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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앞에서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6 추천 수 0 2021.09.04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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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6: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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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부활 주일, 2021년 4월4일

 

“예수 부활했네!”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를 겁니다. 예수 부활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아무리 믿고 싶어도 일단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정신 나간 말로 취급하거나 ‘당신들은 믿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지!’ 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현대 자연과학이 예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속사회가 부활 신앙과는 관련 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대개 기독교인들도 이런 시대정신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부활 신앙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미 고전 15:14절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으면 믿음 생활 자체가 헛되다고 언급했듯이 예수 부활을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를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또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을까요?


예수 부활 이야기는 서사 형식을 갖춰서 네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바울의 편지인 고전 15장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는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나머지 신약성경은 예수 부활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그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서사는 두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죽어서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묻혔던 무덤이 비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유형의 이야기 모두 사실은 믿기 힘듭니다. 죽어서 무덤에 있어야 할 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환상처럼 들립니다. 죽은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가 꿈에 나타나거나 환청이나 환각 비슷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제자들과 기독교인들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빈 무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묻혔던 무덤에 시체가 없다는 사실이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당시에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예수 시체를 빼돌려놓고 부활했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세 여자

오늘 설교 본문은(막 16:1~8) 바로 그 빈 무덤 이야기에 속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상외로 여자들입니다. 당시에 여자의 증언은 별로 비중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다면 여자들 이야기는 뺐을 겁니다. 그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서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제쳐둘 수 없었습니다. 막 16:1절에 이 여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갈릴리 호수 인근의 막달라를 고향으로 둔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 십자가 처형이 일어난 뒤에 다 떠났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순간에 이미 도망갔습니다. 막 14:50절이 이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여자 몇 명은 이들과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는 골고다 언덕에 있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 시체를 가족 묘지에 안장하는 그 자리에도 그들이 있었습니다. 남자 제자 중에는 베드로만 예수님이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판받을 때 군중 틈에 끼어 있다가, 당신이 저 예수와 한 패거리 아니냐, 하는 질문을 듣고 저주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을 뿐입니다.


막 16:1~2절에 따르면 예수 십자가 처형과 매장을 지켜보았던 여자들이 예수 시체에 향유를 바르려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시간에 동굴묘지에 갔다고 합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이 예수가 그 전날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안식일과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는 말은 안식일과 안식일 후 첫날 사이에 일정한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때가 이른 시간이었기에 안식일 이후에 즉시 향품을 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는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세 명의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어떤 특별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이 기독교의 부활 신앙 형성과 그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이 세 여자는 무덤으로 가면서 서로 걱정했습니다. 동굴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누군가가 대신 치워줘야만 합니다. 남자 제자들이 함께 왔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었겠지요. 이 여자들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덤까지 왔을 겁니다. 이미 돌이 치워졌습니다. 의외였습니다. 동굴 무덤 안으로 들어갈 때 그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던 분이지만 이미 죽은 지 며칠 지난 이의 시체를 동굴 무덤 안에서 대하는 것이니 꺼림칙할 수도 있으나, 사랑이 강렬하여 그분의 시체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감정이 넘쳤을지 모릅니다. 그녀들은 무덤 안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맞닥뜨렸습니다.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시체가 놓였던 단의 오른쪽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일일까요. 누군가 장난으로 시체를 그렇게 세워놓은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말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 여자들은 향품을 바를 예수의 시체는 못 보고 대신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 천사는 이 여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절입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니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생명체나 현상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들어오는 생명 사건입니다. 최정례 시인은 “빛그물”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늘과 빛이, 나뭇가지와 사슴의 관이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빛그물을 짜면서 흐르고 있었다.” 최 시인이 말하는 빛그물은 그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생명의 깊이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천사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지금 특별한 열정을 안고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간 세 명의 여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살아나셨다

