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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에 꽃을

임의진 임의진............... 조회 수 2015 추천 수 0 2002.03.07 08: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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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월간 작은이야기 2000년 3월호

요강에 꽃을



-임의진(남녘교회 목사, 「참꽃 피는 마을」 발행인)



1
날이 풀리자 곧바로 봄맞이 심방(尋訪)을 시작했 다. 심방 하면 보통 목사가 교인들 집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들을 하시는데, 사실 종 교를 넘어서서 어려운 일을 당한 분들, 동네의 극 빈자를 찾아 뵙는 일이야말로 진짜배기 심방이라 하겠다. 우리 교우들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 겠으나 나에게는 타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모두가 한 식구이고 한 자매형제다. 특히 제 앞가림도 할 수 없을 만큼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는 일에 무슨 시비와 우열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성경책 대신 알사탕 서너 봉지 사 들고 마을 노인정에 찾아 뵙기도 하고, 혼자 사시 는 할머니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반가운 말벗이 되 어드리곤 한다.

"그랑게 열여섯 살 묵어가꼬 이 동리로 시집을 왔는디, 집이라고 끼시럼만 꺼엄하고 신랑은 자꼬 무섬증만 들고…. 첫애기를 낳는다고 볏짚을 져다 가 방바닥에 고루고루 깔고는 말여, 이락씰 때까정 드라누워 죽자살자 양단간 결심을 묵고 애기를 낳 는디이…." 어쩌고저쩌고 이어지는 그 파란만장한 인생살이를, 작년에도 또 들은 그 이야기를 몇 시 간이고 다시 듣고는 한다. 자기 말에 서러워져 허 윽흑 울음을 토하시는 할머니에게 손수건을 펴서 건넨다. "별로이 서럽도 안쿠마는 할무니는 괜히 또 그라시네." 애먼 토를 달면서.

그렇게 한 달여 이웃 동네까지 돌고 나면 주민들 사시는 형편이며 허물 벗듯 내어놓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까지 다 주워듣게 된다.

오늘은 바다 가까이 있는 동네, 봄골(春谷)을 거 닐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솔치댁 할머니가 살고 계 셔서 간간이 들르곤 했는데, 그분 돌아가시고는 통 찾아가지 못했던 동네다.

나는 무슨 시위하듯 검정색 목도리를 펄럭이며 봄골을 거닐었다. 건조 창고 앞에 해바라기를 하고 계시던 마을 분들을 뵙고 머리 숙여 인사를 올렸 다. "거 누구시라요?" 다가와 물으시기에 아무개라 고 일러드렸더니 못 알아보았다며 모두 일어서시어 민망할 정도로 인사를 안기신다. 나도 따라 머리가 땅이 닿도록 재차 인사를 올렸다. 일 없이 마을길 을 걷는 것 같지만 '우리 동네도 목사가 돌아다니 는구나' 그런 마음을 갖게 해드리고자 함이다. 그 정도면 이미 마을에 넉넉한 위안과 위로가 될 것으 로 나는 믿는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허기가 지기에 군부대 앞 가게에 들러 병에 든 우유에다 빵 하나를 사서 깨물었다. 그러고 나오는데 길 건 너편 솔치댁 할머니 집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는 지난 늦가을, 큰 추위가 닥치기 전 묘 지 쓸 걱정이라도 덜어줄 셈이셨는지 서둘러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 있는, 사십 초반의 나이로 죽은 남편의 묘 옆에 실로 수십 년 만에야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잠들 수 있었다.

2
할머니 집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흉가 로 변해 있었다. 안방 대살 문은 살마다 부러지고 석회가 다 떨어진 흙벽하며 머리 위 서까래도 금방 내려앉을 기세였다.

나는 먼지 쌓인 토방에 앉아 할머니 기억을 퍼올 렸다. 언젠가 아이랑 바다에 놀러 갔다 오는 길에 할머니 댁을 들른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틀니를 빼내어 물에 씻고 다시 입에 넣으시고는 내가 사간 비스킷을 호물호물 드셨다. 틀니 빼는 걸 처음 본 우리 아이는 저도 이빨을 들어내겠다며 윗니 아랫 니를 잡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결국에는 이빨이 안 나온다고 발을 구르며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날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순간 토방 아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홱 튀어나왔 다. 젖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토방 아래다 새끼 를 낳아 키우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없고 들고양 이가 집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토방 아래로 고 개를 내려뜨렸는데, 아, 거기에 글쎄 요강이 있었 다. 할머니 쓰시던 묵직한 사기 요강이 쓸쓸히 앉 아 있었다.

솔치댁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고 온 날, 나는 일기에 이런 시를 남긴 일이 있었다.

외딴 집 홀로 사시는 솔치댁 할머니한테 뭣 좀 사들고 찾아뵀는데 요강이 벌건 대낮에, 방안에 그대로다 아따 할무니, 요강은 비우고 사시재만은 그라십 니까 워메-오메 그랬소, 우새시려버서 으짜까잉 할머니 얼굴이 처녀 얼굴만큼 붉어진다

자식 새끼들 우글우글 모여 살 때는 요강 넘친 일 많았겠지 토방에 내다 놓으시는데 할머니, 뼈만 남은 한 손으로도 가뿐히 들어 옮기신다

이제는 따듯한 오줌 한 발도 받기 귀한 저 요강 너 따순 방에서 좌선(坐禪)할 날도 머지 않겠구나

할머니, 토방 아래로 요강을 내려놓으시고는 국보 다루듯 걸레로 겉 한번 훔치시고 그 걸레로 또 내 털고무신까지 극진히 닦아놓으신다

3
그날 내가 시에 적어두었던 염려처럼, 요강은 주 인을 여의고 토방 아래 찬 바닥에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요강을 들고 나와 마을길을

걸어오는데, 안골 승식이 아재가 말을 걸어오신다.

"그거이 뭐시당가요. 요강 아니당가요?" "예, 맞구만요." "유재 부끄럽게스리 누가 보믄 으짜실라고…."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그러신다.

"제가 요새 오줌 조절이 잘 안 되가꼬 아조 요강 을 들고 안 댕깁니까요." "흐흐- 뭔 그랄랍디여. 누가 버린 거 주워오신가 본디, 시상에 주슬 것이 없어가꼬 요강이랍니까 요." 승식이 아재는 혀를 끌끌 차시며 골목길을 접 어 들어가신다.

집에 돌아와 나는 수세미로 요강을 번들거리도록 닦았다. 누가 알 것인가. 이 요강에 얽힌 사연을.

나는 이제 이 요강에다 한 바리 가득 꽃을 꽂아 놓을 생각이다. 하루가 다르게 움터가는 매화꽃을 맨 먼저 꽂으리라. 산수유 나뭇가지며 갯버들, 참

꽃, 가시엉겅퀴도 꽂으련다.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할머니를 쏙 빼닮은 할미꽃도 띄워야지.

"솔치댁 할머니! 제 집에다 할머니 요강을 가져 다 놨어요. 여기다 꽃을 꽂으려고요. 할머니, 하늘 나라에서 꽃씨 좀 많이 뿌려주세요. 아셨죠? 예쁜 꽃들 품에 안으면 요강이나마 쓸쓸하진 않을 거예 요. 할머니…, 살아 계실 때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해요." 요강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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