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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르는 만큼 말한다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32 추천 수 0 2022.08.29 07: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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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르는 만큼 말한다
목사님, 여러 해 전에 있었던 희미한 일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아직 건축이 다 끝나지 않았던 예배당은 당시 시골티를 벗어나지 못한 시흥시의 한 언덕에 있었고, 담임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목사님은 젊었었지요. 며칠 동안 말씀을 나누던 그 때, 제 숙소는 예배당에서 아주 가까운 권사님 댁이었습니다. 제가 그 권사님을 기억하는 것은 건축헌금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드리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번거롭더라도 그 때의 수첩이나 기록을 뒤지면 교회와 목사님 이름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냥 희미한 기억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오히려 그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회를 모두 마치던 날, 밤은 늦었고 비까지 오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굳이 저를 수원까지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지요. 그렇게 수원으로 가는 차안에서 나눈 이야기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고, 사실은 그 기억 때문에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바람으로 그 동안 좋다는 교육은 거의 다 받아보았다.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각종 세미나와 프로그램에 참석해보았지만 배운 건 기술 뿐, 내 것이 없다는 생각에 허전한 마음이 든다.'
목회자로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 날 마음을 터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날 나눈 이야기가 마음속에 따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계기가 된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은 지금까지 마음 한 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름을 확인하는 대신 편하게 이야기를 잇고자 하는 것은 당시 목사님의 고백이 목사님만의 고백이 아니라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심정을 가진 목회자가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만, 목회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고민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던 아내가 제게 묻더군요. 이것이 무엇을 두고서 한 말인지를 알아 맞춰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탄광의 본고장 뉴캐슬에 석탄을 지고 가는 기분이요, 네덜란드 사람의 표현대로라면 '올빼미 천지인 아테네에 가면서 올빼미를 데리고 가는 격'이며, 프랑스 사람의 말로는 '물을 들고 강에 가는 꼴'이 아닐 수 없다."
강론(설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온종일 사전을 들여다보면서 다음날 해야 할 강론에 필요한 단어를 찾으며 썼던 글이었습니다. 외국어로 말하면서 자연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느라 사전을 찾았던 것이었지만, 강론을 준비하며 하루 종일 사전을 뒤적이는 사제의 모습은 낯설고도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윽함은 바로 그런 곳에서 나오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윽함. 어쩌면 한국교회의 강단이 잃어버린 중요한 것 중의 한 가지는 그윽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날 목사님이 고백했던 '내가 없다'라는 말도 어쩌면 그윽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고요. '그윽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깊숙하고 으늑하며 고요하다. 뜻이나 생각이 웅숭깊다. 은근하다'고 풀고 있습니다. 고요하고 은근하면서도 뜻이 깊어 천박하게 여겨지지 않는 말씀, 왜 우리는 그런 그윽함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강단에서 '시'(詩)가 사라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언제부턴가 강단에서 시를 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사실 저는 시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시야말로 언어와 삶에 대한 가장 깊고 정제된 결과물이라는 이해 때문입니다.
원래 '시'라는 말은 '말씀'(言)이라는 말과 '사원'(寺)이라는 말이 합해진 말로, 침묵의 언어를 지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장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지요. 그런 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시일 거라고 저는 정리를 합니다. 사물과 삶의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니, 결국 설교자가 평생을 기울여 노력하는 부분과 결코 다르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사실 시는 너무 흔하다 싶을 만큼 많기도 하고, 어떤 것은 유치해 보이고 어떤 것은 난해하여 가까이 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좋은 시를 찾는 우리의 밝은 눈과 성실함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가장 적합한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밤을 새우는 시인의 노고를 고마워하며,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먼저 본 것을 찬탄하고, 도대체 어떻게 생각이 그 낯선 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마음으로 따라가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캄캄한 밤길이나 깊은 동굴, 바람막이도 없이 등불을 홀로 켜들고 좁은 사유의 길을 앞서 걸어가는 이들의 나직한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들에겐 아주 유익하고도 소중한 일이 되겠지요.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오늘, 저는 목사님께 시집 한 권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릴케가 쓴 <기도시집>입니다. 제게는 "오 주여, 그들 자신에게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그가 사랑, 의미, 고난을 겪은 그 삶에서 가버리는 죽음을"이라는,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는 구절이 담긴 시집이기도 합니다.
