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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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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전도사님, 오랜만입니다.
수련목 과정을 거치는 바쁜 시간에 마음을 담아 보내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길이 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메아리처럼 들려주니 고맙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거오재 노오재'(居惡在 路惡在)라는 옛 싯구가 있습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다'는 뜻이더군요. 사실 그 말은 시대와 크게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내면 혹은 삶의 알량한 풍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은 세상에서 누군가의 삶이 내게 길이 된다면, 과분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내 삶이 누군가에게 바른 길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은혜겠지요. 우리의 부족함에도 이런 꿈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얼마 전 주보를 만들며 썼던 '기어가시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불쑥 떠오른 농담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얼마큼은 마음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 가 올라 가 독수리 같이"
(독수리는 태양을 바라보아도 눈이 멀지 않는다 했거늘!)
힘차게 찬송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해 길을 가던 한 신앙인이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누군가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 분이 주님이시라는 걸 신앙인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가 주님을 다 만나다니, 신앙인은 감격하여 주님께 물었다.
-주님, 어디를 가십니까?
-내 길을 간다.
-그런데 왜 그리로 가십니까?
-이 길이 내 길이니까.
-방향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니다. 한없이 낮아지는 것, 이게 내 길이란다.
우리는 매번 주님과 동행한다고, 주님을 따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어느 날 문득 우리의 길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로의 길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당혹스러움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여전히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묵묵히 길을 가는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거꾸로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전도사님, 혹시 안젤름 그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지요? 예전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제직의 모습>, <성서에서 만난 변화의 표징들>이란 책을 참 좋게 읽었으면서도 그의 이름을 따로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책을 만드는 젊은 출판인과 함께 독일 서점을 찾은 적이 있는데, 기독교 코너에 들러보니 가장 앞부분에 눈에 띄게 전시되어 있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안젤름 그륀의 책이었습니다. 대뜸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에 의미 있게 읽었던 책의 저자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저술가라는 것을 미쳐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죠.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니 그는 지금 독일 뮌스터슈바르짜흐 베네딕도 대수도원의 수사신부로 있으면서 많은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1년부터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영적 지도신부로 봉사하고 있더군요. 이미 그의 책이 한국어로도 제법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안젤름 그륀의 책은, 그 중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는 책은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좋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두껍지는 않습니다만, 쉽게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가만 생각에 잠기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에 대해 생각하기 전 '곤궁의 심연에서 나오는 기도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한 장 라프랑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선상에 놓여 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필자는 이 두 길 중 어느 길을 가야 할 것인지 필자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견해를 여러분에게 지금 말하고 싶다. 만약 여러분이 영웅적인 행위와 덕행을 쌓는 것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물론 여러분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선택할 권리를 당연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충고를 하고 싶다. 그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올바로 찾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현재 실질적으로 처해 있는 빈약한 처지의 심연에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길이 두 가지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전도사님은 어느 길이 바른 길이라 생각하는지요?
조금은 장황하게 들릴지 몰라도 책의 내용을 정리해볼까요. 서문에 충분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위로부터의 영성이란 말 그대로 위를 추구하는 영성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이상적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명백한 목표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늘 성장하고 상승해야 합니다. 자기훈련과 기도 등을 통해 목표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항상 더 나아지기를 원하고, 언제나 더 높이 상승하며, 더 채워야 하며, 하느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에서 지켜온 신앙의 자세는 분명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충만, 능력충만, 은혜충만' 등 교회에서 외쳐온 익숙한 구호들 속에는 위로부터의 영성이 추구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벅찬 신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경우 가정과 개인생활을 양보하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경공부, 전도, 봉사, 각종 헌금생활 등 만족할만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힘에 벅찰 만큼 분주해야 자신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을 놀리면 안 된다'는 말은 성공적인 목회와 성장하는 교회를 위한 비결로 목회자는 물론 교인 사이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위로부터의 영성은 신앙의 목표를 제시하며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항복하면서 포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실제 상황을 억압하거나 이상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억압하고, 그 어두운 것을 다른 것에 투영시켜 그것들에 대해 비난하고 격분합니다.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점점 잔인하게 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위로부터의 영성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보이는 한계, 믿음은 좋은데 사람이 못되거나 덜된 경우는 아무래도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한 결과 때문일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느님께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느낌들, 우리의 육체와 이상들, 우리의 상처와 나약함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격정과 분노 등 끊임없이 오고가는 생각과 느낌들, 몸과 마음의 질병, 상처와 아픔, 무능과 실패의 체험,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의 은총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 존재의 폐허 위에 영광된 집을 지으시는 주님을 만나 뵙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길이라는 양극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길은 우리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현실로 내려감으로, 우리의 실패와 무능의 체험을 참된 기도의 장소로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 성서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은 그들의 완전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실패와 무능, 불완전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 앞에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바로 자신 안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보존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지요.
