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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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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물꼬 살피고 돌아오는 길, 종아리는 절반쯤 흙물에 젖어 브론즈 동상처럼 반질거린다. 검정 선글라스를 쓴 채 독재를 일삼던 박장군 시절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내는 오월 계엄군이 국도를 막고 만행을 저지르던 날, 선녀 옷을 서랍에서 몰래 꺼내 하늘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부터 혼자 살게 된 영감님은, 혼잣말 혼잣소리가 능숙하다. 오늘도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들길을 걸어서 오는데, 턱밑까지 다가가 들어보니 그건 말이 아니라 노래였다. 영감님의 최신곡은 나훈아, 남진이고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동백 아가씨, 섬 처녀… 전자동 노래테이프로 아가씨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게 서너 소절 뽑을 즈음, 어디서 나타났나 소쩍새가 후렴구를 맞받으며 멋들어진 듀엣곡을 선사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문패가 달린 집에 실려 가기 직전까지, 영감님은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이라고 적힌 깨복쟁이 친구네 구멍가게에 들르기로 작정하였다. 갈 때마다 시원한 냉수 일잔 얻어 마신다. 어름치며 쉬리, 열목어들도 영감님처럼 꿀꺽꿀꺽 물을 좋아라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 돈 아까워 맥주는 못 사먹고, 물 한잔으로 갈증을 달래고 앉았으면 누구 한사람 술 사줄 동무가 걸리기도 하는 날이 있다. 그날은 왕재수가 좋은 날이다. “더웅게 선풍기 좀 틀어봐.” “근지렁게 요짝 등 좀 긁어봐.” “심심항게 노래 조깐 틀어봐.” 주문도 참 가지가지. 그런데 오늘은 거미줄을 길게 쳤는데도 아무도 걸리지 않는구나. 말뚝처럼 앉아 있다가 일어섰더니 우드득 뼛소리가 노래만큼 우렁차도다.
누거만년 살 것이 아니라서 애틋한 마음으로 쓸고 닦고 하다가 술잔 비면 물 따르고 개구리보다 힘있게 노래를 부르는 영감님의 함석집. 아스팔트는 그치지 않는 차량으로 기나긴 비명소리, 달리아꽃만큼 키 큰 읍내 아파트와 불빛은 자욱한 소음만 같다. 그런데 여기 세칸짜리 녹물 흐르는 함석집에선 영감님의 주옥 같은 뽕짝 메들리가 오밤중까지 단독공연 중. 오! 그는 내가 아는, 또 한 사람 진정한 가수다.
<글·그림|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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