천사의 발언에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는 “살아나셨고”, 따라서 여기, 즉 무덤에 “계시지 아니하니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과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말은 같은 뜻인가요? 빈 무덤이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인가요? 이에 대한 대답이 학자들에 따라서 다릅니다. 실제로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서 사라졌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 보도를 꼼꼼히 읽어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덤 안에서 시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성경은 묘사하지 않습니다. 부패하기 시작한 피부에 다시 핏기가 돌고, 감겼던 눈이 열리고, 누웠던 시체가 천천히 일어나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런 묘사가 있었다면 흥미롭기는 하겠으나 영적인 깊이는 사라졌겠지요.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의 시체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다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게(요 3:4)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 빈 무덤 이야기는 훨씬 궁극적인 어떤 하나님의 생명 사건에 대한 강력한 은유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고 무덤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마술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또는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서 실망한 제자들이 돌아간 일터입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흐지부지될 줄 알았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마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은 줄 알았으나 거기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듯이 갈릴리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될 겁니다. 부활의 나사렛 예수를 만나려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7절에서 그 사실을 말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여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당장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전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그렇게 전달했다고 보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에도 부활의 주님이 여자들에게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지만, 여자들이 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여자들이 무덤에서 경험한 내용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으나 아무도 여자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만 무덤에 와서 예수 시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 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가서 예수 시체가 없는 걸 보고 “믿더라.”(요 20:8)라고 보도합니다. 이 표현은 모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 부활을 믿었다는 게 아니라 시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거꾸로 부활의 빛에서 빈 무덤이 보이는 겁니다.


네 복음서가 다 보도하는 이 빈 무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막달라 마리아를 선두로 이 세 명의 여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으며 경험한 것일까요? 그 이야기는 왜 빈 무덤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갈릴리를 주목할까요? 막 16:8절이 하나의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 구절이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뒤로 이어지는 9~20절은 훗날 보충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도 어떤 사본에 이 구절이 없다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부활 신앙에 이르는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기자는 이 여자들의 행동을 매우 특이하게 묘사했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성들은 1) 너무 겁에 질려서 무덤에서 도망쳤고, 2) 너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방식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기뻐서 동네방네 떠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생사의 경계선

이 여성들의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본문에 세 개 나옵니다. 놀람(trembling), 떨림(amazement), 무서움(afraid)입니다. 이 단어로 묘사된 심리상태는 이 여성들만이 아니라 당시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당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예수에게서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한 어떤 궁극적인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걸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그 경험을 논리적으로 해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놀라워하고, 떨고, 두려워할 뿐입니다. 일종의 천기누설을 들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이 말하는 양자의 세계를 처음으로 들여다본 과학자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자신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삶의 전혀 다른 차원과 깊이를 보았으니 놀라고(τρ?μο?)과 떨 수밖에(?κστασι?)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생명의 궁극적인 비밀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순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세 여자 앞에 벌어진 빈 무덤 이야기는 이제 죽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입니다. 경계선이 무너졌으니 예수님은 무덤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 모습의 천사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는 살아나신 겁니다. 다시 죽음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에게서 죽음 이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삶은 분명히 죽음 이전과 이후가 다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저주입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일찍 죽으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인간적인 태도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리고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욕망에서 나옵니다. 이 시대정신은 이 욕망을 마음껏 누리라고 부추깁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아이들이 어머니가 부르면 놀이를 그쳐야 합니다. 그것으로 아이들의 삶이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친구와의 놀이만 끝났을 뿐이지 가정으로 돌아가면 또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놀이와 집 사이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경험이 이 세 여자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라서 이 여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은 누구나 손쉽게 초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능한 한 그 운명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호세아를 인용하여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6)라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은 무섭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마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죽음의 고통과 슬픔마저 극복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것보다 우리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 이런 부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부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온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는 그 위급한 골고다에서도 예수와 함께했고, 예수가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에 매장되는 장소에도 함께했고, 급기야 그의 시체가 묻힌 무덤 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용기를 낼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한편으로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그 여자들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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