. 재잘재잘하는 여운만 남겨 놓은 채.
문득 `살아갈수록 가볍고 싶은데 살아갈수록 내가 무겁구나` 하는 수녀님의 새에 대한 단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새처럼 가볍게 지절거려 본 일이 또 지절거림을 들어 본 일이 얼마나 되었던가요? 밖에서였더라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이나 받았을 조잘거림이 왜 이리 그리운지요. 기분 같아서는 누군가 옆에서 하루 종일 조잘거린다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꽤 무거운 저는 오랜 격리생활 때문에 더욱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아, 새처럼 공기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5
비 내리던 오늘 아침. 미사와 기도시간 뒤에도 종다리의 노래를 들었다. 빗속에 듣는 새소리는 더욱 잊을 수 없다. 참으로 밝고 명랑한 새들의 합창을 들을 때면 사소한 일로 우울하고 어두웠던 내 마음을 훌훌 털고 이내 명랑해져야겠다는 의무감마저 생겨 새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보낸다.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부르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얼마나 멋지고 흥겨운지
6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숨겨져 있는 동심과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들로 여겨져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장욱진 화백의 회고전에 다녀왔다는 석영이란 독자가 특별히 나를 생각해서 보내 준 화집을 나는 요즘 거의 매일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까치` `비상` `나무와 새` 등등 그의 그림에 많이도 등장하는 새들의 모습에서 난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다. 새가 그려진 엽서. 달력, 우표, 손수건 그리고 아름답고 멋진 그림들을 몇 개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자로구나
7
까치들은 잘 보이는데 참새는 전보다 흔치 않아서인가 워낙 작아서인가 마음먹고 보아야 눈에 뜨인다. 참새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으로 오규원님의 도시 `참새`를 큰 소리로 읽고 싶어진다.
그 맑고 쨍한 소리를
짹짹짹 그 소리를 동그랗게 찍어내는 노오란 주둥이
참새가 귀여운 건
그 노오란 주둥이 때문이다.
간지럽게 귓바퀴를 맴돌다 가는
포르르 날아가고 오는 그 소리
참새가 귀여운 건
간지러운 그 소리 때문이다.
나뭇가지에 기우뚱하며
간신히 앉고도 시침을 딱 떼고
점잖게 앉은 모습
참새가 귀여운 건
그 아찔하고
장난스런 얼굴 때문이다.
8
나는 늘 새가 있는 언덕길을 지나 아랫집 일터로 간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지만 새들이 자주 오르내려 더욱 아름답고 정겹게 느껴지는 수녀원 언덕길을 벌써 30년이나 오르내리며 나는 참으로 고운 새들을 많이 만났다.
가슴을 볼록 나오고 다리는 아주 가느다란 조그만 새들. 앙증맞고 어여쁘다 못해 그 작은 모습이 가끔은 안쓰러워 보이던 새들에게서 나는 삶에 힘이 되는 꿈과 노래와 기도를 배웠다. ⓒ이해인(수녀) <사랑할 땐 별이 되고/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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