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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삶

마가복음 복음............... 조회 수 2376 추천 수 0 2007.11.11 06: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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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1-11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미나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는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내 보았습니다. 이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고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들인 줄 알았는데, 원숭이들이 떠난 숲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고 덮히면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짐으로 숲이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공존하며 관계가 아름답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가끔씩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나 같은 사람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숨이 막혀서 나도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늘 감사하는 것은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소유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엑셀레이터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브레이크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모두가 다 엑셀레이터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면 모두 다 브레이크라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헬퍼(Helper)입니다. 인간은 멍석을 깔고 함께 둘러앉아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가 봅니다.
사람을 인(人)이라고 합니다.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人)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서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혼자 있으면 틀림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서 너는 나 때문에, 나는 너 때문에 안전히 서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는 갓난아이입니다. 짐승은 태어나자 말자 훌훌 털고 일어나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동물의 왕국에 봅니다. 동물은 태어나자 말자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지만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어머니의 돌봄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둘째는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입니다. 이제는 영육이 다 피곤하여져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슈퍼에도 혼자 갈 수 없는 거동 불가능한 노인은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됩니다.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는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이 있습니다.

셋째는 사고를 당한 이입니다. 사고를 당하여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굴러 차가 다 찌그러진 속에 있는 운전수는 자기 혼자 힘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타이타닉 영화를 보면 배가 뒤집혔습니다. 그 속에 사람들이 갇혔습니다. 위로 난 창구멍 통으로 손을 내밀며 사려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철판을 자를 도구가 없습니다.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애타서 발을 뒹굴지만 살려낼 수 없습니다.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습니다. 도저히 손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노상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혼자서는 일 미터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넷째는 병자입니다. 병자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 이가 병자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꼭 붙어있지 않으면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병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갓난아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사고를 당한 이나 병자들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그런 생생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증거하실 때였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서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송곳하나 들어갈 때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어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 하여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줄로 달아내렸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시 일어났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 처럼 사람은 이 세 가지가 없이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1. 사람은 사람 없이 혼자살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그냥 두면 죽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이제 완전히 상실한 사람입니다. 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살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도운 이 네 사람은 과연 누구일가요?
제1 가능성은 가족이나 친척입니다. 이 세상에 가족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부터 퇴원까지 가장 곁에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특히 부부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나 혼자는 소변도 볼 수 없는 아픈 사람이 되었을 때 옆에 있는 것은 아내입니다. 부부입니다. 밤 3시경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옆에 자고 있는 아내를 불러 소변통을 달라고 부르려고 보니 불편한 보조의자에서 이불도 제대로 못 덮고 자고 있는 아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나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을 사람은 이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 가족밖에 없습니다. 코미디언 이 주일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사시는 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가족과 함께 더 즐겁게 지내지 못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 없이 2천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로 쫓겨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단위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다 파괴시켰어도 유대인의 가정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가정 없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최고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메고 가서 살린 네 사람은 누구일가요? 첫 번째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이지만 두 번째 가능성은 가까운 이웃이거나 친구 아니면 교회 성도들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가족은 시작부터 같이 있었고 두 번째로 달려오기 시작한 이들은 친척들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혈연가족이 아니라 복음가족입니다. 혈연가족은 소식을 늦게 듣고 늦게 찾아 올 수도 있지만 복음가족인 우리는 거의 매일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눕고 나니 언제나 옆에 있는 이는 가족이고 그 다음이 교회 식구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복음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이 가장 귀중한 인생의 반려자입니다.

