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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55 추천 수 0 2021.09.04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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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32-4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6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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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사순절 여섯째 (종려) 주일, 2021년 3월28일

 

오늘은 부활절(4월4일)을 한 주간 앞둔 사순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내일부터 고난 주간이 토요일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성지 순례차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하여(막 11장)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때부터 한 주간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신학에서는 이 대목의 이야기를 수난 전승이라고 부릅니다. 수난 전승의 압권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재판받은 다음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련의 일은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만 하루가 되지 않는 시간에 신속하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한 장소는 감람나무가 많다 해서 이름 붙여진 감람산 안의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머문 이유는 기도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처지가 매우 어려웠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의 신상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당대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으며, 묵시적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듣기 불편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막 14:1)를 찾고 있었고,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합니다(막 14:10, 11).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마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분위기를 깨는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스승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좀더 조용한 데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33절에서 당시 예수님의 마음을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루터는 예수님이 전율을 느끼고 겁을 먹었다고 번역했습니다. 매우 노골적인 번역입니다. 이어지는 3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매우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 겁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대범하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자기 신념을 위해서 억울한 죽음까지 초연하게 받아들인 영웅들은 지난 인류 역사에 많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절절한 어투로 제자들에게 호소한 것은 아닙니다. 본래부터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마 10:28)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것만이,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일만이 두려운 일이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3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기도했다는 사실은 복음서에 종종 나오지만 그 기도 내용이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36절의 기도가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요 17:1~2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긴 기도문은 예외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운명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전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런 순종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기에 그동안 인생살이에서 형성된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자는 복 되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힘들기도 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는 더더욱 힘든 거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모험입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 운명을 건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 운명을 거는 모험을 하려면 하나님이 왜 신뢰할만한 분인지를 먼저 분명하게 인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락방> 2021년 3월 2일 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여덟 살 때 깨진 유리병 위에 넘어져서 유리 조각이 무릎뼈까지 파고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사는 수술 후에 아이의 엉덩이부터 무릎 아래까지 붕대로 감았습니다. 아이는 혼자서 걷지 못합니다. 아이 방이 2층이라서 아버지는 매일 아침과 밤에 아이를 안고 층계를 오르내렸습니다. 첫날 아침에 층계를 내려오던 아이는 불안해서 아버지 목을 꽉 붙잡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내가 잘 붙잡고 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이는 6주 동안 아무 두려움 없이 아버지 품에 안겨 층계를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무한한 신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신뢰하더라도 전율할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 놓인 사람에게는 옆에서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치료 가능성이 희박한 대수술을 앞둔 환자나 호스피스에 들어가서 죽음을 준비하는 이에게는 함께 해줄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기도하는 동안에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왔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예수님이 불안하셨다는 뜻일까요? 제자들은 잠에 취해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정신 차리고 예수님에게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으나 육신이 약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적나라한 실존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째로 오셔서 지쳐 쓰려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그만 자고 그만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인의 손에 팔릴 결정적인 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42절에서 겟세마네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공생에 중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이 유언을 깊이 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문장에는 중요한 동사 세 개가 차례대로 나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헬라어 성경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γε?ρεσθε, ?γωμεν, ?δο?. 매우 인상 깊은 단어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이 취해야 할 세 가지 영적인 태도가 들어있습니다.

 

“일어나라.” 지금 제자들은 널브러져 있습니다. 죽을 지경이니 내 옆에서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그들은 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제자들의 이런 상황과 비슷합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예민하게 살피고 생명 충만한 삶을 향해서 정신 차리고 나아가야 하는데, 일상의 과잉으로 피곤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일상은 경쟁과 피로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상도 과잉되면 우리 삶을 훼손시킵니다. 일상의 과잉에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맞춰서 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정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는 정치 과잉입니다. 여야가 서로 경쟁하는 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정치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경쟁과 논쟁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헐뜯습니다.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고 “당신 때문이다.” 하는 주장만 나옵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가 국민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영역도 비슷합니다. 그렇게 경쟁 위주로 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만 손해 보는 듯해서 그런 지나친 경쟁 대열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듭니다. 피곤하다 보니 우리의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육신이 약하여 잠에 떨어진 제자들처럼 영혼이 쇠약해진 상태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가자.” 제자는 선생의 뒤를 따르기도 하지만 선생에게 도움이 필요한 특별한 상황에서는 옆에서 함께 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함께 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받는 자리나 십자가 처형장소에 제자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일신상에 위험이 닥칠 수 있고, 최소한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자기 신분을 감추고 싶었을 겁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후에 제자들은 낙심하여 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함께 가자.”라는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서 복을 받느냐 아니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과만 연결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삶입니다. 그의 운명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지엽적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지엽적인 문제를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민망한 마음이 듭니다.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살았더니 사업이 잘되고, 자식도 잘되었다는 식의 주장 말입니다. 실제로 좋은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해도 그런 생각이나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관념으로만 들릴 겁니다. 그런 현장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가르치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교육 성과에 너무 매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선생이 아무리 수준 높은 내용을 성실하게 가르쳐도 모든 학생에게 교육의 성과가 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어떤 점에서는 교육에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자식 교육이나 제자 교육에서 성과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교육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꿩 잡는 게 매”라는 실용주의가 대세인 오늘의 현실에서 이런 삶의 태도가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아도 그게 함께 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갈 겁니다. 예수님이 지쳐 쓰러진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두십시오.

 

“보라.”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 지금 어떤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인 일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강조법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판 자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혼자 오는 게 아니라 예수를 체포할 군졸들을 데리고 은밀하게 밤안개처럼 옵니다. 갸룟 유다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를 통해서 인간 역사의 폭력성이 숨지 못하고 드러납니다. 유다의 배반은 당대 최고 종교 집단인 산헤드린의 속살을 드러냈고, 나아가 최고 정치 권력인 로마 사법부의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 문명의 자기 구원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우리가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유대교의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의 최고 법정입니다. 오늘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라고 해도 됩니다. 이런 조직을 우리는 문명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가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신성모독자라고 선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왜곡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 지역의 로마 총독부는 유대의 실질적인 행정부입니다. 오늘날 청와대나 검찰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들은 국가의 정의와 진리를 자신들이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의 정의와 진리라는 칼을 들고 오히려 국가의 정의와 진리를 파괴하는 일을 종종 자행했습니다. 그게 이상합니다. 문명은 인간의 삶에 빛을 비추는 힘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교육, 의술의 발전으로 인간 문명이 지금 최고조입니다. 이런 문명권에 사는 우리는 원시림에서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원주민들 무시합니다. 그런데 인간 문명은 종종 인간을 미몽에 떨어뜨립니다.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명도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에는 죄가 내재해있습니다. 숨어 있다가 어느 계기가 되면 폭력성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문명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제자들은 오늘도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오는 순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그 순간이 무엇인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끼는 분들은 느끼실 겁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근거이자 단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살이에서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실질적인 말씀은 없습니다. 다른 일들, 즉 돈벌이와 취미생활 등등은 삶의 도구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의 제자로 살지 않는다고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잘하거나 운이 좋으면 나름으로 풍족하게 먹고살고, 본인이 원하는 오락을 즐기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부활 생명은 누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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