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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3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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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중곤 목사 |
참고 : | 들풀쉼터교회 |
성경 : 막8:35-38
제목 :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찬송 : 330(370), 336(383), 171(하나님의), 341(367)
막8:35-38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후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말씀하시고, 곧이어 하신 말씀으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폭염이 연일 계속 되고 있는 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덥습니다. 그러나 이 무더운 여름도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어느새 추위에 몸을 웅크리는 시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더위의 열기 속에, 그리고 하와이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재난을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감사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재난이 다른 사람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님’은 얼마 전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45t 탱크로리가 3차로로 가던 목사님차를 들이받았답니다. 핸들을 꽉 잡았지만 차는 빙글빙글 돌다가 중앙분리대를 받으면서 거꾸로 멈춰 섰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차로로 가던 차가 1차로에 거꾸로 서 있었답니다. 마침 1차로로 달려오는 차가 없어서 후속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차는 폐차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지키시듯 목사님 내외를 보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살아 있음’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살아 있음은 가장 큰 감사의 이유라고 하였습니다. 또 아직 할 일이 있어 세상에 남겨 두셨다고 생각하니 사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핸들을 꽉 잡아도 인생의 핸들을 붙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니 살아 있음은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신비이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생명이 이슈(issue)가 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다른 이의 생명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생각한다면 생명을 결코 가벼이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장석주 선생의 ‘대추 한 알’이란 시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 질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 대추야 /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들에 피어나는 한 송이 국화꽃도, 붉어지는 한 알의 대추도 저 혼자 피거나 붉어질 리는 없습니다. 대추 한 알에 들어 있는 인고의 시간과 그 안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생각한다면 지금 숨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적 속에 살아가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은, 큰 사고가 난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될 뿐입니다.
폭염과 자연의 재난 속에 살아가면서 매일 매순간이 기적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가마솥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밭일하러 나간 노인과 신체 적응력이 약한 질환의 사람들이 온열 질환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도 전해집니다. 수많은 위험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살아있음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달콤한 포도열매나 복숭아 등 작은 과일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복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날마다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이 되어주기만 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힘든 삶의 연속이며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살아갈 수 있다 해도, 힘들고 괴로울 때 죽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더우면 더워서 죽겠다하고, 추우면 추워서 죽겠다, 돈이 없어도 죽겠다, 돈이 많아도 늘 부족하다고 여기며 죽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 이면에는 살고 싶고, 살아가고 싶다는 절규가 숨어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명예나 돈을 다 잃었다 해도, 절대로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것은 회피이며 도망가는 것이고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빚을 지고 갚을 길이 막막해도 도망가려하지 말고 살아서 해결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죽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인생의 마지막까지 죽을힘을 다해 책임을 다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 주위에 돈이나 명예를 잃으면 죽음으로 도망가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냐며 열번 백 번을 안타까워한다 해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죽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인가는 죽습니다. 힘이 들고 슬픔이 가득 찬 세상에 살아남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해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슬픔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작은 일에도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시23: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언제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날이 분명 올 것입니다. 여러 가지 힘든 중에도 굳세게 살아남은 우리 성도님들, 지금도 순간순간 부딪혀오는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은 진정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지금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이 밀려올 때에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주어진 일에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칭찬해 주고 다독여 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신 주님께 매순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미국의 대표적 복음주의 작가인‘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1955~)의 저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어느 중년 남자의 집에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습니다. 그는 촛불을 켜려고 양초를 모아둔 창고에서 양초 한 자루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양초가 말을 합니다. “주인님, 나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빛을 밝힐 수 있는지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저를 사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옆에 있던 다른 양초를 잡자 그 양초도 말을 합니다. “주인님, 내가 불을 밝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는 중입니다. 아직 묵상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묵상에서 깨어날 때까지 내 몸에 불을 밝히는 것을 연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문득 옆에 나란히 서있는 네 개의 양초를 발견했습니다. 그들 중에 하나의 양초를 가지고 나가려 하니 네 개의 양초가 함께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는 아직 불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른 초들이 훨훨 탈 때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어떤 양초로도 불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불을 밝힐 양초가 한 자루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나왔습니다. 아내가 왜 양초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묻자,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무슨 그런 양초들이 다 있어요. 도대체 그 양초를 어디서 사왔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양초들은 건너편 마을의 문을 닫은 교회에서 사온 것입니다.