2. 사람은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더욱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옆에 사람이 없어도 잠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시면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당장 얼어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기를 거둬 가시면 5분내에 전 인류가 멸망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숨쉬고 말하고 걸어가는 것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병든 물고기는 물 속에서 몇 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 속에서 잡아낸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없어서 곧 죽고 말게 됩니다. 꼼짝없이 죽게 된 중풍병자에게는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오게 하는 데까지만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소유는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있을 때에서 죽어서나 영원히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집에서도 송곳하나 들어갈 수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고침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이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동물이거나 마귀일 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3. 사람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자연 환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이 평범하지 않은 환경이 이 중풍병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평안하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고통 속에 있어야 부르짖게 됩니다.
생물학자 최 재천 교수는 <알이 닭을 낳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재미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미국 케이밥 고원 사슴 이야기가 있습니다. 1906년 이 지역이 동물 보호 지역으로 지정될 때 이 곳에는 약 4,000 마리 정도 사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슴을 보호하려고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 퓨마 그리고 육식동물들 6,000 마리를 제거하여 버렸습니다. 17년이 지났습니다. 사슴이 70,000 마리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사슴 수가 점점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13년이 지나자 사슴은 10,000 마리 정도로 줄어 버렸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사슴이 너무 많아져서 풀이 모자랐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하게 보호하며 살다보니 사슴들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평안하면 안 됩니다. 긴장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를 그는 하고 있습니다.
미국 페인 박사가 바닷가에서 직접 한 실험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다를 망치고 있는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불가사리입니다. 그래서 해역을 정하여 놓고 불가사리가 눈에 뜨이는 대로 잡아 버렸습니다. 6개월 지나자 불가사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바위틈에 따개비가 수없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홍삼도 풍부하여졌습니다. 불가사리가 먹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위틈에서 집을 짓고 사는 해조류가 없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주변에 해조류를 잡아먹고 사는 동물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흉악한 불가사리를 없애고 나서 조사하여 보니까 7 종류가 사라졌다는 보고입니다. 불가사리가 있을 때에는 15 종류가 살고 있었는 데, 불가사리가 사라지고 나니까 8종으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내륙으로 송어를 나를 때입니다. 산 송어를 날라야지 죽은 송어는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10시간 이상 내륙지방으로 송어를 물 속에 넣어 나르다 보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송어 운반업자가 그 속에 조그만 상어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몇 마리를 잡아먹었지만 10시간 달려서 송어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상어 밥이 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도망 다니다 보니 팔팔하였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환경이 나쁘고 악할 때 그 때 영적으로는 살아 날 때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시편기자가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입니다. 폭풍은 좋은 선장을 만들어 내는 법입니다. 좋이 않은 환경이 닥치거들랑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맞서 나가시며 승리하여야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도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데 거실 TV에서 유행가가 울려 나왔습니다.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선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그렇습니다.
사람 없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적절한 자연 환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더불어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사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우람한 적송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레드우드 공원과 같은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물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엔 늘 그늘이 지고 습기의 증발이 억제되어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의 나무들도 한 그루씩 자꾸 베어지면, 앞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보습(保濕) 기능을 잃고 메마르게 되어 나머지 나무들도 전부 말라 죽고 맙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할 때, 레드우드 공원의 숲처럼 사막도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잔디는 씨앗이 듬성듬성 뿌려지면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씨앗이 서로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을 때 잘 자란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잔디의 자라는 모습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밀조밀 붙은 씨앗이 서로 경쟁을 하기보다는 양분을 나눠 가지며 더불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의식과 신념」은 필요 충분조건입니다.
어떤 농부가 쳐놓은 그물에 두 떼의 새들이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떼의 새들은 『자, 우리가 힘을 합해 날아 올라 그물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면 산다 』고 외치며 동시에 솟구쳤습니다.
그러자 「연약해 보이는 날갯짓」이 큰 힘을 발휘해 조금 높은 버드나무 가지에 그물을 걸었고 새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한 떼의 다른 새들은 『우린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모두 농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설렁탕 곰탕 자장면 가게 등에 가면 나무젓가락을 씁니다. 쇠젓가락 보다 미끄럼이 덜해 한결 쓰기 편합니다. 나무젓가락은 대부분 이중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겉은 상호나 선전문구가 인쇄되어 있고 안쪽은 얇은 종이가 젓가락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얇은 종이는 불면 날아가고 물만 닿아도 녹아버립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 얇은 종이를 펴 새끼줄 꼬듯 두 겹, 세 겹으로 꼬면 놀라운 결과를 접하게 됩니다. 물방울에도 녹아버리는 그 종이가 가위나 칼이 아니면 자를 수 없는 단단한 노끈이 됩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성경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 9-12) 는 말씀입니다.
줄은 꼬면 꼴수록 강해지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힘의 원리란 나눌수록 약해지고 합할수록 강해집니다. 수력발전 역시 물보라를 튀기며 산산이 흩어지는 물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에너지화하는, 이른바 집합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불의 경우도 다를 바 없습니다. 모닥불도 모으면 작열하는 불꽃이 피어오르지만 헤치면 꺼져버립니다. 벽돌도 한 곳에 모아 쌓아올리면 빌딩이 되지만 흩어놓으면 한 장의 벽돌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힘도 모으면 폭발력이 일어나지만 뿔뿔이 흩어지면 미력에 불과하게 됩니다. 건국 초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던 구호 속에 담긴 뜻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 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셈에 익숙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합하고 곱하는 데는 서투르고 빼고 나누는 데는 지나치게 빠르고 익숙합니다. 하나인가 싶더니 열이 되고 함께 하는가 싶더니 철천지원수가 되어 갈라서기를 밥 먹 듯합니다.

