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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가복음 정경일............... 조회 수 3390 추천 수 0 2003.07.08 1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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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30 
설교자 : 정경일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 마가복음서 5:30

1. “그래서?”

제가 사병으로 군에 입대한 때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운동과 담쌓고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입대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려니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습니다. 어느 날 체력측정이 있어 ‘멀리뛰기’를 하게 되었는데, 무심코 힘껏 뛴 저는 갑자기, 허벅지에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조교에게 기다시피 다가가 고통을 호소했을 때, 선글래스를 끼고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저 사이에는 꽤 길게 느껴진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고, 저는 더 이상 그에게 고통을 호소하지 않기로 하고 이를 악문 채 일어났습니다. 며칠 뒤 내무반에서 옷을 벗는 데 동기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허벅지 양쪽이 두들겨 맞아 멍든 듯 온통 검붉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야 의무대로 보내졌는데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피가 근육과 조직에 스며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교가 말했던 “그래서?”에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그 무더운 여름날의 경험을 지금껏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 조교에 대한 괜한 서운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 경험이 “그래서?”라는 냉담함이 제 마음 한 구석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저는 예수를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분은 결코 “그래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저는 이웃의 고통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세 가지 주제로 생각해보았습니다.

2. 예수의 사랑과 연민

첫 번째 주제는, 의식보다 빠른 사랑의 유출입니다.

어느 날 예수는 야이로의 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기적의 예감에 흥분한 군중은 예수를 에워싼 채 소란을 떨며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누가 자기 옷을 만졌냐고 물으셨습니다. 자기 능력이 빠져 나갔다는 이상한 말씀도 하셨지요. 그러자 한 여성이 나아와서는 자기가 옷을 만졌고, 그 순간 12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병이 나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예수가 자기 능력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치유하는 힘이, 예수가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하기 전에 빠져나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이 지닌 민감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여성은 일, 이년도 아니고 십이 년 동안 질병과 가난, 사회적 배제라는 삼중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죄인으로 구별되어 구원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처지였습니다. 그 고통은 어떤 언어나 몸짓보다도 강렬하게 전달될 만한 것이었지 않을까요. 그의 아주 오래된 절망과 실날 같은 희망이 예수의 감각과 의식보다도 더 빠르게 예수의 중심에 전달되자, “어떻게 할까?” 생각하실 틈도 없이 치유하는 힘이 유출된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던 예수의 가르침이 단순한 은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분은 자기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나도 모르게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셨으니까요.

이렇게 민감한 사랑의 소유자였으니, 예수는 눈에 보이는 고통은 더욱더 못본 체 할 수 없으셨겠지요. 그래서 두 번째 주제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호소보다 앞서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서 7장에는 여행 중이던 예수 일행이 나인성 성문 근처에서 상여행렬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동네 많은 사람이 상여를 따르고 있었다니까 아마 착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때 예수는 그 과부를 가엾게 여겨 울지 말라고 하시더니 관을 멈춰 세운 후 죽은 청년을 살려내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여행렬 가운데 아무도, 심지어 가장 상심했을 그 과부조차도 예수에게 관심이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가 세 가지 나옵니다. 야이로의 딸, 베다니의 나사로, 그리고 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입니다. 그중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간청에 의한 것이었고, 나사로는 친한 친구를 살린 것이었지만 이 과부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습니다. 예수는 생전 처음 본 여성의 고통을 이심전심으로 느끼셨던 거죠. 남편을 잃고 홀로 하나뿐인 아들을 키워왔을 그가 다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며 겪었을 슬픔은 말이 필요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농경사회에서 홀로 남게 된 그의 처지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이었을 것이고요. 그 고통의 파장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신 예수는 과부의 호소가 있기 전에 먼저 다가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이 제게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닙니다. 올 봄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저는 아이의 필요가 뭔지 끊임없이 살피고 그 요구를 채워줍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이를 보면 먼저 다가가 함께 염려하고 위로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주고 받을만한 관계 안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경계 밖의 고통까지 책임지다간 삶이 고달파질 거라 여겨 짐짓 모른체하기 십상이죠. 그런 제 모습이 ‘예수 따르미’보다는 ‘예수 구경꾼’에 가까운 것 같아 부끄러울 뿐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경계에 갇히지 않는 사랑입니다.

