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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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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19 <物과 나눈 이야기들/민들레교회이야기454>에서
19.빈의자
성공회대학교 외래강사 휴게실에는 나무의자 다섯 개가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쓸쓸하다.
"빈 의자야. 너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자꾸만 쓸쓸해지는구나. 너는 그 모양으로 시방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거냐?"
"........."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사람만 빼놓고 모든 사물이 말을 아낀다. 아니다. 그들이 아끼는 것은 말이 아니라 고요함이다. 그래서 늘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따라서 말 없이 빈 의자를 바라 본다. 세상이 문득 사라지고 나 혼자 여기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
"........."
"........."
"쯧쯧......"
의자가, 아니 의자에서 누군가가, 혀를 차는 것 같다.
".........?"
"쓸쓸한 것은 자네 감정일 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네는 나를 빈 의자라고 부르네만 나는 비어 있는 존재가 아닐세."
의자가 말을 계속하지 않아도 그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의자는, 그의 말대로, 비어있지 않다. 오히려 가득 차 있다. 의자에는 빈틈이 없다. 의자의 부품(部品)을 열거하자면 여러 십 개쯤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부품들은 '의자'가 아니다. 등받이도 다리도 방석도 의자가 아니다. 의자는 의자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의자 아닌 것들이 모여 의자가 되었다. 그러니 양(量)으로 보나 질(質)로 보나, 의자는 의자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물도 있고 공기도 있고 불도 있고 흙(금속)도 있는데 그것들은 의자가 아니다. 의자에는 의자 아닌 것들이 모두 들어있다.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다. 오직 의자만 없다.
의자는 의자의 비어있음(空)이다. 아하, 그래서 색시공(色是空)이로구나! 그러나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보라, 저 의자 하나에 우주 만물이 들어있지 않는가? 그래서 공즉색(空卽色)이다.
"그래서 어쨋단 말인가? 나의 쓸쓸한 감정이 내 속에 있는 나의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네가 불러내지 않았느냐?"
"천만에 말씀! 나는 자네한테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네. 언제까지 남에게 탓을 돌리는 낡은 버릇에 묶여 있을 참인가?"
"........."
"쓸쓸한 자네 감정에 대하여 나는 책임도 없고 할 말도 없네만,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는 해주고 싶군."
"쓸쓸한 감정을 축하한다고?"
"아니,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을 축하한다는 말일세."
".........?"
"자네가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가? "
쓸쓸한 느낌은 거기 그냥 그렇게 두고,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바라 본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나의 비어있음(空)이요 나 아닌 것들의 차 있음( )이다. 이 쓸쓸한 감정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면서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나그네로 가득 찬 주인이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 조화(調和)인가?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
"자네는 나보고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었네만, 이제 알겠나?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네."
"'........."
"내가 누구를(무엇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내 속에 채워져야 할 빈틈이 있다는 말일세. 그러나 내가 나로서 이미 충만한데 새삼 누구를 기다린단 말인가?"
"........."
"자네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
"자네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린다면, 잘 보시게. 그 누군가(무엇이) 자네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요즘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라지? 그러나 아기 예수는 이미 자네 속에 잉태되어 있는데, 어디에서 오는 그를 기다린단 말인가? 자네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린.다.면, 자네는 영원토록 그(것)을 만나지 못할 걸세. 없는 대상을 어찌 만날 수 있겠나? 잘 보라구. 자네 눈에는 이 사람이 안 보이는가?"
그때, 잠깐 시간의 커튼이 걷히고 나는 보았다. 의자에 앉아 얘기를 하고 책을읽고 눈을 감은 사람의 모습을! 그렇다. 거기 의자 위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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