OECD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상위를 기록하는 것도 바로 나누기에 익숙한 생활패턴 때문입니다. 분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바라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통일의 꿈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통일이 되리라는 소망과 믿음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네 현장입니다. 나누고 할퀴고 갈라서는 이합집산의 되풀이가 언제쯤 끝나려는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한 지붕 한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사람끼리도 이러하다면 반세기가 넘도록 색다른 체제와 이질문화로 조련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손잡고 껴안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겠는가 하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 겹줄 기적을 일궈낼 수만 있다면, 아니 그것은 가능합니다. 작고 작은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치러냈고 월드컵의 꿈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외환위기의 수렁도 벗어났습니다. 우리에겐 위기 극복의 저력이 있고 슬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힘을 합하면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마는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진일보하여 삼 겹줄을 열 겹줄로 만들기만 한다면 쇠톱으로도 못 자르는 폭발적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야도, 노사도, 계층도, 교파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주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정식이 다른 그 조건들이 삼 겹줄이 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한 줄 혹은 V자 형태로 날아갑니다. 그런 형태로 무리를 지어서 날면 한 마리가 날아갈 때보다 훨씬 힘이 덜 들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기러기가 날갯짓을 하면서 내는 바람이 뒤에 있는 기러기를 올려주고 또 그 기러기가 내는 바람이 바로 뒤에 있는 기러기를 올려주어 혼자서 날 때보다 71%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이 기러기떼의 원리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할 때 얻는 상승작용은 힘든 일도 훨씬 쉽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서로 격려하고 세워줄 때 더 효과적인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과 시기로 서로 헐뜯는다면 분열과 갈등이라는 고통스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한 겨울에 먼 길을 떠나는 두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치게 되자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산길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히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그네는 "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하며 도망치듯 가는 것이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은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걸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더 심해지고 정신마저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으로 점점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길 옆에는 혼자서 먼저 간 친구의 얼어 죽은 시체가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간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혼자 간 나느네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전4:9-12)

해가 질 무렵 앉은뱅이와 장님이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속도가 느리고, 장님은 보이지 않아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생각 끝에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앉은뱅이는 장님의 두 귀를 잡고 방향을 알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무사히 고개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렇게 서로 도울 수 있다면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간단히 누구나 찢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번호 명부를 보십시오. 누가 이 책의 한 가운데를 찢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많은 종이가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장이라면 그처럼 간단히 찢어져도 여러 장이 겹쳐져 있으면 좀처럼 찢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신자들이 모여 함께 일하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자녀를 해치는 일을 어렵게 여길 정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서 지키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 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 아버지, 내게는 가정과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또 일할 수 있는 직장과 조국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신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처럼 그렇게 행복한 삶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처할 가정이 없이 방황하는 자들과 신앙이 박해받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근로 환경이 열악한 상태에서 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격무에 시달려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과 가정에서 동정을 받지 못함은 물론 심지어 학대를 당하는 자들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자들과 정신 이상에 걸려 정신요양소에 수용되어 있는 자들과 옥에 갇혀 있는 자들과 사람들로부터 멸시 당하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오! 하나님, 내가 행복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그들의 불행을 결코 잊지 않게 하옵소서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하게 하소서.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서로 돕게 하소서. 우리나라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다운 사랑과 협력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더불어 살기