예수가 죄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자비롭고 부드럽게 대한 반면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적인 열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을 더 찾고 있었고,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이들은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그러기에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이었죠.
전도사님. 낱낱의 행위보다는 방향이 잘못된 것, 그것이 죄를 정의하는 성서적인 관점이라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둘러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징조와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더 높은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지, 외면하거나 생략해선 안 될 것들을 영적 우회로를 거쳐 건너뛰면서 섣불리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흐름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누가 감히 막아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곳곳의 외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내 거센 시류에 파묻히곤 하지요. 이럴 때일수록 말없이 길이 되는 삶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상처와 질병, 아픔과 실패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 낮은 곳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삶으로 만나는 이들이 필요하지요.
목사가 되기 위해 수련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사님의 마음 속에 이 거룩한 꿈이 씨앗처럼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외로워도 한없이 낮아지심으로 하나의 길이 되신 주님을 묵묵히 따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길은 언제라도 낮아짐으로, 밟힘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같이 기억하고 싶습니다. 2005.4.13ⓒ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수련목 과정을 거치는 바쁜 시간에 마음을 담아 보내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길이 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메아리처럼 들려주니 고맙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거오재 노오재'(居惡在 路惡在)라는 옛 싯구가 있습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다'는 뜻이더군요. 사실 그 말은 시대와 크게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내면 혹은 삶의 알량한 풍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길도 마땅치 않은 세상에서 누군가의 삶이 내게 길이 된다면, 과분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내 삶이 누군가에게 바른 길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은혜겠지요. 우리의 부족함에도 이런 꿈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얼마 전 주보를 만들며 썼던 '기어가시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불쑥 떠오른 농담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얼마큼은 마음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 가 올라 가 독수리 같이"
(독수리는 태양을 바라보아도 눈이 멀지 않는다 했거늘!)
힘차게 찬송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해 길을 가던 한 신앙인이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누군가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 분이 주님이시라는 걸 신앙인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가 주님을 다 만나다니, 신앙인은 감격하여 주님께 물었다.
-주님, 어디를 가십니까?
-내 길을 간다.
-그런데 왜 그리로 가십니까?
-이 길이 내 길이니까.
-방향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니다. 한없이 낮아지는 것, 이게 내 길이란다.
