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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이현주 이현주............... 조회 수 2170 추천 수 0 2001.12.29 22:02:47
.........

이현주20 <物과 나눈 이야기들/민들레교회이야기455>에서

 

 

20.가위

 

"한 해가 저물어간다. 무슨 할 말 없느냐?"
"꾸물거릴 것 없지. 잘라버리게."
"무엇을?"
"자네가 과거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과거란 본디 없는 것 아닌가? 없는 것을 어찌 자른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과거'를 자르라 하지 않고 '자네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을 자르라고 하지 않았나?"
"요컨대, 내 마음을, 생각을, 자르라는 말이군?"
"마음을 자르고서야 어찌 사람이 살겠나? 좀 더 쉽게 말해주지. 지난날 자네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어두운 마음 또는 지난 날 자네가 이루어 놓은 성과(成果)에 대한 흐믓한 마음 따위를 지워버리라는 얘길세."
"그것들이 제멋대로 남아 있는데 내가 어찌 그것들을 지울 수 있겠느냐?"
"그것들이 제멋대로 남아 있게 버려두니까, 나아가서 자네가 그것들의 힘을 북돋아주니까, 지워지지 않는 것일세."
".........?"
"집에 도둑이 들었네. 아무도 완력으로는 그를 쫓아버릴 수 없어. 자, 그를 어떻게 하겠는가? "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겠다."
"바로 그걸세. 과거의 성과(成果)를 돌아보며 우쭐해지는 마음, 과거의 잘못에 사로잡혀 주눅드는 마음,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그것들을 바라보시게. 그것이 자네가 '과거'리고 부르는 것을 잘라버리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네. 만일 자네가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억누른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네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들의 힘을 북돋아주어 더욱 신나게 도둑질을 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뿐일세."
"그것들이 어째서 도둑이냐?"
"도둑도 아주 굉장한 도둑이지."
".........?"
"자네의 진짜 보물인 '오늘, 여기'를 훔쳐가지 않던가?"
"옳은 말이군!"
"한 해가 저문다는 말은 한 해가 밝아온다는 말이기도 하지."
"........."
"밝아오는 해를 맞아, 한 마디 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꾸물거릴 것 없네. 잘라버리게."
"무엇을?"
"미래에 대한 설계와 함께 염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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