* 성경: 출18:18
“그대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그들을 ‘군대’라고 불러주시지만 사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장정만 60만명이 되는 히브리 민족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집단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하층민으로 살았으니 무슨 잘 짜인 조직이 있었겠습니까. 기껏해야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해 히브리인 중에서 십장 역할을 하는 하급 중간 관리자들이 있었을 뿐이었을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겨우 시내(시나이)산 근처에 도착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뒤 첫 목적지는 시내산.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과 구체적으로 계약을 맺고 문서화된 율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까지만 오는데도 이미 여러 번 불평과 원망이 있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쓰다고 불평했고 신 광야에서 먹을거리가 다양하지 못하다고 원망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강짜를 부렸습니다. 얼마나 훈련이 안된 사람들인가요!
모세는 이런 백성을 혼자서 상대하다시피 했습니다. 오죽이나 피곤했을까요. 오늘 묵상하는 말씀에 그 장면이 아주 잘 묘사돼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이 줄을 서서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내내 백성들의 크고 작은 분쟁이나 문제를 풀어주는 데 매달려야 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참 정확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곡을 찌르며 말합니다. “하는 일이 선하지 못하다” 미련하단 말 아닙니까. “자네와 함께 한 백성들이 탈진될 것이다” 모세뿐 아니라 줄서서 기다리는 백성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탈진되는 것보다 삶을 더 위협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힘들다” 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나치면 꺾이고 맙니다. 돌연사란 병이 그래서 오는 겁니다. “자네가 혼자 할 수 없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해야 할 그 어떤 일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며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일,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일 때문에 탈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 일을 나누어 하고 또 적절하게 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기도: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하게 하소서. 우리 성도가 서로 돕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묵상 및 토의
0 내가 지금 돌아보아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그를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0 눈앞에 있는 이익이나 편안함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0 나는 나에게 돌아오는 유익이나 영광이 적더라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동역하기를 기뻐합니까?
0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 합니까? 아니면 지체를 격려하며 위로합니까?
0 공동체 안에 정의가 실현되고 있습니까? 나에게는 이웃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만한 사랑과 용기가 있습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 옛 농부들의 나눔 정신

우리의 옛 농부들은 논두렁에 콩알을 세 개씩 심었다고 한다. 하나는 땅 속의 벌레나 땅 짐승이 먹고, 다른 하나는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나 들짐승이 먹고, 나머지 하나가 자란 것만 농부가 먹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더불어 살며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 예화(2): 공생관계

코뿔소는 시력이 대단히 나쁘다. 그러나 이 동물의 거친 살결에 몰려드는 새들이 있다. 이 새들은 코뿔소의 등 위에서 곤충들을 잡아 먹는 대신 그들의 민감한 감지력으로 코뿔소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레이틀이라는 오소리의 일종과 두견새는 모두 꿀을 좋아한다. 그래서 둘은 같이 행동한다. 아주 좋은 시력을 가진 두견새는 꿀이 있는 벌집을 잘 찾아내고 레이틀의 강한 발톱은 벌집을 파헤쳐 같이 꿀을 나누어 먹는다.
악어와 악어새는 서로 돕고 산다. 악어가 물 밖으로 입을 벌리면 악어새가 날아와 악어의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를 먹는다는 것이다. 악어새는 먹이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좋고, 악어는 양치질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느린 말미잘도 집게 등에 얹혀서 쉽게 이동할 수 있고, 집게는 위험한 일이 닥쳤을 때 말미잘을 이용하여 적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서로 공존한다. 이와 같이 생태계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공생관계의 생물들이 많이 있다.

* 예화(3):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의식 속에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식구조, 즉,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구조 하에서는 나와 '다른 것'은 바로 '틀린 것'이 되어 버린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분명 다르다. 그러므로 봄과 가을이 옳고 여름과 겨울은 옳지 않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야당과 여당,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면 지난날은 「상극의 시대」로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으로 통하였다. 그래서 끝없이 싸우고 짓밟고 투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 안에서 서로가 살 수 있는 「상생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더불어 나도 살고 너도 사는 Win-Win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할 때"' 가능 한 것이다. 우리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또 다른 처지에서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영어에 'Understand' 라는 말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 아래에(Under) 서볼때(Stand)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 34)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 10)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드뭅니다. 민들레도 바람이 있어야 씨앗을 뿌릴 수 있고, 햇살이 있어야 이쁜 노란빛 꽃잎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 예화(4): 더불어 사는 삶

