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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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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6220 |
설교보기 : https://youtu.be/BMvuKWCOhzM
성경본문 : 마가복음 9:2-9
예수의 변모 사건
막9:2-9, 예수 변모 주일, 2024년 2월 11일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세 단계에 걸쳐서 그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막 9: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물리적으로도 빛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빛이 있어야만 사물이 드러납니다. 메타포로서의 빛 경험은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올해도 벌써 2월 중순에 들어섰습니다. 한겨울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민들레꽃을 비롯한 봄꽃들이 마술처럼 여기저기서 돋아날 겁니다. 그 꽃이 어떤 이에게는 빛으로 경험됩니다. 특정한 사람이 그렇게 경험될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빛으로 왔어요.’라는 노랫말이 가능합니다. 이런 경험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세상을 밋밋하고, 칙칙하게 경험하면서 삽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빛으로 경험했다는 말은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빛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관계가 맺어졌다는 뜻입니다. 그게 뭘까요?
둘째, 갑자기 엘리야와 모세가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모습이 빛으로 변형되었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보도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선지자입니다.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따라올 정도로 카리스마가 대단했습니다. 9백 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등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역사적으로 훨씬 더 옛날 사람입니다. 대략 기원전 14-15세기입니다.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실제로 벌어진 것처럼 보도하는 걸까요?
엘리야는 선지자 전통을 대표하고 모세는 율법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선지자 전통과 율법 전통은 고대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그 두 전통을 통해서 세상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마지막 때에 엘리야와 모세가 다시 올 거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인 막 8:27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당시 소문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신명기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압 광야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입니다. 신 18:15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나를 위하여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고대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세상 마지막 때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변모된 예수 옆에 나타나서 예수와 대화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도 비슷한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구름은 보통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유목민 생활을 할 때 고대 유대인들은 구름이 빽빽하고 번개와 천둥이 치는 시내산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특별한 소리에 대한 경험은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도 일어납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대나무 숲이 곳곳에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죽림에서 특별한 소리가 울립니다. 단순히 바람이 스치는 소리이기도 하나 ‘나는 살아 있습니다. 바람과 사랑을 나누는 중입니다.’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하다는 제자들의 강렬한 경험이 바로 구름 속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표현된 겁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듣고 예수의 변모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말이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런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성경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노아 홍수가 실제로 벌어졌다든가, 홍해가 실제로 갈라졌다고 주장해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건 아닙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그런 일들이 경험된 겁니다. 하나님 경험이 먼저 있었기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귀에 들리고, 갈라진 홍해가 눈에 보인 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린아이를 사랑하기에 그 아이가 천사로 경험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신앙 전반과 삶 전반에서 중요하니까 신학적인 설명을 한 가지만 보충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편지 형식의 글들은 기원후 40년대에 나오기 시작했고, 복음서는 70년대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신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서사를 다룹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정리한 게 바로 복음서입니다. 서신을 통한 신앙의 눈이 생길 때만 복음서 내용이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신약성경이 형성된 과정입니다. 신앙의 눈이 없는 사람에게,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보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호기심 천국에 불과하겠지요.
따라서 변모 사건에 묘사된 세 가지 현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사실이냐 아니냐, 신문 기자가 보도할 수 있는 내용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성경 읽기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아킴 그닐카(J. Gnilka)는 <마가복음 주석>에서 예수 변모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의미를 역사적인 재구성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단락의 신앙적 진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로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 가운데 예수를 따라서 그 길을 간다는 각오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함께 전승시킨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경험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민중을 혹세무민에 떨어지게 하는 종교 열광주의자거나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던 반로마 혁명 선동가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고,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냐, 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그를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는 겁니다. 똑같은 유일신교로 분류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비로 이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유대교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모세를 믿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슬람교도 역시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믿지 않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인 알라를 믿습니다. 불교도 역시 창시자인 싯다르타를 믿는 게 아니라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기를 부처로 깨닫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생각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자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순히 하나님께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분이십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주장이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나요? 그들의 주장이 현대 지성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을 아주 단순하게 바꾸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라는 건 다 알지, 그의 말대로 살면 세상이 새로워진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그러나 그를 신으로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믿더라도 적당히 믿어라.’입니다.
이런 논란은 이미 예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막 14:53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이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는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예수라는 자가 신성을 모독했으니 사형당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어서 빌라도 법정을 거쳐서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의 운명은 끝장이 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었고, 그가 다시 세상의 생명 완성을 위해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이비 교도처럼 보이는 어떤 종교 현상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난 겁니다. 도대체 그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요? 왜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는데도 예수를 존경할만한 멘토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으로 믿는 것일까요? 어딘가에 착각이 일어난 것일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실제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가 본받고 존경해야 할 위대한 선생이나 도덕 교사나 선지자로 생각한다면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게 훨씬 편리할 겁니다. 그를 신으로 믿는 건 뭔가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느껴질 만하니까요.
이런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도 바울의 생각을 잠깐 전해드리겠습니다.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이 헛되고 믿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의 인생도 망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19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니라.” 이어서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부활에 관한 설명에서 핵심은 바로 이 구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입니다.
삶을 얻는다는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본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죄는 곧 자기 사랑이고, 자기 중심성이고, 따라서 교만입니다. 자기 안에 매몰되는 태도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이런 죄 안에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울이 말하는 삶을 얻지 못합니다. 잠시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잠시 제 잘난 맛에 우쭐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묶여 있는 한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삶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삶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종말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종말 생명을 기다리라는 거냐, 하는 반문이 가능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다. 그걸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향한 거룩한 갈망이 없으면 지금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적자생존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의 선봉장이 되거나,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어 현실의 삶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삶이 파괴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나름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고 싶으신지,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다가 새롭게 변화될 그 부활 생명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죽음을 맞고 싶으신지 말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인생을 화려하게 살았다고 해서 죽음을 허무하게 맞는 거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을 진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전통은 예수에게서 오직 한번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 일어났다는 가르침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믿지 않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이 문제도 역사가 끝나봐야, 또는 죽어야 드러나겠지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길을 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벗어난 이런 삶의 태도를 가리켜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종말 생명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이 곧 본문이 신화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빛으로의 변모’이며, 엘리야와 모세의 등장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구름 속에서의 소리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제자들은 일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전혀 새로우면서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자들의 이런 경험이 부럽습니다. 예수와 얼마나 친밀했으면 저런 영적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저런 영적 경지에 이르러야만 우리가 삶을 심층적인 차원에서 신비롭게 살아낼 수 있겠지요. 짝퉁이 아니라 ‘찐’ 생명을 사는 거겠지요.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복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그리고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들의 백합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말씀을 이 척박한 현실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니까요.
오늘 본문 중간에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초막 셋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엉뚱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매일 기도하고 말씀 읽고 노동하는 삶이 황홀할 정도로 만족스럽다는 말이니까요. 종말론적 생명을 미리 당겨서 맛보는 거니까요. 그런데 순식간에 구름도 걷히고 엘리야와 모세도 사라지고 예수도 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변화산에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야 할 변화산 아래에는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로 인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실존도 똑같습니다. 산 위에는 빛으로 변화한 예수가 있고 엘리야와 모세가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 제자들은 한쪽에만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에 오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 궁극적으로 산 위와 아래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생명의 신비와 능력은 간질을 앓는 산 아래의 현실 안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게 느껴지시는지요. 그런 느낌과 경험이 없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말장난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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