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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의 역할
디모데후서 3:10~1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3:12)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라는 바울의 말이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세상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랍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입니다. 더 악한 이가 덜 악한 이를 면박합니다. 뉴스의 정치면과 사회면을 펼치면 그런 일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선과 의를 행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거나 핍박을 받았고, 정의를 다르는 이들이 불의한 이들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악행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자랑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려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번영하고 칭찬 듣고 존경받는 일이 그렇게 무모한 일인가요? 조금 더 의로운 사람들의 의지와 가치가 세상에 반영되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자연스러운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한마디로 세상이 뒤집혀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이들이 번성하고, 거짓말하는 이들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 후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안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편히 살려면 쥐 죽은 조용해야 합니다. 수치와 굴욕을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16세기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1562~1598)을 치르며 신·구교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구교도에 의한 신교도 박해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1762년 위그노 청년 앙투앙이 자살하였는데 검찰은 이 사건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칼뱅주의자 아버지 장 칼라스가 죽였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판사들은 장 칼라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거열형에 처해진 장 칼라스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판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기득권의 개가 된 검찰은 지금도 여전하고 엉터리 법관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나마 불의에 저항하고 불합리에 반기를 든 지성인이 있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숨통을 틀 수 있었습니다.
주님, 힘의 원리만 작동하는 세상은 지옥입니다. 힘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인격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건강한 지성인의 역할이 절실합니다.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
2024. 11. 17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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