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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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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29 <物과 나눈 이야기들/민들레교회이야기464 >에서
29. 찻 주전자
물을 넣고 끓일 수는 없지만 끓는 물을 부어서 쓸 수 있는 찻주전자. 사람 몸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조화(造化)로 이루어진 물건이다.
서재 한 구석에 놓여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에 온 뒤로 한 번도 제 구실을 못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할 것 없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물(物)은 내 마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이 대로도 나는 대 만족이라네."
"주전자가 주전자 구실을 못해도 만족이란 말이냐?"
"자네가 말하는 그 '주전자 구실'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가?"
"차(茶)를 우려 마실 때 더운 물을 담는 것이지."
"좋아,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한다는 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않을 수도 있나?"
"있고 말고..."
"예를 들어 보시게."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살아간다네."
"그러면 그가 짐승으로 되는가?"
"아니, 그냥 짐승처럼 살아가는 거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 모양을 한 짐승이 아니라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이겠지."
"그렇지."
"따라서, 그도 결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세."
"그건 그렇군."
"주전자도 마찬가질세. 자네는 골동품 가게나 박물관에 가 보지 않았나? 거기 있는 주전자들은 시방 자네가 말하는 '주전자 구실'을 하고 있지 않네. 그래도 그들은 훌륭한 주전자로서 떳떳하고 만족스런 실존(實存)을 경험하고 있는 중일세. 나 또한 마찬가지야. 자네가 나를 찻주전자로 쓰든 방 한 구석에 놓아 먼지나 뒤집어 쓰게 하든, 그건 자네 일이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지.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엔가 쓰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쓸데 없이 괴로워 하고 있는 것 같네. 사실은 말씀이야, 남이 나를 사용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일세. 나는 이 모양으로 존재하는 동안 내 나름으로 재미있게 세상 구경을 즐기고 있다네. 그러면 됐지. 내가 무엇 때문에 뜨거운 물을 속에 담지 못하여 안달을 한단 말인가? 알겠나? 나는 사용되기 위하여 태어난 몸이 아니라네."
"사람이 너를 만들 때는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냐?"
"그건 사람들 일이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일세. 물론 지금 당장 자네가 말하는 '찻주전자 구실'을 하게 돼도 역시 나는 대만족일세."
"나도 너처럼 언제 어디서나 만족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데, 사람은 주전자가 아니라서 그럴수가 없구나."
"그것 참, 안 됐군! 주전자를 만든 사람이 제가 만든 주전자만도 못해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나?"
"........."
"한 마디만 더하지. 충고(忠告)로 들어도 좋아. 누구한테 쓰임을 받으려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게나. 창밖에 내리는 비한테 물어보시게. 너는 지금 누구한테 무슨 쓸모가 되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느냐고. 부디, 자네한테 지금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만 사시게. 지금 자네가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살 수 있네. 그렇게 날마다 그날 하루만 사시게나. 무엇보다도 자네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하는 말일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네가 늘 말하는, 자연법(自然法)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天命)을 좇아 살아가는 삶 아닌가?"
ⓒ이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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