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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요령잡이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27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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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891.요령잡이


잊혀진듯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랫작실 음달말 언덕배기, 폐가처럼 시커멓게 선 흙벽돌집. 계절에 상관없이 겨울잠을 자듯 방안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올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상노인네도 일하러 다니는 판에 그래도 젊은 축에 드는 사람이 방안에 틀어 박혀 꼼짝을 않는다고 모두들 욕을 하지만, 욕도 자꾸 하다보면 싱거워지고 더군다나 말대꾸가 없으면 제풀에 지치고 마는 법, 누가 뭐라 하든 그는 대꾸가 없습니다.
집안에서 빈둥대는 것 말고 또 한가지 특별나게 욕을 불러들이는게 그에겐 또 한가지 있는데 다름아닌 주사입니다. 흔한 술에 술만 마셨다 하면 노래에 고함에 동네가 시끌해 집니다.
삼년전인가 한겨울엔 술을 먹고 논배미에 쓰러져 잠이 들어 양쪽발에 시커떻게 동상이 걸린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사람들은 '싸다, 싸' 그랬지 누구하나 마음으로 부터 동정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똑바로 걷는 모습보다는 비틀대는 걸음새에 더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박종구씨. 환갑 지난 박 종구씨는 그렇게 살아 갑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박종구씨를 아주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쓸모있는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박 종구씨의 기억력은 대단합니다. 마을 사람들 생일은 물론 죽은 사람들 제사날을 그는 환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구, 내일은 또 누구. 언제 한번 틀리는 적이 없습니다.
식구들은 놓치고 헛갈리고 해도 박종구씨의 기억은 틀림이 없습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박 종구씨는 또한번 자기 몫의 일을 찾게 됩니다.
상여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주는 요령잡이가 그의 몫입니다. 도맡아 요령잡이 해 오던 상희 아버지가 이사를 떠난 후 자연히 그 일은 박종구씨 몫이 되었고, 적당히 취해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주는 그의 모습속엔 얼핏 자긍심까지 배어납니다.
요령잡이의 일은 회닫이까지 이어져 그날 하루 그의 몫은 어느샌지 빼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욕도 먹고 무시도 당하고 잊혀진듯 살아가는 아랫작실 언덕배기 박종구씨.
그는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얘기마을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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