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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도 얼싸 안는데

임의진 임의진............... 조회 수 2044 추천 수 0 2001.12.23 14: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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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작은이야기 2000.2월호

눈사람도 얼싸안는데


1
시방 밖은 온통 흰 눈세상이다. 잠깐 흩날리다 그칠 자국 눈 정도로 알았는데, 나무와 나무가 스 치는 소리가 잦아지더니 결국 거친 눈보라가 몰아 쳐왔다.
연일 감나무 가지에 앉아 내 일상을 향해 눈길을 두어쌌던 상딱새가 소식 없이 종적을 감출 때에는 짐작했어야 할 한파였다.
하루아침 상간으 로 뜨락의 가시 엉겅퀴도 눈더미에 파묻혀 보이질 않고, 전나무와 호랑가시나무는 눈꽃 봉오리가 송 올송올 영글어 햇살 없는 겨울 한낮을 밝히고 있 다.
어젯밤에서야 보니 만년필에 쓸 잉크도 바닥나 없고 새벽 명상 때 켤 초도 다 떨어져 오늘은 읍내 에 꼭 나가야겠는데, 도로가 빙판이라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수북이 쌓인 함박눈이 싫지가 않다. 강아지나 아이들처럼 눈만 내렸다 하면 마냥 즐겁고 반가운 나는, 아무래도 나이를 헛먹은 모양 이다. 눈이 내린 날은 아침이 바쁘다.
먼저 간밤에 식 은 온돌방에 장작을 지펴야 한다. 한나절 글이라도 몇 줄 쓰고 책이라도 몇 쪽 읽으려면 아랫목을 따 습게 데워놓아야 한다. 눈은 내리기 전만 그렇지 오히려 내린 이후는 날씨가 푸근한 법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오죽 자발머리 없던가. 눈을 보고 난 다음은 마음마저 불불하여 추위가 뼛속까지 파 고드는 것만 같다.
그 마음을 달래줄 참으로라도 장작개비를 서너 개 더 웃던져 넣어야 한다.
평소 아침 식사는 밥을 들지 않고 미숫가루나 찐 고구마 를 과일과 곁들여 가볍게 먹곤 하는데, 요즘은 단 물이 줄줄 흐르는 해남산 물고구마를 아궁이 숯불 에 구워먹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비지땅'이라고 부르는 부지깽이로 벌건 숯을 뒤적이고 그 속에 잔 칫날 쓰다 버린 알루미늄 일회용 접시에 고구마를 잘 싸서 던져두면 껍데기 한 군데 타지 않고 고스 란히 잘 익는다.
그렇게 고구마를 아궁이에 맡겨두 고 다음 할 일을 찾아 나선다.

2
털장갑을 꺼내어 꾹꾹 눌러 꼈다. 예배당 현관으 로 들어오는 길과 목사관으로 이어지는 모퉁이 길 에 쌓인 눈을 쓸고 모래라도 조금 흩뿌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젊은 나야 미끄러지며 눈길을 걷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허리가 굽은 노모도 집에 계시고 교우들이 모두 노년층인지라 혹여 예 배당을 찾으시다가 낙상할까 염려스러워 그리 하는 것이다.
이런 날을 고대하며 진작 널빤지를 또닥거려서 눈삽도 만들어놓았다. 삽질도 하고 빗자루로 쓸기 도 하면서 두세 사람 족히 다닐 만한 길을 냈다.
일을 다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갓길로 내버린 눈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저렇게 천대받으려고, 버림받 으려고 내린 눈은 아닐 것이라 싶었다.
'어깨춤!(내 아호) 오랜만에 눈사람을 한번 만들 어보는 건 어때?'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다난하게 보낸, 추억 속의 내가 가슴속에서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거 한번 좋은 생각이었다.
곧바로 나는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눈 덩이를 만들고 그보다 작은 눈덩이를 굴려 층이 되 게 세워 올렸다.
남은 눈도 많기에 눈사람 하나를 더 만들고 서로 몸이 붙게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검은 숯을 가져와 이목구비를 만들어 붙였다.
둘 다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은 보기에 안쓰러울 것 같아서 눈사람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도록 해주 었다.
이왕 하는 김에 나뭇가지에 눈살을 붙여 긴 팔을 붙여주고 서로 끌어안게 했더니 보기에 그렇 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끝으로 등을 서로 매만지 는 모양을 한 뭉툭한 손까지 붙여주었다. 태평양 어느 섬의 부족들처럼 콧등을 비비며 인사를 하는 두 눈사람, 그 다정한 모습에 미소를 베어물지 않 을 이가 없을 것 같았다.
계속 영하의 날씨라 눈사람은 오늘까지 녹지 않 고 있다.
오가는 행인들을 흐뭇하게 해주고 있는, 껴안고 있는 눈사람을 만들기를 참 잘했다.
"우리 목사님은 언제서야 철이 드실랑고." 어머니만 한숨 을 폭폭 내쉬지만, 내 앞에서만 그러는지 모르겠으 나 눈사람을 본 이들마다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말 씀들을 하셨다.
방학 첫날부터 볼이 트도록 쏘다니고 있는 초등 학생 정훈이랑 지훈이 형제가 예배당 앞길을 지나 다가 눈사람을 보고 달려왔다.
나는 지훈이를 껴안 고 얼굴을 비벼댔다.
"수염 땜에 따갑당게요." 도 리질을 친다.
"저 봐라. 눈사람도 얼싸안는데." 그 랬더니 "눈사람은 수염이 없잖아요."
턱을 내밀며 대꾸다. 요 귀여운 것, 한번 더 끌어안고 수염 턱 을 마구 문질러댔다.
"살려줘-어!"
비명 끝에서야 놓아주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절친한 이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면 악수보다는 '얼싸안기'를 한다.
보듬고 등을 만지면 너와 내가 하나임을 자각케 된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살아도 우리는 하나임을 잊지 말자는 기원의 행사로 그리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손은 악수하는 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 만 나는 그보다 얼싸안고 등을 어루만지는 손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희망적인 손이라 고 여긴다.
얼싸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격려 하고 관용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크게 달 라질 것이라 믿는다.
저 눈사람은 다시 본디처럼 물이 되어, 하나가 되어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 어 신(神)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벗들이여! 살아 있는 날 동안 어리석게도 미워하지 말 일이다.
얼싸안고 사랑하며 사는 일에만 오직 정진하고 매진하자.
하물며 우리집 눈사람도 얼싸 안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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