우리는 매번 주님과 동행한다고, 주님을 따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어느 날 문득 우리의 길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로의 길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당혹스러움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은 여전히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묵묵히 길을 가는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거꾸로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전도사님, 혹시 안젤름 그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지요? 예전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제직의 모습>, <성서에서 만난 변화의 표징들>이란 책을 참 좋게 읽었으면서도 그의 이름을 따로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책을 만드는 젊은 출판인과 함께 독일 서점을 찾은 적이 있는데, 기독교 코너에 들러보니 가장 앞부분에 눈에 띄게 전시되어 있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안젤름 그륀의 책이었습니다. 대뜸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에 의미 있게 읽었던 책의 저자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저술가라는 것을 미쳐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죠.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니 그는 지금 독일 뮌스터슈바르짜흐 베네딕도 대수도원의 수사신부로 있으면서 많은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1년부터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영적 지도신부로 봉사하고 있더군요. 이미 그의 책이 한국어로도 제법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안젤름 그륀의 책은, 그 중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는 책은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좋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두껍지는 않습니다만, 쉽게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가만 생각에 잠기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에 대해 생각하기 전 '곤궁의 심연에서 나오는 기도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한 장 라프랑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선상에 놓여 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필자는 이 두 길 중 어느 길을 가야 할 것인지 필자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견해를 여러분에게 지금 말하고 싶다. 만약 여러분이 영웅적인 행위와 덕행을 쌓는 것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물론 여러분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선택할 권리를 당연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충고를 하고 싶다. 그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올바로 찾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현재 실질적으로 처해 있는 빈약한 처지의 심연에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길이 두 가지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전도사님은 어느 길이 바른 길이라 생각하는지요?
조금은 장황하게 들릴지 몰라도 책의 내용을 정리해볼까요. 서문에 충분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위로부터의 영성이란 말 그대로 위를 추구하는 영성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이상적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명백한 목표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늘 성장하고 상승해야 합니다. 자기훈련과 기도 등을 통해 목표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항상 더 나아지기를 원하고, 언제나 더 높이 상승하며, 더 채워야 하며, 하느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에서 지켜온 신앙의 자세는 분명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충만, 능력충만, 은혜충만' 등 교회에서 외쳐온 익숙한 구호들 속에는 위로부터의 영성이 추구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벅찬 신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경우 가정과 개인생활을 양보하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경공부, 전도, 봉사, 각종 헌금생활 등 만족할만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힘에 벅찰 만큼 분주해야 자신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을 놀리면 안 된다'는 말은 성공적인 목회와 성장하는 교회를 위한 비결로 목회자는 물론 교인 사이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위로부터의 영성은 신앙의 목표를 제시하며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항복하면서 포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실제 상황을 억압하거나 이상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억압하고, 그 어두운 것을 다른 것에 투영시켜 그것들에 대해 비난하고 격분합니다.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점점 잔인하게 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위로부터의 영성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보이는 한계, 믿음은 좋은데 사람이 못되거나 덜된 경우는 아무래도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한 결과 때문일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느님께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느낌들, 우리의 육체와 이상들, 우리의 상처와 나약함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격정과 분노 등 끊임없이 오고가는 생각과 느낌들, 몸과 마음의 질병, 상처와 아픔, 무능과 실패의 체험,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의 은총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 존재의 폐허 위에 영광된 집을 지으시는 주님을 만나 뵙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길과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길이라는 양극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길은 우리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현실로 내려감으로, 우리의 실패와 무능의 체험을 참된 기도의 장소로 삼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 성서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은 그들의 완전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실패와 무능, 불완전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 앞에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바로 자신 안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보존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지요.
예수가 죄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자비롭고 부드럽게 대한 반면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할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적인 열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을 더 찾고 있었고,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이들은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그러기에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이었죠.
전도사님. 낱낱의 행위보다는 방향이 잘못된 것, 그것이 죄를 정의하는 성서적인 관점이라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둘러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징조와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더 높은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지, 외면하거나 생략해선 안 될 것들을 영적 우회로를 거쳐 건너뛰면서 섣불리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흐름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누가 감히 막아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곳곳의 외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내 거센 시류에 파묻히곤 하지요. 이럴 때일수록 말없이 길이 되는 삶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상처와 질병, 아픔과 실패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 낮은 곳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삶으로 만나는 이들이 필요하지요.
목사가 되기 위해 수련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사님의 마음 속에 이 거룩한 꿈이 씨앗처럼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외로워도 한없이 낮아지심으로 하나의 길이 되신 주님을 묵묵히 따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길은 언제라도 낮아짐으로, 밟힘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같이 기억하고 싶습니다. 2005.4.13ⓒ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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