그제야 부부는 그 양초들이 왜 그러는지 알았습니다. 이 시대에 불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불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인생은 결국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5:13-16절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은밀한 곳이나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비취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기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겠고, 크고 작은 수고가 있어야 어둠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비춰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빛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유’라는 책의 저자 ‘정윤’작가는, ‘바람은 불어야 존재의 이유가 있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숨을 쉬어야 산다. 표현하지 못해 애태우지 말고, 망설이다 놓쳐버리지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가자. 살아 있다는 것은, 세상의 많은 것들과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표현하고, 선한일을 위해,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움직이자. 움직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까.’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유엔군 참전으로 다시 탈환 후에, 어떤 사업가가 돌아와 보니 그가 살던 가옥은 멀쩡하였으나 공장이나 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도무지 복구할 엄두도 나지를 않았습니다. 얼마나 피땀을 흘려가며 닦아 놓은 사업이었던가? 설사 사력을 다하여 복구를 한다 해도, 전쟁 중이라 언제 또다시 그런 참변이 있을지 모르는 형편이라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오직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투신자살을 하려고 한강으로 나갔습니다. 투신할 곳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히 여겨 찾아가 보니 비닐로 비바람을 가린 움막에서 한 가족이 돼지죽 같은 것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 까닭을 물은 즉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많은 생명이 죽어갔는데도 그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그날 저녁도 굶지 않게 먹을 것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감동을 받은 그는 그들 가족에게 그의 바깥채가 비었으니 그곳에 와서 살면서 매일 찬송만 불러주면 먹고 살 것을 대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사업가집으로 옮겨 들어가 찬송을 불렀으며 그 사업가의 가정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사업도 번창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찬송을 부르는 가정의 자녀들 중 잘못된 자녀가 없고, 찬송을 부르는 교회 중 부흥하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더 힘찬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면, 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찬송 중에 함께 계시며 우리가 찬송할 때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찬송하고 승리의 삶을 살며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찬양은 모든 헌신 가운데 최고이며, 믿음의 증거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시69:30)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 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 여러 해 동안 유능한 목회자로 사역한 ‘존 루카스’목사님은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활력 있고 힘찬 삶을 보낼 수 있는 비결을 "주님께서 내게 이토록 좋은 건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내가 주님을 항상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렇게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큰 소리로 찬송을 합시다. 그러며 주님은 매순간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기울이는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재산도 무의미하고, 명예도 권세도 무의미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두려움이고 저주이고 어둠의 나라인‘스올’로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말을 들으면 두렵거나 아니면 체념을 하고, 이상한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죽음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다른 차원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눅20:27-38절에서 사두개인의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출3:6절‘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현상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구절을 인용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는데,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차원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려면 생명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더 넓혀야만 합니다. 단순히 숨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는 몸만을 생명으로 알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궁극적인 실체를 낱낱이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지금 살아있다 하나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걸 누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면 그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말씀하십니다. 계1: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아무도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마지막 때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살아있다거나 죽었다는 말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죽는 것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8:23절에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요일2: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모든 삶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 이후에 단순히‘스올’에 떨어지는 것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입니다. 그‘언젠가’는, 내가 알고 있는 시간이거나, 혹 내가 원하는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생명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언젠가’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순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삶은 덧없는 것이고, 죽으면 그만이다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이루어온 주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도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순간의 세계에서 영원의 세계로의 이전(移轉)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호흡의 순간까지, 살아있음에 감사드리고, 내 존재감 과시나, 실망과 상실보다 더 아픈 불평과 원망과 질투 시기. 거짓과 미움 버리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부르심에 따라,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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