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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왜곡(歪曲) 또는 와전(訛傳)>
말이나 글의 뜻을 전할 때 그 말을 한 사람이나 글을 쓴 사람과 직접 대면해 그 뜻을 정확히 알아보지 않고 전하면, 전하는 과정에서 전하는 사람의 사고(思考)가 부각돼 왜곡(歪曲) 되기 십상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개신교의 종교개혁주일에는 이 말을 루터의 95개 반박문과 함께 사용한다.물론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건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 역사적인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면죄부를 팔았다고 말하는 건 역사의 왜곡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면죄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고 면죄부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는데 면죄부를 팔았다고 말하는 건, 교황과 사제들의 횡포에 반대하는 측에서 진실을 왜곡해 면죄부라고 한 걸 지금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개신교도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를 통해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해야 죄(罪)를 용서 받는다는 건 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선행이나 기도를 통해 벌(罰)도 용서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 교리가 있는데, 이 벌은 교황이나 주교만 면제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이 면죄권을 가톨릭에서는 교황의 대사령(大赦令)이라고 하는데 루터가 반박문을 내 걸던 당시에 교황이 성베드로성당의 개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당 개축헌금을 바친 사람에게 교황이 대사령을 내렸다. 교황의 이 조치가 비록 가톨릭교회 교리에 어긋나는 건 아니었지만 반대측에서 보면 대사령을 돈과 바꾼 게 되어 거두절미해 면죄부로 왜곡한 것이다. 면죄부로 번역한 영어는
Indulgency인데 그 원래의 뜻은 관대 또는 속죄(권)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개신교에서도 예배당(교회)을 개축이나 특히 신축할 때는 대부분의 교회가 성전으로 둔갑해 교회 건축이라고 하지 않고 성전 건축이라고 한다.
그래야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는 심적 부담을 주어 건축 헌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어야 하고 성전 크기도 성경에 제시한 규격 대로 지어야 한다.(지금 이스라엘의 꿈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이슬람교의 황금돔을 헐고 그 자리에 제 3성전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한글 성경에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고 모두 연보였다. 줄 捐에 보울 輔 즉 누군가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돈을 바쳤다.
그러던 것이 개역개정성경에서 연보라는 단어를 밀어내고 헌금이라는 단어 즉 목적 없이 그저 돈만 바치라는 단어로 대체한 후에 지금은 헌금이 정착되었다.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고 더
담대해졌다는 데 있다. 헌금이 정착 되자 이번에는 민수기 31:50에서 종전에 예물로 번역한 히브리어 고르반을 아예 헌금으로 바꾸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미디안 병사들과 싸워 승리한 후에 미디안 병사들에게서 노획한 금패물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친 것을 헌금(돈)을 바쳤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40년 광야 생활을 할 때인데 무슨 회폐가 유통 되었으며, 미디안 병사들이 소지했던 돈을 빼앗었다면 그 돈을 어디에 쓴 다는 말인가? 어불성설도 이만저만한 어불성설이 아니다. 그리고 비록 히브리어를 모르고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해도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교인이라면 고르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르반의 뜻을 왜곡 정도가 아니라 와전한 것이다. 왜곡(歪曲)이 말의 물리적 변화라면 와전(訛傳)은 한자의 뜻이 보여주듯이 말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건 하나님에 대한 담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나라 교회는 모두 꿀먹은 벙어리다. 혹시 전쟁할 때도 하나님께 묻지 말고 돈은 바쳐야한다고 성경을 고쳤으니 목회자들이 모두 찬성해서일까?
그런 주제에 가톨릭교회를 향해 면죄부 운운 하는 건 말그대로 내눈에 들보 있는 사람이 형제 눈에 있는 티끌을 빼겠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마 7:3,4] 부끄럽지도 않은가? 사람은 속인다 해도 하나님은 못 속이는데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은가? 요한계시록 22:18, 19에서 하나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면 재앙을 내리고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더하거나 제하는 건 말씀을 왜곡하거나 와전하는 거다.
성경에는 헬라어 포이멘을 다 목자로 번역해는데 개역개정은 엡 4:11에서 목자가 아니라 목사로 오역하고 목사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삼는다.
잘못된 교과서로 공부하면 엉터리 지식을 알게 되듯이 번역이나 편찬을 엉터리로 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다시 한번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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