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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맨토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은 글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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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요즘 비트겐슈타인이 쓴 <철학 일기>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상에 앉을 때는 물론이고, 어디 다녀올 일이 있을 때도 책을 챙겨갑니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기에 틈이 나는 대로 읽고 있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습관 깨뜨리기입니다.
습관은 내가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일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이슬비에 옷이 젖듯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면 몸과 마음에 배는 것이 있습니다. 습관은 한 번 찾아들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간다는 속담이 괜히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독서에도 습관이 있습니다. 시간이나 기회만 되면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책을 손에 잡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늘 책을 읽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책과 무관한 삶을 살아갑니다.
책에 대한 습관 중에는 독서의 편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편식과 비슷한데, 아이가 제게 필요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 대신 제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 쉽고 재미있고 실용적인 책만 읽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 일기>를 택한 것은 한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독서 습관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분석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사람답게, 그의 책은 어렵고 난해합니다. 언어에 대한 책인데 마치 어려운 공식이 담긴 수학 책처럼 여겨집니다. 단어도 개념도 바람 같아서,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가 않아 눈앞에서 사라지곤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가 걸어간 사색의 오솔길, 길을 아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인내를 가지고 읽어갑니다. 희미한 불빛 가물거리는 갱도에서 호미 하나를 들고 암석을 파 들어가는 광부의 심정이 되곤 합니다.
책을 읽으며 놀랍게 여겨지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천착이 놀랍습니다. 이런 눈먼, 숨 막히는 몰두를 본 적이 언제였지 싶을 만큼 언어의 본질을 향한 그의 걸음에는 지친 기색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기록의 의미도 돌아보게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하는데, 그것은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보다는 수년간 이어온 자신의 연구를 마무리할 곳으로 전장을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는 전장에서도 일기와 연구에 대한 기록을 이어갑니다. 전쟁터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 대한 연구를 기록으로 남기는 모습이 성실함의 무게로 다가옵니다.
자기의 연구 결과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날 이렇게 씁니다. ‘매우 많은 연구를 했지만 확신은 없다. 마치 거의 바로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기 연구를 너무 낙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신뢰와 기대를 갖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선택을 합니다. 마침 한 지인이 보내준, 만년필로 글씨를 쓰기에 좋은 노트가 있습니다. 자판이 아니라 만년필로 기록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공책 위에 만년필로 쓰는 기록, 그것이 생각을 담아내기에 더 좋은 선택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한희철 목사 (교자로 202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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