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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서글픔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76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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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642.서글픔


아침 일찍 작실서 걸려 온 전화, 박수철씨가 밤새 위독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뇌졸증으로 쓰러진 이래 그래도 아주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더 이상의 악화 없이 잘 지내왔는데 간밤에 증세가 갑자기 악화됐다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아 가까이 사는 친지들이 두 차례나 모였을 만큼 어려운 밤을 보내곤 날이 밝자 급히 병원으로 모시려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체인을 감았지만 차는 쉽게 미끄러졌다. 위험한 길이지만 어쩌랴. 사람이 급한걸.
박수철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둘째 아들을 태우고 막 떠나려는데 웬 할아버지가 같이 가자며 차를 세운다. 앞에 탔던 아주머니가 얼른 자리를 뒤로 옮기길래 집안 어른 되시는 줄 알았다.
차는 미끄러지고 아저씨는 뒤에서 괴로워하고, 양아치 재를 넘어야하는 귀래길이 위험할 것 같아 문막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꼬불 꼬불,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그런데도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는 그런 것엔 아랑곳도 없이 줄기차게 당신 얘기를 이어갔다. 알고 보니 동네에 산수유를 사러왔다가 금이 안 맞아 그냥 나가는 노인네였다.
얘기를 듣다 말고 난 노인께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마침 그날 아침 식사를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인 집에서 대접을 잘 받았는데, 얼마나 먹었는지(‘드셨는지’가 맞을테지만) 연신 트름을 ‘끅끅’해가며 기껏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 다녀보면 농촌이 도시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산다’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동네에 들어온 노인이 있어 정성으로 대접을 했더니, 허구헌날 매번 그렇게 먹는 줄 알았는지 영 엉뚱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가뜩이나 길 때문에 날카로워진 심사를 노인네가 벅벅 긁었다.
“사람들이 정부 말은 안 믿어두 시골로 산수유 사러 다니는 할아버지 얘기는 믿을 텐데, 시골 다니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할아버지는 맨날 부잣집으로만 산수유 사러 다녔어요? 한철 쉬는 겨울에만 잠깐 들어와 보지 말구 한참 일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나 좀 와 봐요. 그래도 그런 얘길 할 수 있나요?”
노인에게 화를 내다니, 못된 짓임을 알면서도 된통 분을 쏟아내고 말았다. 저런 예길 들으니 생각 짧은 사람들은 농촌사람들이 배불러서 죽는 소리들을 한다고 괜히 농촌사람들만 욕하게 되는 것 아닌가.
문막을 지나 동화로 접어들 때 길이 막혀 버렸다. 줄줄이 늘어선 차들이 꼼짝을 못했다. 마주오는 차에게 물었더니 언덕 너머 사고가 나 시간이 걸릴 거라 한다. 난감해 하고 있는데 도로 옆 샛길로 차 몇 대가 빠져 나온다. 마침 아는 면직원이 그 길로 나와 물었더니 그 길로 돌아서도 원주를 나갈 수 있다는 대답이다.
막상 샛길로 들어서고 보니 그 길은 경운기나 다니는 좁고 험한 농로였다. 북북 차 밑을 긁으며, 논바닥 아래로 차가 구를까 조바심을 치며 산모퉁이 길을 한참 돌아가고 있는데 노인의 말이 또 마음을 상하게 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 어떤 사람은 아픈 사람에게 손만 얹어도 병을 고치던데, 목사라는 사람이 기도로 고치지 왜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냐는 얘기였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전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요, 할아버지”
한참 만에, 그 말 밖에 못했다.
왠지 서글펐다. 할아버지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의 답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빙판 길을 빙빙 돌아 어지럽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어둔 길, 칙칙한 삶의 빛깔, 노인네 눈에 답답하고 딱하게 보인 내 삶이 스스로에게도 크게 다르지만은 않아, 웬지 차오르는 서글픔. (얘기마을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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