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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빛깔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986 추천 수 0 2003.04.14 1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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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7 그리움의 빛깔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렸다. 살짝 덮인 것을 보니 싸락눈이었지 싶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이미 눈 내린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이 흔했던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눈이 참 귀하다.
거실 책상에 앉아 주보 작업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다 아파트 뒤뜰을 내려다보니 아파트 뜰에도 눈이 내려 있었다. 잠깐 뜰에 내린 눈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그리움이 밀려왔다.
아파트 뒤뜰은 그런 대로 넓은 잔디밭이다. 잔디밭이라 하기에는 토끼풀이 많지만. 독일의 잔디들은 겨울에도 살아있어 녹색의 빛깔을 잃지 않는데, 아파트 뒤뜰 잔디밭에 내린 눈은 잔디의 녹색과 어울려 독특한 빛깔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흰색과 녹색의 유화물감을 뭉뚝뭉뚝 섞어 발라 놓은 듯한, 독특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그리움으로 밀려왔던 것은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쑥버무리였다. 우리가 먹던 떡 중에는 쑥버무리라는 떡이 있었다. 겨울 지나 햇쑥이 막 올라오면 그 쑥을 뜯어 쌀가루나 밀가루에 버무린 뒤 그것을 쪄서 떡을 만들었다. 떡의 모양은 얼기설기 허술했지만 쑥의 향기가 향긋했던 쑥버무리, 잔디와 어울린 눈은 영락없는 쑥버무리의 빛깔이었다.    
이미륵 씨가 쓴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의 끝부분에 보면 독일에 막 도착한 그가 간절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꽈리에 붉게 타는 鄕愁(향수)'라는 제목의 글이다. 천신만고 끝에 낯선 땅 독일에 도착은 그는 날마다 우편국을 찾는다. 고향에서 온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날도 우편국에 들렀다가 헛걸음을 한 채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알지 못하는 집 앞에 멈춰서고 만다. 그 집 정원에는 한 포기 꽈리가 서 있었고, 그 열매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어릴 적 뒷마당에서 흔하게 보았고, 즐겨 갖고 놀았던 꽈리를 독일 땅에서 볼 줄이야!
오랫동안 서서 꽈리를 바라볼 때 집 주인인 부인이 나와 이유를 물었고, 그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들은 부인은 꽈리를 한 가지 꺾어 그에게 준다. 눈이 내리던 날, 그는 떠나온 고국으로부터 맏누이가 보낸 첫 소식을 받게 되는데, 지난 가을 며칠동안 앓으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꽈리 이야기 끝 두어 문장 어머니 별세에 관한 편지 이야기를 덧붙인 채 책은 끝나고 있었다. 붉은 꽈리와 어머니! 어쩌면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국을 떠난 지 고작 일 년여, 뒤뜰에 내린 눈에 하필 기억의 창고 깊디깊은 곳에 묻혀있던 쑥버무리가 떠오른 것을 보면 그리움의 뿌리란 얼마나 깊고도 질긴 것인지. (200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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