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어여 어서 올라오세요

대청마루(자유게시판)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마지막 심판

가족글방 최창섭 장로............... 조회 수 12 추천 수 0 2024.10.06 20:50:57
.........

<마지막 심판>

"심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건을 심리해 판결하다"이다. 즉 죄를 지었다고 해서 바로

처벌받는 게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 무죄를 선언받을 수도 있고, 유죄를 선언받는다고 해도 그 처벌이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심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선언 즉 무죄냐 유죄냐를 선언하는 일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기도 했지만(출 이집트 사건, 고라의 반역 사건[민 16:1-

3], 놋뱀 사건[민 21:9] 등) 대부분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직접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 심판 때 무죄 선언을 받아 영생을 얻게 하려고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했다.

(공동번역과 조선어성경을 제외한 열 개 버전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고 번역한 건 오역이다. 요 3:17과

12:47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게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했다.)

 

이 땅에서 심판은 다양한 사건을

심리해 그 결과를 선언하는 일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심판 때는 여러 사건을 심리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 이

땅에서 살 때 내뱉은 말실수(헛된

말, 터무니없는 말, 무익한 말,

쓸데없는 말, 부주의한 말, 함부로

내뱉은 말)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반드시 해명(설명)해야 하고, 하나님이 이 해명을 들어

보고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선언한다고 했다.[마 12:36,37]

두말할 필요 없이 무죄를 선언 받으면 천국행이지만 유죄를 선언 받으면 지옥행이다. 정말 

무서운 말이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해명도 없다. 예를 들어 큰 예배당을

지었다거나, 전도를 많이 했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었다거나, 힘을 쏟아 선교했다거나, 봉사를 많이 했다거나, 구제를 많이 했다거나, 헌금을 많이 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당연히 해야 할 걸 한 것이기에 해명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오직 말실수 하나만 해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교인들이 무의식중에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차없이

허무는 말이 있어 감히 이런 말이 마지막 심판날에 반드시 해명해야 할 말이라고 사료 되어 거론하고자 한다.

 

먼저 기도 마무리를 각자 소견에 좋은 대로 한다는 것이다. 

"기도합니다. 기도하옵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이 비록 어문법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어서 "기도한다"고 보고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하는 거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하면 하나님의 전능을 무시하는 말이 되어 말실수가 된다.

 

다음, "기도했습니다"도 말실수에 해당한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걸 하나님께 이루어달라고 청하는 것인데 마무리를 과거형으로 하면, 마치 어떤 사람에게 뭘 좀 들어달라고 청하고 마지막에

"부탁했습니다"하고 말을 맺는

것과 같다. 말에는 뉘앙스라는 게 있다. 누군가에게 뭘 부탁했으면 마지막에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하고 말을 맺어야지 과거형으로

"부탁했습니다" 하고 맺으면 "내 부탁 들어 주지 않으면 재미없어"

하고 협박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을 협박할

리는 없겠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건 하나님은 전능하기에

우리말의 뉘앙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이 믿는 신에게 빌 때는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빌지

"빌었습니다. 빌었습니다" 하며

빌지 않는다. 기도는 우리가 청하는 걸 이뤄달 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 마무리는 반드시 "기도드립니다. 또는 기도드리옵나이다."로 

마무리해야 한다.

 

다음, 기도와 기도문 낭독이 같다고 하는 것도 거짓이기에 분분명히 말실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는 말이고

기도문 낭독은 회중을 의식하고

하는 기도다. 그리고 기도문을

낭독하면 목회자도 편하고 낭독하는 사람도 기도 중간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지 않아도 되니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인본주의

사고 발상이다. 그래서 말실수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수려한 기도문 낭독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

기도문은 기도문을 낭독하는 사람의 참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분장 또는 위장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흔히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그러면 일상 대화를 써서 읽지 않고 그냥 말로 하듯이 하나님과의 대화도 사전에 해야 할 말을 준비해 두었다가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이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귀 기울이지 분장이나 위장한 기도문 낭독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무시해 버릴지 모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심판 때

하나님이 너는 왜 기도하지 않고

기도문을 낭독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명할 건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 해명에 수긍할까?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기도와 기도문이 같다고 하면서 마치 시혜라도 베풀듯이 기도문을 써서 읽으라고 가르치는 목회자도 말실수를 가르치는 것이니 심판 때 무죄 선언을 받을지 유죄 선언을 받을지  숙고해 봐야 한다.