‘멀리 가는 노래’라는 짧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사자가 바다제비에게, ‘누구 소리가 더 멀리 가나?’ 하는 시합을 걸어왔다. 시합의 공평을 기하기 위해 갈매기를 심판관으로 정했다. 먼저 바다사자는 수평선을 향해 “우와와와와아아”하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온 바다를 다 채울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다.
다음에 바다제비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나약하고 바람결에 날아가는 듯 가냘펐다.
갈매기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까지 날아가 도요새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냐고 물었다. 도요새는 “바다사자 소리는 굉장히 크고, 바다제비 소리는 실같이 가냘프다”라고 말했다. 갈매기는 더 멀리멀리 바다 끝에 있는 섬까지 날아가 소라에게 물었다. 소라는 “바다사자 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바다제비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던걸” 하고 말했다. 결과는 바다제비의 승리였다. 어떻게 바다제비의 실날 같이 가냘픈 소리가 더 멀리 갈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너무도 단순했다. 바다제비 한 마리가 노래하면 그 노래를 친구인 바다제비가 전달하고, 또 전달해 주고 하는 것이었다. 과연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도전이 되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심히 앓아 가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기를 원한다. 자기만의 담을 높이 든든하게 쌓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현장 속에서 더불어 사는 일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 예화(5): 팔 없는 병사들로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미국에는 지미 듀란테라는 아주 유명한 희극 배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시애틀의 재향군인병원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쇼 기획자에게 자신이 너무 바빠 딱 십 분 밖에 출연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서야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그는 짤막한 원맨쇼를 끝내고 나서도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대에서 30분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객석의 군인들은 계속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무대 뒤에서 쇼 기획자가 그에게 다가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난 당신이 몇 분간만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공연료는 약속된 10분 이외에는 더 지급되지 않는데요."
지미 듀란테는 조용히 무대 앞줄의 상이용사 두 사람을 가리켰다. 둘 다 전쟁에서 팔 한쪽씩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왼팔이 없는 한 병사와 오른팔이 없는 한 병사가 남은 한쪽 팔을 서로 부딪쳐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즐거운 표정으로 말이다.
"보게. 나도 처음에는 그럴 계획이었지만, 저 팔 없는 병사들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었네. 박수라고 하는 것은 두 손이 온전한 사람만이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남은 한 손을 모아서 박수를 치는 저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만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네. 내가 여기서 받은 그 감동은 몇 십 분의 유료 공연보다 열 배, 백 배, 아니 천 배 만 배 더 귀하고 값진 것일세. 그렇지 않나?"

새끼 손가락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몸을 쑤시고 아프게 합니다. 미세한 세포 하나도 혼자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당신이 있고, 당신 때문에 내가 즐거울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습니다. 별 하나하나가 모여 은하수를 이루고 우주를 만듭니다.

* 예화(6): 협동

어느 날 시각장애인과 한 쪽 발을 못 쓰는 장애인이 고갯길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고갯길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시각장애인의 말에 다리장애인은 "제가 어떻게 당신을 도와주겠습니까? 제 다리도 끌고 가기 힘든데..."라고 말한 후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업고 간다면 나는 당신에게 장애물을 일러 줄 수 있다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는 서로 도와야겠군요" 고갯길이 좀 가파르기는 했지만 이 두 사람에게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 예화(7): 혼자서 애쓰는 목사님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하며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성도들을 대신해서 예배당 청소를 하고, 차량운행을 하고, 구역예배 인도며, 사모님과 함께 주일 점심식사 준비까지 손수 다 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보 복사, 찬양대의 악보편집까지 목사님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교회유지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목회자가 그 정도 헌신적이면 교회가 무럭무럭 커져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반대로 성도들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왜? 할 일이 없으니까요. 목회자는 감독이고 성도들은 선수입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열심히 훈련시켜서 시합을 잘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선수들은 놀고 있는데, 감독이 경기를 하고 있으면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혼자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좀 쉬세요. 선수들이 뛰게요"

4. 찬송: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
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피 받아
한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5. 협동에 관한 성경연구

가. 협동의 기본조건
1) 하나님께 복종함(시119:63)
2) 하나님을 믿음(롬14:1)
3) 한 마음 한 뜻(빌1:27)

나. 협동의 종류
1) 인간과 인간의 협동(출17:12, 삿20:11)
2)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빌2:12, 13)

다. 협동의 필요성
1) 일을 완성시킴(느4:16, 17)
2) 회심자를 얻음(요1:40-51)
3) 화평을 유지함(막9:50)
4) 합심 기도의 성취(마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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