12년 동안 병들었던 그 여성은 야이로처럼 공개적으로 간청하지 못하고 남몰래 예수의 겉옷을 만져야 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정한 부정한 죄인, 접촉해선 안 될 죄인이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사랑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정결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은 박애가 아니라 편애입니다. 편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박애는 스캔들입니다. 사랑해선 안 될 죄인들을 널리 사랑한 예수는 당대의 대표적 스캔들 메이커일 수밖에 없었겠죠. 저는 예수의 스캔들 중에서 삭개오와의 우정을 가장 감동적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적’에 대한 사랑보다 어려운 우리 ‘내부의 적’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세리와 죄인’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탈무드에도 길에서 세리와 개가 쓰러져 있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하냐는 질문이 있고, 세리에게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 시대에 세리들은 성전이나 회당의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서 18장의 비유에서 한 세리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서’ 기도했다는 것은 이들이 종교적으로도 배제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로마의 통치 편의를 제공한 삭개오는 유대 사회의 통념에서 미움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증오에는 공평치 못한 점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는 일부 저항세력과 광야의 은둔자들을 제외하고는 식민적 삶을 포기한 이들이 극히 적었고, 특히 예수가 강하게 비판했던 예루살렘 성전권력은 로마의 지원 하에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마저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식민의 땅에서 일상을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식민체제에 대한 공조를 전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증오를 집중시킴으로써, 식민지배에 동참하고 있던 내면의 죄의식을 떨쳐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제국에 협력한 삭개오를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살펴 볼 때 그는 자신의 삶을 회의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사회에서 배제되었고, 그렇다고 로마 시민이 된 것도 아닌 모호한 처지에서 그는 외로움에 허덕였겠지요. 그렇게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구원을 갈망하던 그를 예수는 못 본 척 지나가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율법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 예수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예루살렘 성전권력과 목숨 건 충돌을 앞둔 절박한 때에 예수는 일정을 바꿔 삭개오의 집에 하루 머물기로 하셨습니다. 당연히 유대인 사회는 이 만남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의 집 근처에 모여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며 수군거립니다. 이런 배제와 독선에 속이 상하셨을까요. 예수는 비난하는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외칩니다. “(당신들이 배제하는)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사랑받지 못할 죄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은총의 복음이었습니다.

3. 십자가, 불이(不二)의 길

이런 예수의 사랑은 흐뭇한 미담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빠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실 때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예수 따름의 완성이 십자가임을 예감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한없이 따뜻하며 한없이 위험한 길입니다. 이 위험의 수반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목격하고도 침묵하거나 눈감게 됩니다. 십자가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는 고통을 탐닉한 분도, 종교적 수행의 방편으로 고행을 택하신 분도 아니셨습니다. 복음서도 예수가 십자가를 두려워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결국 자신의 의지를 접고 십자가를 받아들인 반면 저는 가급적 십자가를 피하려 합니다. 이리저리 십자가를 피해 다니는 제게 예수가 묻습니다. “당신이 이루려는 자매애, 형제애는 어디까지입니까?”

지난 봄, 미,영 동맹군이 이라크 침공을 시작했을 때 밤늦게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뜬금없이 “예수님을 믿으십니까?”라고 말을 걸더니 전쟁의 참상을 실감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마 미국을 규탄하려나보다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아무리 반대해봐야 소용없어요.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우리는 세상이야 어찌 되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라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가뜩이나 심난했던 저는, 죄없는 이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만 안전하다고 해서 감사할 수 있냐며 싫은 소리를 했지만, 그는 반응하는 대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미련두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만 바라십시오.”라며 설교조로 이야기를 마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만드는 소식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제목은 ‘행복으로의 초대’였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이들이야 죽든 말든 우리만 구원받아 행복하면 그만인가요? 그런 이기적 믿음이 통용되어도 괜찮은 건가요? 예수는 세상의 고통에 눈감고 홀로 행복할 수 있는 기독교는 상상도 못하셨을 겁니다.

저는 지난 봄, 깊은 인류애와 생명애로 예수처럼 행동했던 이들을 또한 기억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파괴하는 이스라엘군의 불도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그만 불도저에 깔려 살해당한 스물 세살의 미국인 여성 레이첼 코리, ‘충격과 공포’의 하늘 아래서 이라크 민중과 함께 고통을 나눴던 퀘이커, 메노나이트와 세계의 평화지킴이들, 새만금을 살려달라며 해창 갯벌에서 광화문까지 칠백리 三步一拜를 목숨 걸고 단행한 구도자들... 이들은 먼 곳의 이웃을, 심지어 생물학적 종(種)의 경계조차 넘어선 사랑을 목숨 걸고 실천했습니다. ‘결사’(決死)라는 말이 가벼운 수사(修辭)가 되어버린 시대에,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뿐인 목숨마저 걸게 한 걸까요?

파괴의 현장에서 절망하던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나는 바깥 세계에서 자행되는 학살에 내가 관여되어 있음을 완전히 모른 채 살거나, 그것을 막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안락한 삶을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평화지킴이들이나 삼보일배를 실천한 이들 역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과 연대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들의 삶과 죽음, 사랑이 근원에서 예수의 사랑과 통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동양적 사유로 풀어낸다면 불이(不二)의 세계관과 실천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은, 모든 존재의 고통을 온전히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합니다. 이런 관계적 진리에서 ‘나 홀로 행복’은 망상(妄想)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라는 반응은 철저히 反 예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따뜻하며 위험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을 보며 저는 희망을 느낍니다. 그들의 사랑이 신화와 경전 속이 아니라 제가 발 딛고 선 같은 땅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 그렇게 살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렇게 살아버리는 동료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게 부끄러움을 주면서 동시에 구원의 희망을 줍니다.

저도 그들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새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 길이 예수께서 걸으신 길이라 믿으며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이 길의 끝은 어디입니까?
길이 끝나고 영원이 시작될 그곳은 어디입니까?

당신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너무나 많은 대답을 주셨기 때문인가요?
그 답을 삶으로 옮기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겪을 아픔 때문에,
그저 젖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건가요?

하나님,
우리의 눈을 푸르게 해,
그곳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 희미하게 빛나던
그분의 미소를 보게 해 주십시오.

사랑이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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