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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설경(雪景)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93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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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211.설경(雪景)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문을 나서다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밤사이 내린 눈이 여간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두 발짝 걸어보니 움푹움푹 발이 빠졌습니다. 책을 내려놓고 숨이 차도록 비질을 해서야 겨우 교회 마당에 좁다란 길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새벽종을 작은 소리로 쳤습니다. 왠일인지 그러고 싶었습니다. 내린 눈에 발목이 묶여 종소리가 멀리 못 간 탓인지 한참을 기다려도 교우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계단에 앉았다 밖으로 나와 교회 현관에 섰다가 내리는 새벽 눈에 흠뻑 취하고 말았습니다. 뒷동산 나무에 쌓인 눈이 붉은 네온 십자가 불빛을 받아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잎새 모두 떨군 빈 가지에도 용케 눈은 푸근히 내려앉아 가지마다 눈꽃을 피웠습니다.
 빨려들 듯 쏟아지는 눈송이들, 정겹게 재잘대는 하늘의 언어. 높낮이가 사라진 채 하얀 단색으로 덮이는 대지들.
 왠지 마음도 그 땅에 누워, 벌떡 드러누워 빈틈없이 눈을 맞고 싶어집니다. 아니 빈 몸뚱아리만 현관에 세워둔 채 마음은 이미 그렇게 드러 눞고, 마음은 이미 미친 듯 눈 속을 달립니다.
 다시 재우면 다시 잠들, 일찍 깬 딸 소리를 안곤 밖으로 나옵니다. ‘이게 눈이란다. 이런 게 눈이란다.’ 어린 딸의 마음도 쏟아지는 눈 따라 화들짝 열리기를 기도하듯 빕니다. 눈이 신기한 아기 웃음이 깨끗하고 예쁩니다.
 뒤따라 나온 아내가 눈 속 신이 난 날 보고 강아지같다 합니다. 그 말이 유쾌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뒷동산 매달린 스피커에선 방송이 계속됩니다. 막힌 길을 뚫어야 한다며 한 집에 한 명씩 넉가래 들고 나오라는 반장님의 방송입니다. 참새가 시끄러운 방앗간 앞에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드문 눈이 왔다고 입을 모읍니다. 눈에 녹아 설록차라 하며 따뜻한 커피를 권합니다. 눈맞으며 마시는 차의 맛이 각별합니다. 내린 눈이 찰눈이라 잘 녹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정월에 눈이 많이 오면 결국은 객수라고 농사일에 빗대보기도 합니다. 빨리 눈 치우고 토끼나 잡으러 가자고, 굳이 노인 되어서도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지만 치워도 치워도 눈이 옵니다. 눈에 덮여 길이 사라지고 길 사라져 하나 된 세상에 다시 길을 만듭니다.
 덕분에 차가 이틀을 쉬었고 동네는 이틀을 갇혔습니다. 어쩌면 눈이 내려 갇힌 게 아니라 그동안 갇혔음을 눈이 가르쳐 준 건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토끼 찾아 산들을 돌고, 집집마다 너끈한 군불에 굴뚝마다 흰 연기 춤을 췄습니다. 그나저나 처마 밑 촘촘히 쌓아 논 장작이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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