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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은둔거사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1161 추천 수 0 2003.12.19 09: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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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3  뻐꾸기 은둔거사

 

'막현호은 막현호미'(莫見乎隱 莫顯乎微)란 옛말이 있다. 중용(中庸) 1장에 나오는 말로, '감추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내는 수 없고, 숨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수 없다'는 뜻이다.
감추고 숨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니, 낯설게 들린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광고가 삶의 질을 지배하는 세상, 심지어는 교회와 신앙인들마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알릴까 고민하는 세대에 감추고 숨기는 것이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일이라니, 뚱딴지같은 괴설로 들린다. 한껏 너그럽게 본다면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일 터이다. 무명하고 빈궁한 자의 게
으른 자기 변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참된 생명은 바로 그런 곳에 있겠다 싶다. 꾸미거나 보태는 마음에 제대로 된 생명이 담길 수가 없겠다 싶기 때문이다. 자연이 자기 스스로를 일부러 드러내거나 꾸미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생명'이란 말 앞에 버젓이 '참된'이라는 말과 '제대로 된'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나를 본다. 그래야 생명이 생명다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이만큼 길들여졌다. 생명은 아무 수식어 없이도 생명인데, 뭔가로 꾸며야 된다고 허투루 생각하는 것이다. 생명까지도 무엇인가로 꾸미려 하다니, 당연한 듯 깊게 뿌리박힌 이  毒을 언제쯤이나 속 시원히 뽑아낼 수 있을까!)
언뜻 '기자불립 과자불행'( 者不立 跨者不行)란 말이 떠오른다. 노자(老子) 24장에 나오는 말로,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부러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일이 한 때는 통할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 한 때를 위해 쥐나는 줄도 모르고, 병나는 줄도 모르고 발뒤꿈치를 들고, 무리한 걸음을 죽자살자 옮기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니 '포곡은사'(布穀隱士)라는 말이 눈에 띈다. 겉으로는 은둔을 표방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거처를 알리는 거짓 은둔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뻐꾸기 은둔거사'라 한단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울어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뻐꾸기처럼, 숨어 삽네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거처를 알리는 어중뜨기 은둔자! 세상으로부터, 세속적인 욕심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자랑하면서도 행여 남이 잊을까 자신의 존재를 알려대는 삶! 나는 남과 다르다고,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고백하나, 그 고백조차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데 사용하는 삶.
그러고 보면 떠버리 광고장이를 지나, 어중뜨기 포곡은사를 지나, 말없이 생명을 담지한 자로 살아가기란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경계가 애매하고 까마득하여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터에 그 선을 맑은 정신으로 분명하게 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 풀에 주저앉아 앉은 곳이 한평생의 삶이 되고 세상이 되는, 우리네 가볍고 가여운 삶이라니! (2003.6.23)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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