기도시집은 '수도자 생활의 서'와 '순례의 서' 그리고 '가난과 죽음의 서'라는, 모두 3부로 구성된 연작시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약 2년씩의 거리를 두고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쓰여진 시들입니다. 릴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 표제를 '기도서'로 택한 것은 자신의 시집이 통상적인 시집으로보다는 성경처럼 독자의 손에서 떠나지 않고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합니다.
시집에는 수도사에 대한 언급이 잦은데, 수도사는 릴케의 예술적, 종교적 삶의 태도와 과제를 대변해주는 존재로 시인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릴케는 수도사의 형상에서 고행과 고독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을 몇 곳 찾아보겠습니다.
"나의 주여, 당신은 그 성자들을 아시나이까?
밀폐된 수도원의 골방마저도
웃음소리, 고함소리와 너무 가깝다고 여겨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몸을 숨긴 이들을."
'밀폐된 수도원의 골방마저도 웃음소리, 고함소리와 너무 가깝다고 여겨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몸을 숨긴 이들'이라는 표현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말인지요. 일에 떠밀려 마음의 골방을 잃어버린 채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게 우리들인데, 골방마저 웃음소리, 고함소리와 너무 가깝다고 여겨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몸을 숨기다니요. 우리의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박수소리와 야유소리에 귀를 막아야 함에도, 갈수록 박수와 야유에 민감해져가고 있는 내면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깊이 경건함 속으로 침잠해야 하는지 까마득한 깊이를 보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고독합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에 축복을 내릴 만큼 고독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 하나의 사물처럼 설 정도로 작지는 못합니다"
외롭다고 느끼지만 우리가 제대로 고독하지 못함을, 우리가 보잘 것 없다고 느끼지만 아직 충분히 작지 못함을, 우리의 투덜거림이나 흔들림 속에 담긴 게으름의 뿌리를 또 그렇게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갖는 불안의 이유가 무엇이며 그 불안이 아름다움으로 이어지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서로 너무나 어울리지 못하는
두 음 사이의 휴지(休止)입니다, 나는.
죽음의 음(音)만 자꾸만 높아지려 하기에.
하지만 그 어두운 중간에서
두 음은 떨면서 화해합니다.
그리하여 노래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있는지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내가 착한 마음으로 형제처럼 대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나는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은 씨알로 조그만 사물 속에 스며들어 볕을 쬐고
또 큰 사물에는 크게 몸을 맡깁니다."
우리의 시각이나 생각이 얼마나 편중되고 경직되어 있는지를 일러주는 대목도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어디서건 내게 말하소서.
당신의 충실한 복음사가(史家)는
모든 것을 적어둘 뿐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적어둘 뿐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지 않는다'는 말은 삶과 유리된 오늘 설교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겨져 마음이 찔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신앙고백이 얕고 틀에 박혀 있음을 일러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 누가 당신을 잡을 수 있을까요? 아직 다 익지 않은 포도주가
점점 더 달콤해지다가 결국엔 스스로에게 속하듯
그 누구의 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당신은 당신의 것이니까요."
'내가 믿는 것은 말해진 적이 없는 모든 것입니다'라는 고백에 비춰 생각할 때 어쩌면 우리는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이라 하여도 결국은 진리와 진실에 대해 모르는 만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릴케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하게 됩니다.
목사님, 지금은 어디에서 목회를 하고 계실지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 때 나눴던 고민들이 끝내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을 계기로 다시 만남과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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