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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 (familia Dei)

마가복음 차정식 목사............... 조회 수 4403 추천 수 0 2003.05.22 11: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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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3:3-35 
설교자 : 차정식 목사 
참고 : 새길교회 

 하나님의 가족 (familia Dei)


매년 5월이 되면 교회마다 상한가를 달리는 설교의 주된 메뉴는 가족이고 가정입니다. 으레 가정이 달이 선포되고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을 맞아 교회도 각종 행사로 분주합니다. 가족의 해체와 가정의 붕괴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면서 가정사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가족화합니다. 이런 방면에서 주로 동원되는 성경의 근거는 가족의 성스러운 원형이라는 아담과 하와 가족의 이야기이고, 가족의 성원들끼리 화목하게 사는 원리로 순종과 사랑의 교훈을 강조하는 에베소서, 골로새서의 가르침들입니다. 여기에 기대어 설교자는 수직적 위계질서 중심의 보수적인 가족 윤리를 두루 선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인 양 생각할 때 가족에 대한 이해는 좁아집니다. 이러한 이해의 수준에 머물 때 우리가 그토록 옹호하고 부르대는 가족이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의 가정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은 겉돌기 십상입니다. 예수께서 가족을 떠남으로써 펼쳐 보인 가족의 새로운 지평은 어떠하며, 그 신학적 도전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도 덩달아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이른바 '건강한 가족'에 대한 뜨거운 염원이 너무 뜨겁다 보니 우리 주변의 적지 않은 독신자들, 그리고 일부 가족 성원의 이혼, 장애, 사망 등으로 외형상 가족의 테두리가 일그러진 경우에 대한 속 깊은 배려가 사장되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가족이 한 집안의 구성원이라면 가정은 그들의 공동체적 삶이 머무는 뜨락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대개 그 가정의 울타리가 혈통을 강조하는 가부장주의의 전통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가족주의의 문화가 배양되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혈통상의 계승과 유대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가족 문화와 결합하여 그리스도교 내에서조차 그런 인식의 한계를 냉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가족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합니까. 또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온당한 겁니까? 나아가 성서는, 특히 예수께서는 어떤 식으로 가족을 이해하셨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주목해보십시다.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군중들에 둘러싸여 한참 사역에 열중하시던 예수를 불렀답니다. 해서, "모친과 동생들, 누이들이 당신을 찾습니다"라고 그 메시지가 전해졌는데, 이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뜻밖으로 냉담했습니다. 그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주변에 있는 자들을 둘러보시며, "내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주변 맥락을 살펴보면, 가족들이 예수를 찾은 이유가 좀 수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항간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나섰고, 그를 붙잡아둠으로써 아마도 가문의 망신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 예수께서는 바알세불 논쟁으로 서기관들과 치열한 공박을 벌이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바알세불 귀신에 들려 미친놈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서기관들의 불순한 비난에 예수는 귀신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자중지란 불가론으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을 박대하는 듯한 예수의 저러한 언사가 혹 그들이 적대자들과 한 통속으로 예수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이었을까요? 실제로 복음서 내에는 예수와 그 가족들의 불화에 대한 몇몇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라기보다, 가족에 대한 기성 개념을 해체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하나님의 가족이란 새로운 지평을 연 소중한 메시지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가족을 구상하고 실천한 데에는 나름의 내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예수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 가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사사로운 혈통적 연고에 집착, 매몰되기보다 공공의 대의와 명분을 향해 시야를 넓히고 의식을 깨치며 마음을 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서구 지성사의 전통 가운데 플라톤은 한 남녀의 결합에 따른 혈통 지향적 가족을 타파하고, 그렇게 생산된 자녀를 포함하여 모든 가족 성원들을 국가가 공동으로 돌봐야 한다는 과격한 가족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념은 국가의 변두리에서 개인적으로 수용되어 후대에 가족을 떠나 방랑하는 적잖은 구도자들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가족 사상에는 하나님 나라의 내세적 삶을 선취하려는 모험 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한 흐름 가운데는 사람이 죽어서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변형되며, 그런 존재가 되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도, 자식 낳은 일도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이를 수용하신 걸로 보입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제자도의 선결 조건으로 가족과 재산의 전적인 포기를 요청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의 파송 설교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고 심지어 가족끼리 원수가 되어 고발하며 법정에 끌려가는 매정한 분열과 갈등을 감내해야 하리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경우의 내력을 종합해볼 때, 예수는 그의 출가정신을 통해 지상에 국한된 혈통상의 가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보다 넓고 높은 공동체의 차원에서 가족의 개념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재구성한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은 혹 플라톤의 가족해체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주장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가복음의 다른 곳에서 '고르반'의 관행을 예로 들어 부모에 대한 의무의 즐거움을 언급합니다(7:6-13). 