 

다음, 하나님만 복을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목회자 교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처럼 복과 축복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 즉 하나님 복 빌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런 기도가 어불성설인 건 먼저

성경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과 또 지존한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비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 마음에 하나님보다 높은 신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고백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성경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모두 "축복"으로 바꾸고,

국어사전에도 "복"이라는 단어를 모두 "축복"으로 바꾸기 전에는

성경 대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전술한 대로 하나님이 복과 축복의 뜻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 때문에, 심판

때 어떤 해명이나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 어떤 펀결이 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다음, "목사" 호칭이다. 목사는

한자로 칠 목(牧)에 스승 사(師) 즉 치는 스승(선생)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에게 스승은 오직 한 사람이고 너희는 다 형제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스승" 이라고 불리지 말고 "지도자"라고도  불리지 말라고 하면서 섬기는 사람이 으뜸이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진다고 말했다.[마 23:8-11]

주지하는 대로 당시에 스승(선생)은 예수님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고 제자들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죄인인 사람을 어떻게 "목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시편 23:1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했고  요한복음 10장 11절과 14절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목자"로

자칭하지 않았는가? 마지막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나도 목자

예수도 목자라고 했는데, 너는 왜 너 자신을 스스럼없이 목사로 호칭했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해명할 것인가? 그 해명에 하나님이 수긍할 것 같은가?

 

개역개정성경이 엡 4:11에서 "목자(포이멘)"로 번역해야 할 걸

"목사"로 번역한 건 100% "목사"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성경에 "목자"나 "목사"로 번역한 헬라어 "포이멘"이 21번 나오는데 20번은 "목자"로 번역했다. 이 스무 군데는 "목사"로 번역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엡 4:11 한 군데는 "목사"로 번역해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 성립한다. 개역개정 편찬자들이 바로 이걸 빌미로 "목사"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려는 악의로 오역한 것이다. 마지막 심판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공동번역과 회복역 성경은 엡 4:11도 "목자"로 옳게 번역했다.

 

"실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말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기에 자기 온몸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약 3: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76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풍경 -중간(中間) new 이기봉 목사 2024-12-21 2
675 가족글방 [주보시] 메리 크리스마스! new 쿠바인 2024-12-21 3
674 가족글방 [주보시] Ave Maria! new 쿠바인 2024-12-21 1
673 가족글방 [주보시]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쿠바인 2024-12-17 4
672 가족글방 [주보시] 의가 사는 곳 쿠바인 2024-12-17 4
671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풍경] 꼭 지금이 아니어도 돼 이기봉 목사 2024-12-16 3
670 가족글방 양의 탈을 쓴 늑대 최창섭 장로 2024-12-10 14
669 가족글방 [주보시] 그레고레이테! 쿠바인 2024-12-09 4
668 가족글방 [주보시] 에클레시아 쿠바인 2024-12-09 3
667 가족글방 [주보시] 한네누 야웨 한네누! 쿠바인 2024-11-25 9
666 가족글방 [주보시] 깨어 있으라! 쿠바인 2024-11-25 7
665 가족글방 [주보시] 아빠 아버지! 쿠바인 2024-11-25 8
664 가족글방 전도 김요한 목사 2024-11-25 8
663 가족글방 [봉선생의 가을 시] 참 좋다 file 이기봉 목사 2024-11-14 5
662 가족글방 말씀 왜곡(歪曲) 또는 와전(訛傳) 최창섭 장로 2024-11-12 9
661 가족글방 외면받는 이유 file 김요한 목사 2024-11-09 15
660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풍경(시) 11월 정개구리 file [1] 이기봉 목사 2024-11-05 7
659 가족글방 [주보시] 그리스도의 자리 쿠바인 2024-11-02 7
658 가족글방 [주보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쿠바인 2024-11-02 7
657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풍경(시) 그리워 이기봉 목사 2024-11-01 3
656 가족글방 소치는 아이 ‘목동(牧童)’ 한시(漢詩), 서정적 목가적 풍경을 묘사하다 file 고영화 2024-11-01 20
655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풍경] 수명 [1] 이기봉 목사 2024-10-23 8
654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시] 꽃이니 이기봉 목사 2024-10-22 5
653 가족글방 행복해서는 안된다. 김홍한 목사 2024-10-21 15
652 가족글방 [주보시] 죄가 더한 곳에 쿠바인 2024-10-20 7
651 가족글방 [주보시] 가루가 되다! 쿠바시 2024-10-20 6
650 가족글방 [주보시] 순례자로 부르셨으니 쿠바인 2024-10-20 4
649 가족글방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박철 목사 2024-10-18 14
648 가족글방 어른이 된다는 것 김요한 2024-10-12 20
» 가족글방 마지막 심판 최창섭 장로 2024-10-06 12
646 가족글방 결국 신도들만 '호구'가 될 뿐이다 김요한 목사 2024-10-05 26
645 가족글방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김요한 목사 2024-10-02 14
644 가족글방 [주보시] 우간다에서 쿠바인 2024-09-30 6
643 가족글방 [봉선생의 아침 시] 인생 [1] 이기봉 목사 2024-09-30 8
642 가족글방 저는 20대 시절에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김요한 목사 2024-09-25 9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