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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3. 인간의 한 진면목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4339 추천 수 0 2002.01.02 2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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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1233. 인간의 한 진면목

 

아랫마을에서 환갑잔치가 있던 날, 날이 다 저물어 갈 무렵 박종구 씨가 들렸다. 벌건 얼굴, 흔들리는 걸음, 한눈에 보기에도 술이 과한데 묻지도 않고 사택으로 불쑥 들어섰다.

 “나, 할 말 있어. 우물 판돈 안 줘도 좋아!”

다짜고짜 우물 얘기를 꺼냈는데 아저씨의 이야기는 이미 이야기가 아니라 고함이었다. 

작실 음짓말에 있는 몇 집이 물을 함께 팠는데 박종구씨네 사정 잘 아는지라 교회서 도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돈을 안줘도 좋다니. “우물 파는데 50만원 들었어. 쌍, 50만원 들었단 말야!” 아무리 술김이라도 그렇지 말이 막가고 있었다. 

수도 판 비용을 집집이 나눈 것이 십삼만원, 거기에 포크레인 쓴 비용 얼마 더 들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아저씨는 엉뚱하게 오십만원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 정말 그건 얘기가 아니라 고함이었고 괴성에 가까운 주정이었다. 

방에 아이들이 다 있는데 마루에 앉아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전혀 얘기가 되질 않았다.

“뭐야, 공사가 끝났으면 돈을 줘야 될 거 아냐,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아저씨의 욕은 그대로 담기조차 민망스런 욕은 한참동안 더 계속됐다. 저런 욕도 다 있구나 싶은 상욕을 오물 덩어리 뒤집어쓰듯 대책없이 들어야 했다. 

빚독촉도 그렇게 무섭고 모진 것이 없었다. 돈을 안 줘도 좋다 했다가 오십만원 들었다 했다가 이제 왜 안 주냐고 윽박을 지르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웃을 수도, 참기만 할 수도, 불쌍히 여길 수 만도 없는 일이었다. 멍해졌다. 갑자기 뭐가 쑥 빠져나간듯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이럴수도 있는 거구나, 이게 인간의 한 진면목 (?面目)이구나. 

다음날 포크레인 쓴 비용까지를 포함한 공사대금 이십삼만원을 확인하여 병철씨를 통해 일을 주관한 마을 사람에게 전했다. 전하는 마음이 꽤나 허탈했다. 

그일 뒤로 박종구씨는 나를 보면 어색하게 대한다. 상노인네들도 논으로 밭으로 일 나간 한낮, 읍내 다방 다녀오다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어색하게 먼 산 보고 지나쳐 간다. 군더더기 같은 실망 그래도 버리고 연민으로 대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이르지만 그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얘기마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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