또한 그는 가족의 선물인 어린아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며, 그들을 기독교적 행동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는가 하면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9:33-37; 10:13-16). 이처럼 같은 복음서 안에 한편으로 가족의 틀을 깨는 과감한 출가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결혼, 어린아이, 부모와 관련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표명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예수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하시면서 변덕을 부린 걸까요? 타이센(G. Theissen)이라는 독일의 성서학자는 이러한 괴리를 전승상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마가복음에 사용된 자료 가운데 카리스마적 유랑자의 스타일을 추구한 자들의 삶을 담아낸 Q라는 자료가 있었는데, 여기에다 저자는 지역공동체에 뿌리내린 정주자의 관점에서 가족의 가치를 회복하고 옹호하는 말씀을 보탬으로써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의 균형 감각을 발휘해본다면, 우리 가정의 현실에 비추어 예수께서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이 던지는 도전과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묻고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출가 정신이 나 자신의 삶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가. 우리의 가족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충분히 편입된 상태인가. 반대로, 내 가족만이 최고요, 전부라는 자폐적 소가족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의 가정은 그 성원들이 서로 소통하며 대화하는 따스한 둥지로서의 열린 공동체인가. 아니면, 위계를 내세워 억압하고 그 폐단을 쉬쉬하는 갑갑한 무덤으로서의 닫힌 성채인가. 우리 가정의 울타리는 내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끌어안을 만큼 너른 성령의 품인가. 혹은 제 식구들만 챙기기에 분주한 협소한 욕망의 토끼장인가. 우리 집에 동거하는 예수는 그저 편리한 가부장주의의 표상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억압적 가부장주의의 질곡을 타파하는 평등과 해방의 징조인가. 간단히, 우리 집은 일년에 그 울타리 밖의 몇 사람이나 초대하여 안방을 내주고 얼마나 극진하게 대접하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가족과 어버이를 떠올릴 때 유년기에는 억압과 도피라는 말이, 청년기에는 싸움과 애증이라는 말이 각각 떠오릅니다. 어린시절에는 엄한 부친 밑에서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혀 야단을 맞을까' 늘 불안했고 그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자못 컸었는데, 마침 동네 뒷동산이 있어 그리로 도망 다니면서 숨구멍을 찾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나이 열아홉이 되도록 제가 태어나 자란 고향집을 떠나보지 못한 미숙아였습니다. 그 이후로 한번 뛰쳐나가 서울로, 태평양 건너로 줄곧 떠도는 방랑과 방황의 길목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부모님과의 적잖은 갈등과 대립으로 치열한 싸움의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방랑과 방황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출가의 결행이라기보다 분망한 정서적 소모에 가까웠던 걸로 회고됩니다. 또한 그 갈등과 싸움의 날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와 명분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아집과 분노의 표출에 가까웠지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이제 저도 애들 셋을 키우며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많은 애비가 되어 그동안 그렇게 원망하고 도피해온 제 부모님의 수준을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망상으로 점점 소심해지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이런 저런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대 제도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한 예수의 결기 어린 출가 정신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이념은 우리의 삶 가운데 생동하는 반성과 결단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음습하게 똬리를 튼 배타적 혈통주의와 폐쇄적 가족주의는 여전히 강고하게 현존합니다. 이로부터 파생하여 우리 사회를 두루 좀먹고 있는 각종 연고주의가 판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바로 거기에 칼을 던지셨고 불을 던지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혈통 지향적 가족 개념이 모체가 되어 형성된 각종 연고주의의 성채 속에 이런저런 결속과 유대와 조직이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더욱 쓸쓸하고 서럽게 만드는 권력의 카르텔이 된다면, 거기에 어찌 하나님의 가족이 자생할 영적 토양이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의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읍시다. 한 달에 한번, 일년에 몇 번이라도 친구와 이웃, 특히 지극히 작은 자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여 안방을 내주고 여러 분이 주무시는 그 푹신한 침대에 누워 그들도 자보게 합시다. 바쁜 일상에 틈을 내어 함께 음식도 만들고 나눠 먹으면서, 우리 서로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언니, 동생으로 불러보십시다. 그 너른 가정의 품에 우리 서로를 따스하게 품어보십시다. 저도 눈물겨운 맘으로 여러분들을 제 어버이로, 누님으로, 형님으로, 동생으로 불러봅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육친의 어버이들, 형제들도 그 모습을 대견히 여겨 언젠가 한번쯤은 흔쾌히 웃어주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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